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을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본 결론은 다르다. 우선, 당시의 천하는 신시 배달한국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주도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은 모두 치우천황의 제후국들로서 헌원의 동맹요청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들에겐 화하족의 반란을 토벌하려는 천황의 총동원령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어떠한 형태로든지 천황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 천황의 동원령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묘족군도 연합군의 한 축으로 참여하였다. 남쪽 변방의 묘족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 총독[蚩尤氏]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군사의 징병이 비교적 용이했는데, 묘족의 막강한 병력이 출동하여 남쪽으로부터 헌원의 동맹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남북을 잇는 연합작전이었다.
여기에서 현재에도 많은 수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묘족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묘족(苗族)은 치우가(蚩尤家)의 통치 지역으로 역대의 모든 총독(總督)은 천황의 칙령을 받은 치우가문(蚩尤家門)에서 나왔다. 『묘족간사(苗族簡史)』에는 “약 5000년 전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에 묘족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이들은 삼묘(三苗)족1)의 일부로서 후일 요(堯), 순(舜), 우(禹)를 거치면서 거듭 침략을 당하 고 그중 일부는 형만(荊蠻)으로 발전하여 초(楚)나라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산간으로 들어가 묘족(苗族), 요족(힀族), 여족(黎族)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모두 훈족[匈奴], 몽골족[北狄], 선비족(鮮卑族)으로 융화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