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는 청년이 되자 병부(兵部)의 장교로 입관하여 군사행정과 군작전 그리고 실전 경험을 익히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처녀 견비(肩붤)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바로 이즈음으로 보인다. 견비는 후일 천황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기면서 견비황후(肩붤皇后)가 되었고 사후에 능을 청구땅 태산에 모신 관계로 ‘태산신모(泰山神母)’로 추앙받게 된다. 대부분의 상고사의 기록자들이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업적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천황의 친족들에 대한 사실을 더 자세히 밝힐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청년 치우는 병부의 장교로서 아직 정복하지 않았거나 제국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변방의 토족들을 정벌하는 전쟁에 스스로 참여하며 전쟁기술을 습득한다. 특히 흑수(黑水) 상하의 토족들은 독립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여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성격이 매우 거칠고 용맹하여 그동안 배우고 익힌 전통적인 전투방식이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자 유목민의 전통적인 이동용 ‘게르’대신에 반지하(半地下)에 나뭇잎으로 만든 지붕을 얹은 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하여 사냥에만 의존하지 않고 움집 속에서 곡식을 재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른 변방족들이 치우의 토벌군을 보기만 하여도 빠르게 도망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집과 식량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후대의 역사학자들은‘묘족(苗族)’이라 하였다.
토족 묘민들의 전투방식은 기동력을 중시하는 유목 기마민족의 빠른 전투방식과는 달리 유리한 지형에 장애물을 만들어 의지하고 침략군이 지칠 때까지 농성하며 저항하는 전법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수비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늑대나 호랑이 등의 맹수를 교묘하게 훈련시켜 치우군의 의표를 찌르는 역습을 감행하는 등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발한 전술들을 동원하며 치우군을 괴롭혔다. 정면승부를 피하고 수성(守城)에 전념하는 적을 소탕하려면 적어도 적의 서너 배에 달하는 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항상 속전속결을 전쟁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치우천황에겐 그만한 병력을 급히 동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각한 곤경에 처한 치우는 마침내 지금까지의 불 같은 공격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수원(水源)을 점령하고 모든 통로를 봉쇄한 후 고도의 심리전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회유(懷柔)하는 작전을 펼쳤다.
여기에서 현재 중국의 중남부에 살고 있는 묘족(苗族)이 왜 흑수(黑水, 黑龍江)의 상하에 나타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산해경(대황북경)』의 기록 원문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산해경의 대황북경에 이르기를 흑수의 북쪽사람들은 묘민이다(山海經大荒北經 黑水之北有人苗民也).”
『산해경』은 또 이곳이 ‘숙신고지(肅愼故地)’라 하여 쥬신[朝鮮, 肅愼]1)의 옛 땅이라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묘족들이 처음에는 북만주의 흑수 부근에 먼저 정착하고 움집 짓는 법과 농사법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생활방식을 모색하던 중 치우가 이끄는 중앙의 토벌군을 맞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민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이유를 깨달은 젊은 치우는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묘족을 승복, 소개(疏槪)시킬 수 있는 묘안을 가지고 적의 수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어차피 묘족들이 말에서 내려 기마족의 습속을 버리고 새로운 영농 중심의 생활방식을 선택하였다면, 묘족이 먼저 항복의 예를 갖추어 천황의 백성 자격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천도(天都, 神市)의 사와라(斯瓦羅) 한웅[桓雄]님의 허락을 얻어 묘족들에게 따뜻한 청구(靑丘)의 남쪽지방으로 옮겨 살도록 해줄 수 있다. 청구의 남쪽에서 장강까지의 사이에는 비옥한 옥토가 천리에 펼쳐 있으니 그곳에 농사짓기에 적합한 넓은 땅을 확보해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묘족의 자치정부를 승인하고 제후로 임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치우군에게 철통같이 포위되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 묘족들에겐 젊은 장교 치우의 이런 자비로운 제안이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청구의 남방으로 집단이주를 하게 된 묘족들은 이후 지금까지도 이 곳을 기반으로 하여 살면서 치우천황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그들의 시조(始祖)로 섬기고 있다.
묘족(苗族) 토벌전쟁(討伐戰爭)은 젊은 치우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자칫 잘못했더라면 엄청난 피를 부를 뻔했던 전쟁에서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희생 없이 승리를 얻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무한의 새로운 수단이 가능했으며 그것이 비록 정면승부가 아니더라도 적의 보급로 차단이나 고도의 심리전 등으로 적을 불안정 상태로 빠트리는 것 같은 방법이 때로는 전장에서 창검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 이상의 효율적인 전술이 될 수 있음도 터득했다. 젊은 치우는 ‘몸을 숨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웃다가 적이 훈련시켜 풀어놓은 승냥이와 범의 습격을 받고 수차례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졌던 것을 잊지 않았다. 맹수도 잘만 이용하면 아군의 전력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젊은 치우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장차 동양 최고의 군신(軍神)이 될 기본 소양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갔다.
이후 치우 군단(軍團)은 5종(五種)의 군(軍)으로 재편되었고, 별군(別軍)으로 호군(虎軍)과 견군(犬軍)이 조직되어 별도로 훈련되었다. 치우천황의 별군을 이용한 이 작전은 훗날 서정(西征) 때 헌원(軒轅)으로 하여금 치우를 반인반수(半人半獸)로 인식하게 할 만큼 화하족(華夏族)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이무렵 치우는 적어도 십여 차례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쟁을 수행하며 전쟁의 각종 개념을 터득하게 된다. 치우의 군단은 갑옷에 투구를 착용했고, 기마군단(騎馬軍團)엔 작고 강력한 단궁(檀弓)을 말안장에 장착했다. 5종의 군단은 엄격하게 조련(調練)되었고 살상력이 높은 신무기(新武器)로 무장하여 정병(精兵)군단으로 거듭 태어나니 그 위세가 천하를 떨게 하였다. 이제 치우군단에 도전한다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이미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동안 숨죽이며 치우의 동태만 살피던 변방의 종족들은 스스로 찾아와 제국의 충성스러운 제후로 살아남기를 맹세하였다. 연로한 사와라 한웅님이 재위 67년 만에 붕어(崩御)하시고, 곧이어 열린 3사(三師) 오가(五加)의 중신(重臣)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치우를 배달한국(倍達桓國) 제14세 한웅(桓雄)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천도(天都, 神市)의 주인이 되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치우천황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능득개천(能得開天) : 하늘의 뜻을 능히 받들고, 지생개토(地生開土) : 땅을 열어 그 뜻을 따르며, 이생개인(理生開人) :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다스림을 통치의 본(本)으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