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마천(司馬遷)과 흉노(匈奴)
서기 전 2세기 몽골고원을 통일한 최초의 유목제국은 흉노였다. 묵특單于(선우)라고 불린 영웅이 나타나 약 30만 명의 상시 동원 기마전사 집단을 조직했다. 당시 유방(劉邦)이 세운 漢의 인구는 약 5000만 명이었다. 30만 명의 잘 조직된 흉노 기마전사들은 유방의 군대를 백등산에서 포위하였다. 묵특(선우)는, 유방이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로비를 한 뒤에야 포위망을 뚫어 주어 유방(한고조, 漢高祖)이 달아나도록 했다. 그 뒤 漢은 흉노의 속국처럼 되어 매년 왕족 여인들과 금품을 바쳤다.
그 70년 뒤 漢무제가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이 바뀐다. 漢무제는 재위(在位) 54년을 흉노와 싸운 사람이다. 당시의 史官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는 흉노와 싸운 장군들의 전기가 등장하고 흉노에 대한 관찰기록이 실려 있다. 흉노에 대한 그 뒤의 기록은 사마천의 것을 베낀 것이 많다. 사마천 또한 흉노 때문에 화를 입은 인물이다.
대대로 황실의 태사공(太史公)(사관, 史官)으로 봉직했던 집안 출신인 사마천은 흉노를 치러 가서 항복해 버린 이릉(李陵)을 변호했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았다. 사마천은 사기의 후기(後記)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이렇게 썼다.
그(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는 옥에 갇히어 말했다.
『이것은 내 죄일까, 이것은 내 죄일까. 이제 내 몸은 병신이 되었으니 세상에 쓰이진
못하리라』
형(刑)을 받고 물러난 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공자는 진(陳)․채(蔡) 나라에서 고생함으로써 「춘추(春秋)」를 지었고, 초(楚)나라
굴원은 쫓겨나 귀양살이를 함으로써 「離騷(이소)」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국어(國語)」가 있고, 손자(孫子)가 다리의 무릎뼈를 잘림
으로써 「병법(兵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촉(蜀)으로 쫓겨감으로써 세상에
「여람(呂覽, 여씨춘추)」이 전해졌고,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힌 몸이 되어
「설이(說離)」, 「고분(孤墳)」을 남겼으며, 또 시(詩) 300편은 대개 현성(賢聖)이
분발하여 지은 것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마음이 답답하고 맺힌 바가 있어 그 도(道)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말하며 장차 올 일을 생각한다』
현실의 벽에 막혔을 때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거기서 힘을 얻어 그 벽을 돌파하고 미래를 열기 위해 쓴 사기의 기록정신. 그가 작심하고 쓴 동양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의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읽어보면 지금도 살아 있는 기록임을 실감한다.
야성적인 유목문화와 지성적인 漢문화가 충돌하는 현장감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사기에는 장건, 곽거병, 이광(李廣) 등 흉노와 漢의 충돌 전선에서 명멸해 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특히 많다. 그 이야기의 무대는 몽골 초원에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형이며, 야만과 문명, 충성과 배신, 야망과 좌절이 오가는 인간 드라마이다. 영화 장면처럼 시각적 상상이 가능하고 영웅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대한 서사시이다.
■ 유럽의 현재 지도를 만든 훈족의 침입
한무제와 흉노의 대결은 그 뒤에 오는 대초원의 대폭발과 동서양의 대격변을 준비해 간 시기였다. 漢무제의 공격을 받은 흉노는 약화되었다가 동서(東西) 흉노로 분열한다. 그 뒤 다시 남북으로 갈린다. 서기 1세기 漢과 손잡은 나(南)흉노와 동쪽의 유목민족 선비(鮮卑)에게 협공당한 북(北)흉노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지금의 중앙아시아로 물러갔다. 그 뒤 중국의 기록에서는 北흉노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다.
서기 2세기 지금의 카자흐스탄 북쪽에 머물던 北흉노는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흑해 북안(北岸)을 거쳐 4세기 말 러시아 초원 남쪽의 볼가江을 건너 게르만족인 東고트족을 쳤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민족이동의 뇌관을, 서양에서 훈족으로 불린 北흉노가 터뜨린 셈이다. 독일과 그 주변에 살던 게르만의 여러 부족은 훈족에게 쫓겨 로마 영내로 밀려 들어간다.
야만인으로 불리던 고트족, 반달족, 롬바르드족, 색슨족, 부르고뉴족, 프랑크족, 앵글로족 등이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아프리카 북안(北岸) 등지(等地), 당시의 로마문명권으로 쳐들어가 기존정권을 정복한 뒤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정권을 세운다. 이 정권이 모태가 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이 탄생한다. 로마 제국은 곧 붕괴되고 게르만족이 세운 국가들이 중세를 연다. 東아시아에서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정복자가 되어 고대국가를 만들고 있던 바로 그 시기였다.
4~6세기 기마민족이 한족을 밀어내고 東아시아의 패자가 된 것처럼, 게르만족이 유럽에서 로마인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이후 1600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유럽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그려놓은 국가지도 위에 있고 東아시아도 이 시기에 유목민족 출신들이 만들어놓은 고대국가의 틀 속에 있다.
흉노족의 후신인 훈족의 황제 아틸라가 이끄는 대군(大軍)은 451년 지금의 프랑스(당시에는 로마령(領)) 중심부로 쳐들어가 파리 남쪽 살롱에서 로마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퇴했다. 이것은 13세기 몽골 기마군단 보다도 더 서쪽으로 간 경우이다. 이 5세기에 흉노족의 일부는 한반도에 들어왔으니 이 기마민족의 활동공간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다.
고미술사를 전공하는 권영필(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논문에서 훈족이 된 北흉노가 서천(西遷)하기 시작한 서기 91년부터 200년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이 기간에 그 일파가 동진(東進)하여 경주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추론을 했다.
■ 세계 4대 제국 중 3國이 기마민족系
유럽의 게르만족과 東아시아의 몽골계 기마민족은 동서양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질서를 만들어낸 뒤 1500년간 2대 군사 세력으로 세계사를 주도했다. 이 두 민족이야말로 세계사의 주먹이었다. 보병전술을 중심으로 한 로마군단의 군사기술은 게르만족의 세상으로 이어져 영국과 독일의 군사문화로 발전했다.
기마전술의 몽골군단은 활을 주(主)무기로 삼고서 수많은 제국을 부수고 세우고 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흔들어놓더니 소총이 일반화되는 17세기 무렵부터 군사적 우위를 상실해 간다.
그럼에도 19세기 초 현재, 세계 4대 제국 중 3대 제국의 지배세력이 몽골-투르크 기마민족 계열이었다. 몽골계의 방계로 볼 수 있는 여진족의 청(淸), 오스만 터키 제국,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몽골계 기마군단이 인도를 정복하여 세운 무갈(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제국, 나머지 하나는 대영(大英)해양제국이었다.
한국의 군사문화 전통은 몽골 기마군단에 닿아 있다. 다만, 조선조가 한족 사대주의에 빠져 군대를 멸시하는 바람에 500여 년간 문약한 국가로 전락함으로써 몽골군단의 전통이 끊어졌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국군이 탄생함으로써 화랑대로 상징되는 장교단을 중심으로 하여 과거의 상무정신을 재건하고 있는 중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화랑도는 북방기마 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해 간 東아시아 최초의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화랑도는 흉노적인, 북방적인, 민족주체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종교의식을 이어간 조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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