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천해(天海, Baikal)로부터 비류호(沸流湖, Buir)에 이르는 대초원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던 기마유목민족인 신시 배달족은 북만주로부터 점점 남진하여 어느새 광활한 만주대륙을 평정하고, 밝해만을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홍산문명의 터를 잡으며 정착했다.
그러나 몸에 밴 기마민족의 습성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원의 비옥한 땅을 찾아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 중원의 땅주인 수인씨(燧人氏)가 조공을 게을리하므로 반란으로 간주하고 복희(伏羲)씨를 총수로 임명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난을 평정한 복희씨는 점령지에 정착하여 통치권을 승인받고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 뒤이어 소전(少典) 장군 등이 중원으로 진출하더니 각각 점령지에 정착한 후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복희씨와 소전 장군 등이 세운 나라와 본국 조정과의 사이에 발생하는 잦은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공상(空桑) 국경협약(國境協約)을 맺게 되었다. 이후 얼마간은 상호간에 서로 협약을 준수하며 원활한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이번에는 제후들 간에 서로 이해관계를 다투며, 동족의 정리마저 버리고 피를 뿌리며 싸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예기치 않은 제후들 간의 다툼은,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치우천황의 입장을 불편하게 하였다. 더욱이 사위인 헌원(軒轅)이 장인(丈人)인 적제(赤帝) 신농(神農)의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고, 치우가(蚩尤家)의 할머니가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천황은 헌원의 행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숙고하게 되었다.
적제 신농이나 헌원이 모두 배달한국의 제후(諸侯)이고 같은 동족들이라는 것이 치우천황의 판단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적제(赤帝) 신농(神農)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보낸 사자(使者)의 보고를 접한 천도(天都)의 천황궁(天皇宮)엔 즉각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신하들은 아연 긴장하며 사태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이번 사건은 종전에 자주 일어났던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헌원이 오랜 시간 치밀하게 계획한 후 일으킨 도전적인 반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헌원의 도전은 나라와 천황에 대한 반란이므로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과 단순한 제후들 간의 다툼일 수도 있으므로 출병 결정에 앞서 헌원의 해명을 들어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등장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신하들의 서로 다른 주장에 곤경에 빠진 이는 바로 치우천황이었다. 그것은 나라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화백회의(和白會議)1)의 승인을 얻은 후에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배달한국의 전통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뜻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대사(大事)에 있어 신하와 천황의 뜻이 어긋난 적은 없었다. 또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현명한 신하들은 토론을 통해 의견을 통일해 왔고, 그 결과가 천황의 뜻에 반한적도 없었던 것이다.
천황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토론만 거듭하는 신하들로 인해 곤경에 빠졌으나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신시 배달한국의 절대적 통치철학이자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의 확고한 출병 의지를 알면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각 부(部)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의 풍백부(風伯部)를 보면, 그들의 고유 임무가 백성들이 삶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현대의 보건사회부와 건설교통부 그리고 환경부 등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풍백부는 처음부터 국내 문제에 열중하여 해외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으므로 천황의 의견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우사부(雨師部)를 보면, 우사부 장관 태호 복희가 서정(西征)을 성공시켜 일으킨 나라를 이어받고 우가(牛加) 벼슬에 이어 적제(赤帝)에까지 오른 신농을 축출한 헌원을 응징하려는 천황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