중국의 옛 기록들은 이때의 싸움을 ‘봉황과 용의 대결’ 혹은 ‘불(염제 신농 : 불의 신)과 물(황제 헌원 : 우레와 비의 신)’의 싸움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황제를 중국을 대표하는 용으로 보고, 신농을 동이계의 상징인 봉황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이 문제를 알아보자. 신농은 우리 동이 9족 중 풍이(風夷)에 속하고 풍이는 특히 봉(鳳)을 상징으로 삼았다. 『설문』에, “봉은 신조(神鳥)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봉이 나타나면 천하가 평안하고 뭇새들이 그를 따른다.”고 하여, 봉을 동방 배달한국의 상징으로 보고 한웅 임금님이 움직이면 천하의 질서가 잡히며 모두가 그 위엄에 복종한다고 표현했다. 봉(鳳)은 암컷을, 황(凰)은 수컷을 뜻하므로 봉황(鳳凰)은 암수 한 쌍을 말한다.
중국인들은 오늘날까지 황제(黃帝)를 하인(夏人) 출신인 토덕(土德 : 원주민)의 왕으로 북방민족에 저항하여 중국을 지켜낸 대표주자로 추대하고 있다. 그런데 헌원 역시 중국인들의 염원과는 달리 봉황을 숭상하던 동이족 출신이었다. 또 치우천황에 대항하기 위해 현지 세력을 규합하여 10년 전쟁의 악전고투 끝에 얻은 것은 중원의 자치정부의 수장(首長)격인 내부(內部)의 장관 황제(黃帝)의 벼슬이었다. 이 ‘황(黃)’자는 그의 자손들에 의해 ‘황(凰 : 봉의 수컷)’자의 같은 발음인 ‘황(皇)’자로 변하여 중국 왕들의 칭호가 되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판천(板泉)회전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한 헌원은 이후 신농의 반군들을 흡수하여 엄청난 군세를 형성하였다. 이제야말로 적제 신농과 정면승부를 겨루어볼 만하다고 생각한 헌원은 감히 신농의 도성(都城)을 공략하여 유린하는데 성공하고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계속된 패전으로 힘을 잃은 신농은 사력을 다하여 헌원에 대항하였으나 현지에서 징병된 토착민 병사들이 잇달아 군영을 탈출하여 헌원에게 투항하므로 결국 늙고 기력이 다했음을 인정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신농이 중국의 주인 자리를 빼앗기면서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했다. 그동안 아들이 고전분투하며 쫓기는 모습을 관망하기만 하던 어머니 강씨는 더 이상 헌원의 팽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천도(天都) 황실(皇室)의 개입을 요청하고 나섰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의 신농의 소식을 전하는 옛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금문 사학자 낙빈기(駱賓基)가 금문(金文)의 수수께끼를 해득하면서 해답을 얻었는데, 그에 의하면 패전으로 의욕을 상실한 신농은 대파산 속에 은거하며 산사람(山人)이 되었다고 한다. 신선(神仙)이라는 말은 곧 신농이 산사람이 되었다는 말에서 유래된 용어라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들은 이때의 헌원에게 황제란 칭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 천자(天子) 혹은 황제(皇帝)란 칭호는 없었다. 진시황(秦始皇) 때 이르러 비로소 황제(皇帝)란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으므로 그를 시황제(始皇帝)라 하는 것이다.
후한(後漢)의 시어사 채옹(蔡邕, 132~192년)은 ‘조정의 제도와 호칭’을 연구한 『독단(獨斷)』에, “천자라는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천자라 한 것이다(天子之呼稱 始於東夷 父天母地)”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