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기(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고 그 뒤 이들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었으므로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가진 문화, 전통, 민족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흉노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은 사마천이 서기 전 1세기에 쓴 사기의 흉노열전(匈奴列傳)에 실려 있다. 후세 학자들은 이 글을 인용하여 흉노를 설명해야 했다. 당시의 거의 유일한 흉노 관찰기이다.
아래 글은 일신서적출판사에서 나온 「사기열전 2권」(권오현(權五賢) 역해(譯解))의 흉노열전 중 일부이다.
■ 흉노인들의 습속
흉노의 여러 종족이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가축은 주로 말·소·양이었는데, 특이한 것으로 낙타·나귀·노새·버새(注-수말과 암나귀 사이에 난 잡종으로 노새보다 약함)․야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들을 따라 옮겨 살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마저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 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자라나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나 싸울 때에는 전원이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은 거의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싸움이 유리할 경우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는 물러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 무엇이든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 하며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썼다. 건장한 사람을 소중히 위하고, 노약자(老弱者)는 천대했으므로 고기를 나눠줄 때만 해도 좋은 살코기는 우선적으로 장정들에게 돌아갔고 그 나머지가 노약자의 차지였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은 형이나 아우가 차지했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字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북쪽으로 흉노를 치게 했다. 몽염은 하수(河水)(황하, 黃河) 남쪽 땅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 하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드는 한편, 하수를 따라 44개소에 현성(縣城)을 쌓고 유형병(流刑兵)을 옮겨 이를 지키게 하였으며,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산시성, 陜西省)에 이르는 도로를 개통시켰다.
■ 묵특선우(單于)의 출현
당시는 동호(東胡)가 강하고, 월지(月氏)도 세력이 왕성했다. 흉노의 單于(선우: 흉노의 君主 칭호)는 두만(頭曼)이라 불렸다. 두만은 진(秦)나라를 당해 내지 못해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몽염(蒙恬)이 죽고 제후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이탈하고 말았다.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차츰차츰 하수(河水)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마침내 옛날 요새선에서 중국과 경계를 맞대었다.
두만선우(頭曼單于)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묵특(冒頓)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총애하는 알씨(閼氏)(황후(皇后)의 뜻)에게서 다시 작은아들을 얻어서 묵특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선우는 묵특을 월지에게 볼모로 보낸 다음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선우의 예상대로 묵특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특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두만은 일이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특을 1만기(旗)의 장군으로 맞았다. 그러나 묵특은 鳴鏑(명적: 소리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기사(騎射) 연습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같이 그곳에 대고 쏘아라. 쏘지 않는 자는 죽인다』
그런 다음 수렵에 나섰을 때 묵특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 댄 곳에 쏘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잡아 죽였다. 그 뒤 묵특이 또한 명적을 자기의 이마(愛馬)에게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당장에 그들을 잡아 죽였다. 얼마 후에 그는 또 명적을 자기의 애처(愛妻)에게 날렸다. 좌우에서 겁이 난 나머지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특은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여 버렸다.
또 얼마 뒤에 묵특은 수렵에 참가해서 명적을 선우가 타는 말에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일제히 거기에 쏘아 댔다. 그제서야 묵특은 비로소 부하 전원이 자기의 명령을 따른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두만에게 날렸다. 과연 그의 부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려 두만선우를 죽였다. 묵특은 잇달아 그의 계모, 아우 및 자기를 따르지 않은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특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쪽에서는 동호(東胡)가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생전에 탔던 천리마(天里馬)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내주었다. 얼마쯤 뒤에는 묵특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줄로 안 동호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閼氏 중에 한 사람을 얻어 가지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게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東胡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閼氏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쳐서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閼氏 한 사람을 골라 東胡에게 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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