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수모를 참고 견딘 이유는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강수(强首)의 대필인 듯)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당(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당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뒤에 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다. 문무왕은 당이 개입하여, 망한 백제와 흥한 신라가 억지 회맹(會盟)하도록 한 상황을 실감 있게 설명한다.
서기 663년 왜(倭)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만 명의 해군을 함선에 실어 보낸다. 이 대함대는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인데 역사적인 白村江(지금의 금강)의 해전이 벌어진다. 문무왕의 편지는 이 상황을 묘사해 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府城)을 구원하러 올 때 신라의 병마 또한 함께 치기로 하여 주유성(周留城) 아래 당도하였소. 이때 왜국의 해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왜선 1000척이 백사(白沙)에 정박하고 백제의 정기병(精騎兵)은 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소. 신라의 날랜 기병이 한(漢)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陣)을 부수니 주류성은 용기를 잃고 드디어 항복하였소. 남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돌이켜 북(北)을 치자 임존성(任存城)하나만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기에 양군이 협력하여서 하나의 성을 쳤으나 굳게 지키어 항거하니 깨뜨리지 못하였소.
신라가 돌아가려는데 두대부(杜大夫)가 말하기를, 『칙지(勅旨)에 평정된 후에는 함께 맹세하라고 하였으니 임존성만이 비록 항복하지는 않았다 해도 함께 회맹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으니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백제는 간사하고 반복이 무상하니 지금 서로 회맹한다 해도 뒤에 후회할 것이다』고 하여 맹세를 정지할 것을 주청하였소.
인덕(麟德) 원년(664)에 (唐 고종이) 다시 엄한 칙지를 내려 맹세치 않을 것을 책망하므로 곧 熊領으로 사람을 보내어 단을 쌓아 서로 회맹하고 회맹한 곳(지금 공주시의 취이산(就利山))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삼았소. 회맹은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칙지를 어길 수 없었소>
당은 망해 버린 백제를 당의 직할로 하여 신라와 형제의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신라로서는 패자와 승자를 같이 취급하는 당의 정책에 이를 갈았지만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은 편지에서 신라군이 668년에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할 때도 선봉에 섰던 사실을 설인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 당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도 이겨야 했던 전쟁
<번한(蕃漢)의 모든 군사가 사수(蛇水)에 총집합하니 남건(南建 연개소문의 아들)은 군사를 내어 한번 싸움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소. 신라 병마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대부대를 부수니, 평양 성중(城中)은 사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졌소. 후에 영공(英國公 李勣)은 다시 신라의 날랜 기병 500명을 취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부수고 큰 공을 이루게 된 것이오>
문무왕은 신라의 공이 큼에도 당이 신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박대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신라가 갖고 있던 비열성을 당이 빼앗아 고구려(멸망한 뒤 당이 다스리고 있던)의 관할로 넘겨 준 것이라든지, 백제의 옛땅을 모두 웅진도독의 백제사람들에게 돌려 주라고 압력을 넣은 것, 그리고 이제 와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는 사실들을 들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박한다.
<이제 억울함을 열거하여 배반함이 없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오. 양국이 평정되지 않을 때까지는 신라가 심부름꾼으로 쓰이더니 이제 적(敵)이 사라지니 요리사의 제물이 되게 되었소. 백제는 상을 받고 신라는 죽음을 당하게 생겼소. 태양이 비록 빛을 주지 않을망정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생각하는 것이오. 청컨대 총관은 자세히 헤아려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말씀드리시오>
671년 백제땅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완전히 신라 영토로 삼은 문무왕은 겨울엔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100여 명의 장병들을 사로잡았다. 672년 당군은 4만 명의 병력으로 평양성에 와서 주둔하면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당군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한편 문무왕은 포로가 된 당의 장수들을 귀환시켜 주면서 사신을 보내어 당의 고종에게 사죄하였다. 겸하여 은, 구리, 바늘, 우황, 금, 포목을 바치기도 했다. 화전(和戰) 양면을 구사한 것이다. 신라는, 당의 체면이 결정적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애쓰면서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9년 동안 수상을 지냈던 로드 팔머스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영원한 동맹국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국익 만이 영원하다. 우리는 이 국가 이익을 쫓아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에는 『영원한 동맹국이 아니라 영원한 국익만 있을 뿐이다』는 이 금언(金言)을 실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신라는 5세기 고구려와 동맹하여 백제와 왜의 공세를 저지했다. 5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자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대항한 것이 신라였다. 6세기에 접어들어 국력에 자신을 가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고 7세기 당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정복한다.
백제는 남부 중국 정권 및 왜와 친하게 지냈고, 고구려는 중국 통일정권 수당(隋 唐)과 싸우기만 했다. 신라는 중국 통일정권인 당의 힘을 이용했다. 당은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를 먹으려고 했으나 신라에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小國이 大國을 이용하려고 하다간 먹히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데 신라는 이 법칙조차 무너뜨리는 예외적인 외교를 한 것이다.
어떤 나라와 친하든 싸우든 국가이익을 중심에 두고 그런 관계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신라가 당에 파견한 사신들은 1급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왕이 된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다. 시중, 병부령 등 고위직에 올랐던 이들도 대부분 그들이었다. 김춘추는 두 아들 김법민(金法敏)과 김인문(金仁問)을 대당(對唐) 사신으로 썼다. 그는 김인문을 당의 궁정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김유신의 동생 흠순(欽純)과 아들 삼광(三光)도 대당 사신으로 투입되었다.
신라는 대당결전을 할 때 당의 심장부에 박아둔 이들 인질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김인문 등은 당의 궁정에 있으면서도 당에 이용되지 않고 항상 조국을 위한 정보수집과 공작을 진행했다. 신라가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상대로 일면 전쟁 일면 화해를 진행하면서 한반도를 확보해 갈 수 있었던 데는 당대 일류 인물들이 당의 중심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라의 국가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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