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김일제(金日)
1998년 중국의 언론은 감숙성(甘肅省)과 산서성(山西省)에 살고 있는 김씨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김일제(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비문(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김일제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한무제는 소년 김일제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한(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한무제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김일제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일제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한서(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한족(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김일제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광(郭光)과 김일제를 불렀다. 한서 열전(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조서(詔書)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김일제를 侯(투후), 상관걸을 안양후(安陽侯), 곽광을 박륙후(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후(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김일제는 새로 즉위한 임금 소제(昭帝)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소제의 즉위 1년 뒤 김일제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김일제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김일제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김일제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김일제의 후손이 김알지(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소제(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소제가 죽자 다음 황제로 창읍왕(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선제(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전권(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선제 6년에 죽었다.
당시 선제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비행(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선제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인 金日의 동생 아들 김안상(金安上)은 여전히 선제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김안상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선제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권신(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대가(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흉노인이므로 한족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인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김일제 후손의 운명은 왕망(王莽)과의 인연으로 급전(急轉)한다. 왕망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다. 왕망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전횡(專橫)을 하다가 서기 8년에 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김일제 가문(家門)은 득세한다.
왕망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후한(後漢)이 다시 선다. 왕망 일가는 물론 김일제 가문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김알지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왕망 시대의 오수전(五銖錢)을 들어서 왕망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진한(辰韓)의 진인(秦人)」은 바로 진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김일제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모화(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대당(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모화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한족이 싫어하는, 더구나 한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신라김씨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신라김씨의 출자(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신라김씨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재야(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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