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천황은 각 지역의 사령관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완벽한 듯했던 천황군의 전쟁계획은 처음부터 중대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황군의 출정을 반대했던 운사부(雲師部)가 기병을 거느리고 헌원군에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운사부가 천황의 칙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담한 배반행위를 감행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충격을 받은 천황은, 그러나 일찍이 서남방으로 깊숙이 진출시켜 놓았던 묘족(苗族)을 차출하여 운사부의 공백을 메우기로 하고 묘군(苗軍)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천황군은 우사(雨師)와 풍백(風伯)을 좌우 대장군으로 전군을 편성하여 출정하였는데, 이때의 모습을 중국측 기록에는 ‘누에벌레와 새의 머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의 군사를 동물로 표현하는 식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식의 황당한 표현은 당시의 전사(戰士)들이 투구를 만들 때 용맹성을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무서운 맹수나 도깨비 형상 같은 장식을 부착했는데, 이것을 치우군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식한 중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천군을 모조리 맹수나 도깨비의 모습으로 기록한 데서 비롯 된 것이기도 하다.
대장군(大將軍) 풍백(風伯)도 역시 투구 위에 참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장식을 달고 있었는데, 새는 제국 행정부의 상징물이었다. 천군(天軍)의 총사령관인 치우천황 역시 황금빛 투구 위에 황소뿔 장식을 달았다. 이를 보고 중국인들은 천황의 머리는 ‘소머리(牛頭)’라 하여 수령(首領)을 ‘우두머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천황군의 많은 병사들이 천황을 흉내내어 투구에 소뿔을 달았고, 이것을 실전의 단병전(短兵戰)에서 두촉(頭觸 : 머리 박치기)의 전투기술로 응용하여 중국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술이기(述異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치우의 귀옆 수염(구레나룻)은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머리에는 뿔이 있어 헌원의 군사와 싸울 때 뿔로 사람을 받으니, 헌원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秦漢間說 蚩尤耳髮如劍戟頭有角與軒轅鬪以角?人人不能向).”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치우는 천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우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박치기 기술이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태평어람』(권79)은 “치우의 형제 81명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하였고 모래와 돌을 먹으며 칼, 창, 큰활 등의 병장기를 만들어 천하를 제압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술이기』는 치우의 형제를 72명이라고 하고, 『태평어람』에서는 81명 이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의 형제가 81명인지 72명인지에 관해서는 다른 여러 사서들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술이기(述異記)』는 치우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치우는 구리머리에 쇠이마, 4개의 눈과 6개의 손 그리고 어깨에는 외날 칼, 몸통은 갑옷, 양손에는 모와 극을 지니고 있으며 쇠와 돌을 먹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이 치우를 왜 이길 수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치우는 그들에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치명적인 살상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 C 3500년부터이다. 구리 제품은 벌써 B. C 7~6000년경에 나타났는 데 비해 본격적인 살상무기의 제조는 구리에 비소, 주석, 아연을 합금하는 청동 야금술이 개발되면서부터이고 이 기술의 선두주자가 바로 치우천황으로 보인다. 중국의 각종 사서들이 이구동성으로 치우천황의 철제무기 생산을 경이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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