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13] 흉노와 신라통일

자연정화 2013. 8. 10. 09:35

[13] 흉노와 신라통일
  

■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통합이 신라통일의 에너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흉노계 金氏 왕족의 줏대·안목·전략·용기인데, 이런 덕목은 『우리는 흉노 오랑캐이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출자(出自)를 드러낼 수 있는 정직함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는 중국의 한족(漢族) 문화를 삼국 중에서 맨 나중에 받아들였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백제, 고구려에선 저항이 없었지만 신라에선 이차돈이 순교할 정도로 저항이 있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불교보다 뭐가 못하단 말인가.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주체성과 개방 필요성 사이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이런 갈등은 외래 문물의 여과과정 역할을 함으로써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선진문물을 흡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신라 김씨들은 흉노적인 것, 북방적인 것을 主로 놓고 중국적인 것을 부(副)로 하는 문화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7세기 신라 김씨 왕족들이 당(唐)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중국적인 것이 주(主)가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7세기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비교하여 깊이 있고 다양한 문화의 축적을 이룬 상태였다. 당시 신라인의 구성은 농경을 가지고 온 남방계, 기마전술을 갖고 들어온 북방계, 피난 온 한족의 혼합이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는 북방계, 서방계, 남방계, 중국계의 혼합이었을 것이다. 다양하고 풍성한 문화적 인종적 종합이 이뤄진 신라였으므로 국력을 동원할 때도 입체적 안목과 다양한 수단의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북방계의 용맹성, 남방계의 성실함, 중국계의 지성(知性), 서방의 그 어떤 요소들을 두루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라는 북방계가 가져온 기마전술에서뿐 아니라 해군 또한 강했다. 신라의 조선기술은 당시 東아시아의 최고 수준이었다. 왜(倭)의 3만 군사와 400척의 대함대를 백촌강에서 전멸시킨 당(唐)의 해군을 신라 해군이 기벌포에서 격멸함으로써 대당(對唐)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문무왕 때 선부(船府), 즉 해양수산부를 창설했고, 일본인들은 당을 오고갈 때 신라의 선박을 이용했으며 장보고는 9세기 한국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해군력은 남방계의 소질이었을지 모른다. 화랑도는 흉노적․북방적인 샤머니즘(선도(仙道) 또는 신도(神道))을 바탕으로 하되 불교와 유교적인 요소를 더한 종합적인 교양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엘리트는 사물을 넓게 깊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화랑도(花郞道)의 대표인 풍월주(風月主) 출신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보여준 통일 외교와 전략은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콤비가 보여준 독일통일 전략의 깊이와 넓이를 오히려 무색케 한다.
 
김춘추는 비행기도 없던 시절에 서해와 현해탄을 건너 당과 일본을 오가고, 적진인 고구려로 단신 돌입하여 목숨을 건 담판을 벌이는가 하면, 김유신은 병권(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시면서도 쿠데타를 꾀하지도, 왕의 경계심을 부르지도 않는다.
 
신라가 나당(羅唐)연합을 이뤄 내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지켜 내다가 당이 신라마저 삼키려 했을 때 세계 최강의 전성기 제국을 상대로 결전을 감행하는 모습은, 세계사 어디를 뒤져보아도 좀처럼 찾아내기 어려운 감동적 장면이다.
 
신라의 이런 행태 속에서 작동한 가장 중요한 민족적 유전자는 흉노적 용기와 당당함과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신라가 최종 승자가 된 것은 가장 서방적이고, 非중국적이며, 토속적인 세력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런 강력한 정체성은, 중국이란 거대한 광원(光源)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한민족이 독자성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한 정신적 저수지였다.
 
 
■ 말(馬)과 배(船)를 잘 부린 신라인들
 
삼국통일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한 개방성과 주체성에서 나왔다.
 
역사학자 이도학(李道學)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가 쓴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에서 필자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이렇게 분석했다.
 
  1. 고대국가의 국력 척도인 양질의 철광(鐵鑛)을 확보했다.
  2. 국가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던지는 무사도 정신.
  3. 신라 국왕의 정교(政敎)일치적 권위로 해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4. 지배세력의 거듭된 교체와 다양한 세력의 포용으로 활력을 더해갔다.
  5. 왜(倭), 백제,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오면서 내부 단합이 강화되었고 항상 사회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李교수의 분석 중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고립되어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체제를 유지하여 다양한 세력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생동력과 참신한 기풍을 유지하였다는 지적이다.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 기록에 의한 것만으로도 중국 진(秦)의 유민, 고조선의 유민, 낙랑군의 유민이 신라지역으로 몰려왔는데 서로 배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고 여섯 촌(村)을 이루며 더불어 산다.
 
이도학 교수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민족의 수혈에 의해 참신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흡수한 이방인이나 피정복민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라는 백제, 고구려, 조선에 비해서도 내부질서가 민주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포용이 가능하다. 신라의 힘은 북진 해양세력과 남진 북방세력의 교차지로서의 용광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통합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해륙(海陸)의 문물을 다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국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라의 해군력을 알아야 한다. 512년 지증왕 때 이미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다. 울산항에 인도에서 보낸 쇠를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관등 중 파진찬(波珍)이란 직책은 「바다 칸」, 즉 「해간(海干)」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東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왜(倭)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倭로 갔고 649년에는 倭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倭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그때 倭는 백제와 더 친했는데도 당을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583년 진평왕 때는 병부(兵部)에 선부서(船府署)를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고, 678년 문무왕 때는 병부, 즉 국방부와 동급인 선부령(船府令) 한 명을 두었다. 해양부가 국방부와 동급으로 독립한 나라는 東아시아에서 신라가 유일했다.
 
신라 해군이 고대일본 시절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북방 기마민족 출신인 신라김씨 왕족은 말을 통해서 북방초원 루트를 경유한 로마와의 문화 교류를 유지하였고, 배를 통해서는 倭와 唐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을 유지했다. 말과 배는 고대 사회에서 양대 기동수단이었다.
 
말로 상징되는 북방초원, 배로 상징되는 남방의 해원(海原)이 신라인의 활동공간이었다. 이 만한 스케일의 민족 무대를 갖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라는 농업생산성과 기마군단, 그리고 철생산력과 해양력까지 두루 갖춘 입체적이고 다양한 국력의 조합(組合)을 갖고 있었다. 이는 남방계․북방계 등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융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복합성은 신라가 가진 주체성을 매개로 하여, 복잡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단합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라는 전쟁이나 외교 등 국가적 위기 때 국내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라는, 참으로 당차고 단수가 높은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라통일의 주체세력은 신라 왕족 김춘추와 100여 년 전(前)에 신라에게 망했던 금관가야 왕족 김유신의 연합세력이었다. 피정복자를 노예로 부리지 않고 통일 대업(大業)의 주역(主役)으로 중용(重用)한 신라의 포용성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개방성에서 나온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