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15] 문무왕의 자존심

자연정화 2013. 8. 10. 09:40

[15] 문무왕의 자존심
 

 

 


서기 668년부터 2년간 신라 문무왕은 대당(對唐) 결전을 준비해 간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遺民)들이 唐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을 지원했다. 고구려의 검모잠(劍牟岑)이 유민들을 데리고 투항하자 익산 지방에 살게 했다. 그 뒤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해 그가 이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唐이 백제왕족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한 그 수법을 거꾸로 쓴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백제 독립운동을 꺾으려 한 것이다. 문무왕은 또 대일(對日)공작을 개시한다.
 
唐은 한반도를 안동도호부의 지배하에 둔 다음 일본에도 2000명의 병력을 보내 주둔시키면서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문무왕은 일본의 신라계 도래인들을 움직여 임신(壬申)의 난(亂) 때 일본의 천무천황(天武天皇) 세력을 지원, 친신라정권이 들어서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唐의 對日공작을 좌절시킨다. 천무천황 이후 약 30년간 일본은 唐과의 교류를 거의 끊고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 갔다.
 
701년 천무가 반포한 대보율령(大寶律令)은 일본 고대 국가의 완성을 의미하는 「고대의 명치유신」인데 신라를 모델로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를 안정시켜 그 뒤 200여 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670년 드디어 문무왕은 행동을 개시했다. 唐의 괴뢰국 행세를 하던 옛 백제지역 웅진도독부로 쳐들어가서 성(城)과 땅을 차지하였다. 비로소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된 것이다. 671년 여름 신라군은 백제군을 도우려던 당군(唐軍)과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장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한 달 뒤 唐의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서해를 건너와서 신라 승려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천명을 어기고, 천시(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둔전(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인귀(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설인귀는 과부와 어린이까지 동원되는 거국일치(擧國一致)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과 정면대결하는 신라의 처절한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편지에 대한 긴 답서(答書)의 서두에서 문무왕은 약속을 어긴 것은 唐임을 지적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선(善)의 편이고 唐이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다는 것을 확실히 한 때문에 이 답신의 권위가 처음부터 잡힌다.
 
  <唐 태종은 先王(태종무열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를 모두 너희 신라에 주어 길이 안일케 하고자 한다」고>
 
문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을 토벌할 때 신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先王(무열왕)이 늙고 약해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힘써 국경에까지 나아가 나를 보내어 唐의 대군을 응접하게 하였던 것이오. 唐의 수군이 겨우 강어귀에 들어올 때 육군은 이미 대적을 깨뜨리고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 뒤 漢兵(唐兵을 의미함) 1만 명과 신라병 7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군수품을 탈취하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포위를 뚫고 사면의 적성(敵城)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드디어 1만 명의 漢兵으로 하여금 호구(虎口)의 위난을 면케 하였고, 머물러 지키는 굶주린 군사로서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는 일이 없게 하였던 것이오.

  웅진의 漢兵 1000명이 적을 치다가 패배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웅진으로부터 군사를 보내달라는 청이 밤낮을 계속하였소. 신라에서는 괴질이 유행하여서 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어도 쓰라린 청을 거역하기 어려워 드디어 많은 군사를 일으켜서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적은 아군의 병마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와 쳤으므로 병마만 크게 상하고 이득없이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이 일시에 배반하여 복신에게로 가고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포위하였소. 이로 인하여 곧 웅진의 길이 끊기어 소금․된장이 다 떨어졌으니 곧 건아를 모집하여 길을 엿보아 소금을 보내어 그 곤경을 구하였소>
 
  「당신네의 혈육은 우리 것이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칙지(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부성의 위급함을 알리니, 유덕민(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정병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노상에서 눈을 만나 인마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부성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전후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남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우마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도호 유인원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의식하였으니, 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피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혈육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군관민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