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민족사 최고의 천하 名文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671년 신라 문무왕이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답신을 추천할 것이다. 이 글은 신라의 名문장가 강수(强首)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이 명문인 것은 민족사의 결정적 순간에 쓰인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삼국통일을 해낸 신라 지도부의 고민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쓰였다. 이 글이 명문인 또 다른 이유는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도모하여야 하는 문무왕의 고민이 고귀한 지혜와 품격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격문(檄文)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당(唐)과 정면대결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唐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 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전성기의 세계 최대 제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사활(死活)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디인가, 그 줄타기의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이 글은 삼국사기 문무왕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글을 이해하려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나·당(羅唐)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唐이 13만 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킬 때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마저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唐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의도를 신라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아는 나·당은 공동의 적(敵)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이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졌을 때는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을 신라도, 唐도 알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唐은 신라와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좌절시킨 다음에도 이 옛 백제 땅을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唐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唐의 명령하에 백제 땅을 다스리게 했다. 문무왕이 반발하자 唐은 압력을 넣어 문무왕과 부여융이 대등한 자격으로 상호 불가침 약속을 하도록 했다.
唐은 망한 백제 사람들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唐은 또 문무왕을 계림(鷄林)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왕을 唐의 한 지방행정관으로 격하시킨 꼴이었다. 문무왕이야 속으로 피눈물이 났겠지만 고구려 멸망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참아야 했다.
서기 668년 평양성에 신라군이 먼저 돌입함으로써 고구려가 망했다. 唐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부와 신라(=계림도독부)를 아래에 둔 총독부였다. 이 순간 한반도는 형식상 唐의 식민지로 변한 것이다. 김유신, 문무왕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도부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굴욕적인 평화가 아닌 정의로운 전쟁을 선택했다.
이때 만약 신라 지도부가 비겁한 평화를 선택했다면, 즉 唐의 지배체제를 받아들였다면 신라는 唐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해 한반도와 만주의 삼국을 唐에 넘겨준 어리석은 민족반역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어 중국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후대의 것이고, 만약 평화를 선택했다면 신라 지도부만은 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문무왕의 위대성은 이런 일시적 유혹과 안락을 거부하고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아니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 세계제국과의 결전(決戰)을 결단했다는 점에 있다. 문무왕이 그런 결단의 의지를 담아 쓴 것이 바로 「답설인귀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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