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3장 치우천황의 등극(登極)-치우천황③

자연정화 2012. 8. 13. 17:22

출처 : 다물넷


제3장 치우천황의 등극(登極)-치우천황③


헌원의 반란사건

잠시 치우천황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다시 원래의 이야기인 헌원의 반란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야기한 대로 치우가(蚩尤家)의 노파(老婆) 강씨(姜氏)의 전갈을 받은 천도의 어전회의가 각 중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며 결론을 짓지 못하자, 천황은 수십명의 첩자를 은밀히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오게 하였다.

비록 어전회의가 일부 중신들의 반론제기로 결론을 유보한 채 중단되었으나 치우천황의 심중에는 이미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제국(帝國) 전통의 화백회의 제도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중신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울러 앞으로 닥칠 만약의 사태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첩자를 보내서 헌원군의 병력 상황과 군진의 형태 등 세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한 것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

『밀기(密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를, “중국대륙

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록(?鹿)의 북쪽에 대효(大曉)가, 동쪽에는 창힐(倉詰)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그 세력이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황제 헌원은 먼저 대효와 동맹을 맺고 창힐을 치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창힐과 동맹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 두 무리들이 모두 치우천황의 제후국(諸侯國)들이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밀기』의 기록은 배달한국의 지배하에 있던 제후국 간의 세력 균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첩자들의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치우천황은 이미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배달 국의 천도(天都) 신시 아사달을 떠나 동경[現 遼陽, 펴라]1)으로 내려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추가 정보를 받고 곧 색도(索度=白河)로부터 출동하여 회대지간(淮垈之間)에서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탁록 중화삼조문화 연구회’ 부회장 조육대(趙育大)가 지금까지 발견한 치우와 황제의 충돌을 기록한 중국측 서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산해경(山海經)』-「대황남경(大荒南經)」, 「대황북경(大荒
『산해경(山海經)』- 北經)」, 「대황동경(大荒東經)」
『서경(書經)』- 「주서(周書)」, 「여형(呂刑)」, 「주절(周節)」
『대대례(大戴禮)』- 「용병(用兵)」
『여씨춘추(呂氏春秋)』-탕병(蕩兵)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관자(管子)-지수(地數)
열자(列子)-황제편(黃帝篇), 귀장(歸藏)
척자(尺子)-권하(卷下)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
손자(孫子)-『병법(兵法)』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봉선서(封禪書)」·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한고조본기(漢高祖本紀)」, 『사기(史記)』-「결화(結和)」, 「수경주(水經注)」
『십삼주지(十三州志)』-치우견비총(蚩尤肩붤塚)
황람(黃覽)-『총수기(塚水記)』
『세본(世本)』- 작편(作篇)
『로사(路史)』-후기사(后記四), 『태평어람(太平御覽)』,
『로사(路史)』『초씨역림(焦氏易林)』
『술이기(述異記)』-권상(卷上), 『보안주지(保安州志)』

그리고 앞서 언급한 1973년에 중국 호남성에서 발굴한 마왕퇴(馬王堆) 3호분의 B. C 2144년 기록의 『황제사경(黃帝四經)』 진본(眞本)을 통해 치우천황과 황제의 충돌이 역사적 사실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진본 『황제사경』의 「십대경(十代經)」에 치우(蚩尤)를 ‘지우(之尤)’라고 쓰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치우’가 우리말의 ‘황상(皇上)’을 뜻하는 것이므로 한문자의 표기에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글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에 있어서 ‘치우(蚩尤)’가 ‘어리석고 벌레 같다’는 뜻인데 반하여 ‘지우(之尤)’는 그저 ‘특별하다’는 뜻이어서 적어도 본래의 발음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고, 의도적으로 나쁜 감정을 표시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치우’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B.C 2144년 중국 호남성의 마왕퇴(馬王堆)의 3호분에서 발굴한 『황제사경(黃帝四經)』의 진본(眞本)이다. 그동안 전설로만 존재하던 『황제사경』이 실제로 나타남으로써 황제와 싸웠던 치우의 실존(實存) 사실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1) 펴라
‘펴라’는 평평한 땅이라는 우리말 고어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서 평양(平壤)이라 했는데, 한자의 뜻 역시 평평한 땅이 된다. 우리 역사에서 펴라는 단순히 평평한 땅이 아니라,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수도의 이전에 따라 펴라도 여러 곳에 존재해 왔다.


