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천황의 호령에 숨도 한번 크게 쉴 수 없었던 헌원이었으나, 종주국의 운사부가 천황을 배반하고 그들의 기병들을 이끌고 헌원측에 합류하고, 토인 지역내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나니, 아무리 치우천황이 신장(神將)이라 하여도 한번쯤 자웅(雌雄)을 겨뤄볼만하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다.
헌원은 대군을 인솔하여 탁록지역을 선점한 후, 전투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계곡과 고지에 미리 군사를 배치하여 닥쳐올 천황군과의 결전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일선 정탐병들로부터 헌원의 움직임을 미리 감지하고 있던 치우천황은 항장 소호를 선봉장으로 삼고 헌원군의 선점지역을 피하여 탁록의 북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헌원군의 작전을 미리 알고 있던 항장 소호가 길잡이로 활약한 덕분이었다.
이리하여 고대 동양사를 흔들었던 가장 큰 전쟁 탁록대회전이 막을 열게 되었다.
* 그리스와 트로이간에 약 3000년 전에 있었던 10여년 간의 트로이 전쟁은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신화로 취급되었었다. 그러나 독일의 고고학자인 슐리만이 1870년 유적을 발굴해 냄으로서 역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탁록대첩(?鹿大捷)으로 대표되는 치우천황의 4700년 전 이 전쟁 역시 논란이 많았으나, 치우천황의 사당과 능이 2001년 발견됨으로써 역사로 증명되었다.
헌원은 공상성을 우회하여 탁록벌을 선점하고, 치우군이 진격해올 남방 통로의 요충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헌원의 작전을 이미 간파하기라도 한 듯 치우천황군은 정반대쪽인 북쪽 계곡을 지나 헌원군의 배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헌원은 황급히 군진을 역으로 돌려 후미에 있던 예비군을 선봉으로 삼고 지휘부를 이동시켜 천황군의 선봉과 마주섰다.
마침 헌원군의 후미에는 공상 성주 유망이 ‘성을 잃은 성주’로 낙인이 찍혀 끌려오듯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유망의 눈앞에 놀랍게도 자기의 신하였던 소호가 치우측의 선봉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자 치솟는 분노를 참치 못한 유망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한 무리의 병사들을 몰고 소호를 향해 달려나갔다. 이렇게 하여 양측은 대장군의 전투개시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즉흥적인 교전에 들어갔는데 항장 소호가 차마 자신의 주군(主君)이었던 유망을 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천황이 앞으로 달려나가 단칼에 유망의 목을 베어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때의 사건을 보고 옛 기록은 전하기를, “천황이 공상(空桑)을 함락시키고(攻城作戰), 도주하는 공상 성주(空桑城主) 유망(楡罔)을 판천(板泉 : 今上谷)에서 잡아 공상협약(空桑協約)을 어긴 죄를 물어 사형시켰다.”라고 썼다.
천황의 일격에 유망의 목이 떨어지자 간담이 서늘해진 헌원의 병사들을 공포에 떨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천황군측도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일순간 전열이 흐트러지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런 이상한 대치가 계속되는 동안 사령관 헌원이 그의 주력군을 몰고 남쪽 전선으로부터 일선에 도착하였다. 천황군이 물러섰던 것은 멀리서 진격해오는 헌원의 군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선에 모습을 나타낸 헌원은 잠시 진세를 살피더니 곧 천황군의 병력이 예상보다 적음을 발견했다. 따라서 헌원은 자신의 엄청난 병력을 보고 천황군이 물러섰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헌원은 즉시 총공격을 명령했다. 헌원의 대군이 전속력으로 진공하자 천황군은 말머리를 돌려 황급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헌원의 대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쫓고 쫓기는 싸움이 반나절을 넘기면서 전의를 상실한 듯 천황군은 탁록의 깊은 계곡으로 몸을 숨겼다. 승리를 예감한 헌원은 전군을 몰아 협곡 깊숙이 천황군을 뒤쫓아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