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초원(大草原)과 지중해(地中海)
이제 흉노와 신라의 관계는 세계사의 시야(視野) 속에서 바라볼 때 이렇게 정리된다.
흉노족이 신라의 지배층으로 등장하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東아시아와 유럽은 대동란의 시대였다. 그 대격변의 충격은 만주-몽골-중앙아시아-흑해 연안-러시아 대평원-헝가리 평원으로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대초원으로부터 나왔다. 지도를 놓고 보면 이 유라시아 대초원(大草原)은 길다란 타원형의 벨트처럼 되어 있다. 이 대초원을 지중해에 비교하면 배는 말이 된다. 서구 문명의 본류(本流)인 그리스-로마-西유럽 국가들이 지중해라는 일종의 호수를 통해서 문물과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간 것처럼 東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란과 인도, 러시아, 東유럽 국가들은 이 유라시아 대초원이란 일종의 지중해를 통해서 기마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
3~4세기 이 대초원의 세계에서 큰 변동이 생긴다. 몽골고원에는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목초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유목민들은 농경민족 정복에 나서든지 풀과 물을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 동서양의 도시 농경 문화권의 2대 축이던 로마와 중국이 분열하고 있었다. 유목기마민족은 대초원 연변의 농경국가들이 약체로 보이면 반드시 침략을 개시한다.
3세기 말 중국의 통일왕조 진(晉)(三國志 시대를 통일했던 漢族 왕조)이 황실의 분열로 허점을 보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흉노계 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하여 흉노 등 북방의 다섯 유목기마민족이 일제히 남침하여 진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에 16개 나라를 잇따라 세운다. 소위 5胡16國 시대이다. 이를 이은 남북조 시대까지 포함하면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는 서기 581년까지 약 300년간 東아시아에서는 유례없는 격동과 이동이 벌어진다.
이 시기는 혼란 속에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난 시대이기도 했다. 즉, 기마민족의 이동과 고대국가의 건설인 것이다.
한반도에선 이 시기에 북방기마민족이 주체가 되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옥저(沃沮), 예맥(濊貊) 등 부족국가들을 흡수 통합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섰다. 이 3國은 7세기 말에 통일신라로 통합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다.
북방기마민족의 일파는 한반도의 남부 지방을 도약대로 삼아 일본에 상륙한다. 말과 활로 무장한 기마민족은, 농경민족인 야요이 문화가 만들어낸 수십 개 부족국가를 점령해 가면서 나라(奈良) 지방으로 진격하여 5세기경에는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한다. 이들은 떠나온 한반도의 3국과 화전(和戰) 양면의 관계를 설정하여 오늘날 韓日관계의 한 정형(定型)을 만들었다.
북방 기마민족의 남진(南進)․동진(東進)으로 인해 만들어진 수(隋)(그를 이은 당(唐)),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의 고대국가는 지금의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의 모태이다. 오늘날 동북아의 모습은 3~6세기에 형성된 틀 위에 서 있다.
특히 北중국의 한족들은 이 300년간 몽골계 유목민족들과 혼혈되어 양자강 이남의 순 한족들과는 유전자가 많이 다른 민족으로 바뀌었다. 한족의 몽골화(또는 한족의 북방화), 몽골족의 한화(漢化)이다.
東아시아 대이동의 시대는 수(隋)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581~676년 사이에 끝이 난다.
■ 고대사(古代史)의 생동과 기동
그 뒤의 동북아 사람들은 굳어진 민족과 국가가 만들어낸 국경 안에 머물면서 생활한다. 그런 정주(定住) 생활에 너무 오래 익숙하다 보니 고대의 대이동 시대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있다.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인 고대, 국경이 없던 고대를 최근 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민족주의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니 있지도 않았던 민족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컨대 신라통일이 외세인 당(唐)을 불러들여 동족 국가인 백제, 고구려를 친 민족반역 행위라는 식의 관념과 환상이다. 일본인들은 너무나도 뻔한 북방기마민족의 한반도 통과․일본 상륙과 정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민족적 우월감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북한 정권은 신라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 정통론을 앞세운다. 이는 자신들이 민족반역자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허구의 민족 정통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중국은 중국으로 한민족 에너지가 팽창하는 것을, 사전에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현대의 굳어진 의식이 고대의 생동하는 역사를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동과 격동과 생동의 東아시아 고대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에 인질로 되어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의식을 해방시켜 주는, 그리하여 새로운 차원의 공존공영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가 흉노-고조선-신라-한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주류(主流) 세력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과학적인 답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정의(定義)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집단 정체성이란 결국 민족이 걸어온 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역사관의 기초가 된다. 정체성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관이 뒤집어지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다. 지금 신라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공작에 넘어간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부정으로 넘어가고 적화통일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선조 선비들은 한족의 정치이데올로기로 변한 주자학(朱子學)에 세뇌되어 자신들을 한족 정권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고 북방기마민족을 경멸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렀다. 한국인은 明나라의 한족보다는 여진족과 더 가깝다. 신라의 유민은 여진족을 지휘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성(姓)을 따서 金이라 이름 붙인 적도 있다. 이 金은 고려를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치지 않았다.
이 금(金)의 후신인 후금(後金)과 조선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후금(뒤에 청(淸))도 최소한의 체면만 세워 주면 조선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망해 가는 명(明)과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줄다리기 실리외교를 하면서 전쟁을 피해 갔다. 이 광해군(光海君)의 실리(實利)외교를, 부모국가인 명(明)에 대한 배신이라고 단정하고 쿠데타를 해서 집권한 인조 세력은 신흥강국 후금을 적으로 삼는 자살적 외교정책을 펴다가 병자호란(1636년)을 불러 임금이 언 땅에 머리를 박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잘못된 정체성과 역사관이 부른 국가적 대재난이었다.
그런 재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업적이며, 우리가 한국인으로 생존하고 있는 근거이며, 자유통일을 넘어서 선진국을 만들어갈 때 귀감이 될 만한 지혜와 용기의 보따리이고, 민족사의 황금기를 열고 최초의 일류국가를 만들어낸 계기이기도 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사의 치욕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엉터리들이 득세하고 있다.
민족사 최고의 영광을 최고의 수치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지식인 대접을 받는 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애국심도 공중윤리도 교양도 생기지 않는다. 최고를 최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동에 넘어가는 국민들은 집단 자살하라고 부추기면 따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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