1980년 중국의 장사에서 출토된 2000년 전의 고화(古畵), 비단(帛) 위에 그려진 ‘인물용봉도(人物龍鳳圖)’다. 동이(東夷)의 상징인 봉과 용의 싸움을 그렸는데 봉(鳳)의 기세에 눌린 용(龍)이 기일족(夔一足)으로 변해버린 모습이다. 2천년 전만 해도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동이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중국측의 문헌들로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한 한국측의 문헌들에서 증명하는 내용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증거는 충분한 것이다.
천황이 정황을 살피던 중 제국의 서남지역 제후 사이의 작은 충돌로 시작한 혼란상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천황의 직영지인 청구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배달한국은 국가 기구를 전쟁체제로 바꾸고 무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匠人)들을 모두 갈로산으로 집결시켰다.
천황의 긴급 칙령에 따라 아홉개의 대장간을 만들어 장인들을 분치하고 주철(鑄鐵)을 캐서 새롭게 개량된 병장기(兵仗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기동에 편리한 보급품을 마련하는 등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갈로산(葛盧山)의 철(鐵)


당시 서인(西人 : 中國人)들이 원시적인 병장기로 무장한데 비해 치우천황은 벌써 동(銅)과 철(鐵)을 캐어 투구와 갑옷 그리고 기마에 적당한 단궁이나 창, 칼들을 만들었다. 철(쇠)이 동이족에 의하여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은 앞서서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개량된 병장기로 무장한 천황의 모습을 본 중국인들은 하나같이 치우천황의 모습을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두(銅頭)’는 ‘구리쇠 머리’라는 뜻이고, ‘철액(鐵額)’은 ‘쇠로 된 이마’라는 뜻이므로 글자 그대로 쇠로 튼튼하게 만든 투구를 쓴 것이다. 마치 요즈음에 등장한 로봇(robot)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아직 철(鐵)의 사용 수준이 원시적이었던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의 철제투구에 철갑옷을 입은 모습을 ‘동두철액’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병장기(兵仗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槍> : 외가닥창, 쌍지창(쌍창날), 미늘창(장식없는 창),
창<槍> : 구렴창(대기병용 갈고리창), 삼지창(창날이 3개),
창<槍> : 사모창(구불구불한 창날), 토막창.
극<戟> : 쌍날. 봉<棒> : 몽둥이.
칼<刀> : 외날칼 단도, 장도, 박도(어깨에 메는 칼), 언월도,
창<槍> :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검<劍> : 양날칼, 환도.
부<斧> : 도끼, 금잔부, 개산대부(開山大斧),
월<鉞>:쇠뭉치, 편<鞭> : 채찍.
간<즦> : 철퇴, 곤<槌> :소형철퇴.
삭<索> : 동아줄, 련 :쇠사슬, 올가미.
활<弓> : 활(檀弓), 화살, 쇠뇌(다연발 발사용)
방패<盾> : 철순(鐵盾:기병방어용), 목순(木盾:휴대 전투용)
창<槍> : : 철패(鐵牌:군단이나 장수의 이름을 새긴 것).
절곤<節棍> : 죽절곤(竹節棍), 철절곤(鐵節棍:철봉쇠고리)

갈로산의 신무기 생산이 완료되는 시점에 맞추어 서남방의 여러 전선에 긴급 투입된 첩자들로부터 적정(병력수, 무장상태, 방위상태, 보급상태, 사기와 심리적 동향)에 관한 세밀한 정보가 속속 도착하였다.

