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동호(東胡) 정벌
이로써 동호(東胡)는 더욱 교만해져서 마침내는 국경을 침범하려 했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1000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있었다. 동호는 이 황무지에 눈독을 들이고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의 경계지점인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이래저래 버린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내며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이냐?』
그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 낙후한 자는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묵특은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서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해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서쪽으로 월씨(月氏)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河南(오르도스)의 누번왕(樓煩王)·백양왕(白羊王) 등의 영지를 병합하는 한편 일찍이 진(秦)나라의 몽염(蒙恬)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당시 한군(漢軍)은 항우(項羽)와 서로 싸웠으므로 중원 천하는 전쟁에 지쳤다. 묵특이 손쉽게 흉노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흉노에게는 활에 능숙한 군사만 해도 30만 명에 이르렀다.
■ 법률·풍습·전법(戰法)
그들의 법률은 대개 이러했다. 평상시에 칼을 한 자 이상 뺀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경범죄를 범한 사람은 알형(軋刑)에 처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옥에 가둬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 이내이며 옥에 갇힌 사람은 전국을 통해 몇 명에 불과했다.
선우는 아침에 영(營)을 나와 막 떠오르는 해에게 절을 하고 저녁에는 또 달을 보고 절을 했다. 앉는 자리의 차례는 왼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쪽을 향해 앉았다. 술일(戌日)과 기일(己日)을 길일(吉日)이라 하여 소중하게 알았다.
죽은 사람을 보낼 때는 시체를 널과 바깥 널에 넣고, 그 속에 금은(金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거나 하는 일은 없고, 상복을 입지도 않았다. 임금이 죽으면 사랑받던 신하나 첩들 중에 따라 죽는 사람이 있는데, 많을 때에는 몇십 명에서 몇백 명에 달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달의 모양을 보고 결정했다. 달이 커져서 둥글어지면 공격을 하고 이지러지면 후퇴했다. 공격이나 싸움을 할 때에 적의 목을 베거나 적을 포로로 한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노획한 본인에게 주는데 사람을 생포했을 경우는 잡은 사람이 하인이나 하녀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마당에서는 누구나가 이득을 얻으려고 교묘히 적을 유인하여 한꺼번에 내리덮치곤 했다. 그래서 적을 보기만 하면 이득을 바라고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일단 싸움이 불리해져서 패색이 짙어지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또한 싸움에서 자기 편 전사자(戰死者)를 거두어 준 자에게는 전사자의 재산을 몽땅 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묵특이 죽자 그의 아들 계육이 뒤를 이어 스스로 노상선우(老上單于)라 칭했다. 그가 즉위하자, 효문제(孝文帝)는 곧 종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 선우의 閼氏(황후)로 만들었다. 그리고 환관으로 연(燕)나라 사람인 중항열(中行說)을 공주의 傅(부: 스승)로 했다. 說은 흉노에 가는 것을 꺼려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투덜거리며 떠났다.
『내가 가면 반드시 漢나라의 화가 될 것이다』
■ 흉노(匈奴)와 한족(漢族)의 비교
중항열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투항하더니 곧 그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 흉노는 漢나라의 비단·무명이나 음식 등을 애용하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했다.
『흉노의 인구는 漢나라 한 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漢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漢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漢나라 물자를 좋아하시면 漢나라가 자기 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채 흉노에게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漢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漢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또 漢나라의 음식을 얻으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건락(乾酪, 마른 젖)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 주십시오』
漢나라 사신으로서 『흉노의 풍습에서는 노인을 천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자, 중항열은 그 漢나라 사신에게 모질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 漢나라 풍속에도 누군가가 주둔군의 수비를 위해 군대로 떠날 때에는, 그 늙은 양친이 자기들의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 주고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군대에 나가는 사람에게 보내 주지 않는가?』
『그렇다』
『흉노는 다 잘 아다시피 싸움을 일로 안다. 늙고 약한 사람은 싸울 수 없다. 그러기에 자기들이 먹을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인다. 즉 이같이 분수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는 만큼, 아비와 자식이 오랫동안에 걸쳐 몸을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는 노인을 가볍게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흉노는 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 살며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계모를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이나 동생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해 버린다. 옷과 관과 묶는 띠 등 아름다운 예복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다』
『흉노의 풍습에서는 삶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을 옷으로 한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에 따라 이동을 한다. 그러므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일 없는 것을 즐긴다.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간단하고 쉬워서, 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과도 같다.
