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김씨는 흉노계 족보의 상징?
[김알지 설화 부분도]
한양대 김병모(金秉模) 교수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김씨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김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김씨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황남대총(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단우(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서봉총(瑞鳳塚)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관(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조생(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각배(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각배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전사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각배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석탈해(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김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김씨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김씨의 조상 김알지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탈해(脫解)이사금 조(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호공(瓠公)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다.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김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금이란 뜻이다. 김알지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석탈해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김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계(系)인 파사(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선주(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금산(金山) 부근에서 살던 금을 좋아하던 흉노계 김씨 집단이 금성(金城 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금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금은 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 부족이 세웠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김함보(金函普)(금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김함보는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김위현(金渭顯)·「요금사(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금의 황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청(淸)제국의 황족들은 성(性)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했다.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금」이다. 이들은 청이 망한 뒤 금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김씨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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