천황은 출정하기 전부터 벌써 적정의 모든 것을 마치 손금 보듯이 파악하고 있었으니, 승리에 필요한 모든 요건을 충분히 확보하게 된 것이다. 마치 신화처럼 전해지는 치우천황의 전승 기록이나 중국 정복이 단순한 용맹성이나 또는 우연의 결과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천황은 각 지역의 사령관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완벽한 듯했던 천황군의 전쟁계획은 처음부터 중대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황군의 출정을 반대했던 운사부(雲師部)가 기병을 거느리고 헌원군에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운사부가 천황의 칙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담한 배반행위를 감행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충격을 받은 천황은, 그러나 일찍이 서남방으로 깊숙이 진출시켜 놓았던 묘족(苗族)을 차출하여 운사부의 공백을 메우기로 하고 묘군(苗軍)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천황군은 우사(雨師)와 풍백(風伯)을 좌우 대장군으로 전군을 편성하여 출정하였는데, 이때의 모습을 중국측 기록에는 ‘누에벌레와 새의 머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의 군사를 동물로 표현하는 식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식의 황당한 표현은 당시의 전사(戰士)들이 투구를 만들 때 용맹성을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무서운 맹수나 도깨비 형상 같은 장식을 부착했는데, 이것을 치우군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식한 중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천군을 모조리 맹수나 도깨비의 모습으로 기록한 데서 비롯 된 것이기도 하다.

대장군(大將軍) 풍백(風伯)도 역시 투구 위에 참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장식을 달고 있었는데, 새는 제국 행정부의 상징물이었다. 천군(天軍)의 총사령관인 치우천황 역시 황금빛 투구 위에 황소뿔 장식을 달았다. 이를 보고 중국인들은 천황의 머리는 ‘소머리(牛頭)’라 하여 수령(首領)을 ‘우두머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천황군의 많은 병사들이 천황을 흉내내어 투구에 소뿔을 달았고, 이것을 실전의 단병전(短兵戰)에서 두촉(頭觸 : 머리 박치기)의 전투기술로 응용하여 중국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술이기(述異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치우의 귀옆 수염(구레나룻)은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머리에는 뿔이 있어 헌원의 군사와 싸울 때 뿔로 사람을 받으니, 헌원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秦漢間說 蚩尤耳髮如劍戟頭有角與軒轅鬪以角?人人不能向).”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치우는 천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우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박치기 기술이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태평어람』(권79)은 “치우의 형제 81명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하였고 모래와 돌을 먹으며 칼, 창, 큰활 등의 병장기를 만들어 천하를 제압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술이기』는 치우의 형제를 72명이라고 하고, 『태평어람』에서는 81명 이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의 형제가 81명인지 72명인지에 관해서는 다른 여러 사서들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술이기(述異記)』는 치우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치우는 구리머리에 쇠이마, 4개의 눈과 6개의 손 그리고 어깨에는 외날 칼, 몸통은 갑옷, 양손에는 모와 극을 지니고 있으며 쇠와 돌을 먹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이 치우를 왜 이길 수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치우는 그들에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치명적인 살상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 C 3500년부터이다. 구리 제품은 벌써 B. C 7~6000년경에 나타났는 데 비해 본격적인 살상무기의 제조는 구리에 비소, 주석, 아연을 합금하는 청동 야금술이 개발되면서부터이고 이 기술의 선두주자가 바로 치우천황으로 보인다. 중국의 각종 사서들이 이구동성으로 치우천황의 철제무기 생산을 경이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우사부(雨師部)는 신시 배달한국의 농업과 산업을 총괄하는 부서다. 백성들의 의식(衣食)문제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던 제국의 핵심 부서 중의 하나로, 그 수장(首長)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누에를 전투모에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술이기(述異記)』의 기록에 따라 그린 치우천황의 모습.
치우의 형상을 도철(??)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머리 위에 소뿔을 달고 사지에는 다섯가지 병기를 지니고 있다. (자료제공-치우학회)

실제로 우리 동이족이 이룩한 남만주 지역의 용산문화(龍山文化 : B. C 2500년)와 제가문화(齊家文化) 유적지에서 청동검이 출토되어 고고학적으로는 이미 인증을 받은 바 있다. 참고로 중국의 중원지방이 본격적으로 청동기에 진입한 것은 B. C 2080~1500년 사이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 때부터이다.

이로써 치우천황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적어도 4~500년 정도 앞서 있었음이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고증되었으며 천황의 철제무기의 생산기록 역시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송(宋)나라의 장군방(張君房)이 쓴 『운급(雲쳥)』의 「헌원기(軒轅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쓰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치우의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로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인 스스로 자신들의 무지와 열등감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사실이 뜻밖이긴 하지만 그의 용기있는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