부자(父子) 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하는 것은 뒤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어지럽기는 하지만 종족만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외면상으로 아비나 형의 아내와 장가드는 일은 없지만, 친족 관계의 거리가 멀어지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혁명이 일어나 제왕(帝王)의 성(姓)이 바뀌는 것도 다 그런 예다.
그리고 예의를 말하더라도 충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원한으로 맺어지고, 집만 보더라도 너무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필요한 힘을 다 써버리고 만다.
대개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먹고 입는 것을 구하고 성을 쌓아 방비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시(戰時)에는 싸움을 익히지 않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슬프다. 흙집에서 사는 漢나라 사람이여!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잘 반성해 보고 필요치 않은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흉노의 자존심
중항열의 말은 유목기마민족과 농경민족 관계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유목민들이, 접경하고 있는 도시-농경문화의 물질적 풍요를 부러워하면 목축을 포기하고 도시-농경문화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목축에 기반을 둔 기마군단이 약화되어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망해 버린다. 중항열은 이 점을 선우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이 「우리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멋 있는 것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족(漢族)과 대결할 수 있다. 한족 출신인 중항열은 흉노의 인간적 장점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벗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약탈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아버지와 형제의 아내(生母는 제외)를 취하여 종족보존을 하며, 법과 규칙은 가볍고 편리하여 실행하기 쉽고 임금과 신하 관계도 간단하고 쉽다. 이렇게 사는 것이 중국인처럼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음모를 꾸미면서 가식적으로 사는 것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대강 그런 투이다.
흉노-몽골-투르크로 대표되는 북방기마민족이 거의 2000년간 도시-농경민족에 대해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야만적 삶의 방식에 대해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이라는 가치관이 농경 문화인들과 달랐고 그 다름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사회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기마전술의 기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 화랑세기와 흉노적 성(性)풍습
신라 내물왕 이후의 김씨(金氏) 왕들이 실은 흉노계통의 기마민족 출신이라면 그들의 풍습 중에서 흉노적인 성격들이 드러나야 한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좋은 자료가 화랑세기(花郞世紀)(위작설(僞作說)도 있다)이다.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1980년대에 부산에서 그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 진짜냐 가짜냐로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성풍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근친 결혼뿐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남매끼리의 결혼,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경우, 왕족 여성들의 화려한 남성 편력, 그리고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그 처를 동생이 인수한다는 사례도 있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용수(金龍樹)였다. 김용수는 동생보다 먼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인 용춘(龍春)에게 아내 천명공주와 아들 춘추를 맡겼다. 용춘은 형수와 형의 아들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용수는 그 전에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는데, 천명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 즉 용수는 동생에게 두 명의 아내를 잇따라 준 것이다. 위의 사례는 사기(史記) 등 중국의 사서(史書)가 전하고 있는 흉노의 풍습과 비슷하다.
삼국사기 내물왕조(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에서는 같은 성(姓)끼리 혼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 이모, 사촌 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
삼국유사에는 7세기 문무왕 시절 지방관리가 경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동침하도록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풍습도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 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평왕 때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양도(男)와 보량(女)이란 남매 사이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양도는 어른들이 남매 간의 결혼을 권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입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 양도를 감싸안으면서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道로써 하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영사, 이종욱의 「화랑세기로 본 신라 이야기」에서). 6세기 당시 흉노계 신라 귀족사회에도 중국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아들 양도는 『나는 오랑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나는 흉노의 아들이니 야만의 법속을 따르겠다』는 자아(自我)의 선언이다.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유교적․보편적 가치관에 대응한 신라적인 주체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라 사회가 흉노적인 특수성과 중국적인 보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위대성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종합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시킨 점이다. 신라 왕족이 대당(對唐) 결전을 선택하여 신라의 독자성을 확보한 정신적 배경에는 『중국은 중국 것이 있고 우리 신라에는 우리의 가치가 있다』는 자주성과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주성과 자존심의 근원에는 『우리는 漢을 속국으로 삼았던 흉노의 후손이다』는 정체성 의식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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