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일본 무사와 신라 도래인(渡來人) 이야기
스키타이 황금미술전시회 도록(圖錄)에는 완전무장한 스키타이 군사의 사진이 실려 있다.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하여 재현한 것이다. 이 모습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나온 19세기 일본 무사들의 무장(武裝)과 너무나 흡사하다. 몇 년 전에 내몽골에서 찍은 칭기즈칸 영화에 나오는 기마군단의 중장(重裝) 기병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삼국시대의 장수 모습과도 비슷하다. 복원된 이란계 스키타이 군사의 무장은 신라 화랑도와 일본 무사들과 거의 같다.
우선 투구가 꼭 같다. 머리를 감싸는 쇠모자 양쪽에 가죽으로 보호막을 붙여 놓은 식이다.
갑옷도 두꺼운 가죽판에다가 쇠판을 여러 개 붙인 기마용 찰갑(札甲)이다. 바지, 즉 호복(胡服)을 입고 있는 점도 그렇다. 칼도 신라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환두대도형(環頭大刀型)이다.
스키타이족은 기원 전 7세기경부터 지금의 이란,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누볐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목기마 군사 집단이었다. 이들이 만든 기마(騎馬)문화가 동쪽으로 확산되어 흉노, 선비(鮮卑), 투르크, 위구르, 거란, 몽골로 이어지는 북방기마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그 흐름 속에 북방기마민족 집단이 고대국가를 세웠던, 한국과 일본의 군사문화가 존재한다. 스키타이 군사의 군장(軍裝)을 보면 일본과 한국의 군사문화, 그 뿌리는 북방초원의 주인공인 기마민족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키타이와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엔 2700년의 세월이 존재하지만 군사들의 무장이 근본적으로 같은 이유가 바로 이런 기마문화의 공유에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군사문화도 13세기 몽골의 침입 이전에는 일맥상통했던 것 같다. 일본 무사집단이 정권을 잡아 막부(幕府)를 운영하면서 교토의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전횡한 것은 12세기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이었다. 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무사집단은 원씨(源氏)인데, 이들은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 도래인들이 지금의 도쿄 지방, 즉 관동 지방에 웅거하여 무사집단으로 컸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源氏라고 하여 신라계의 무사집안이란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니토베가 쓴 「무사도(武士道)」에는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무사도 정신에는 불교, 유교, 신도(神道)의 영향이 들어 있다. 불교는 무사도에 어떤 성격을 심었나. 운명에 임하는 평정(平靜)한 감각,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조용한 복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금욕적인 침착, 생명을 가볍게 보고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이다.
신도는 불교가 줄 수 없는 것을 무사도에 심었다. 조상에 대한 존경심, 부모에 대한 효성,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다. 애국심과 충의의 마음은 신도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교의 또한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간의 예절과 의리에 대해서 무사들을 교육했다. 공자는 정치인들의 도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는 지배층인 무사계급에 들어맞았다. 맹자는 평민들을 위하여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이는 정의감이 강한 무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무사도는 유교로부터 인의를 배웠던 것이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화랑도 정신을 유불선(儒佛仙)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유교, 불교, 선도(仙道,이는 북방유목민족 고유의 샤머니즘적 종교로서 일본에서 말하는 신도와 같다)의 정신이 화랑도에 녹아들었다는 뜻의 말을 한 것이다.
불교의 초연한 명상, 유교의 인의, 선도의 충의가 합쳐진 것이 풍류(風流)라고도 불린 현묘지도(玄妙之道)로서의 화랑도(花郞道)였던 것이다. 전선을 누비는 장교집단에게 「꽃 신랑」이란 의미의 화랑이란 이름을 붙여준 여유와 멋!
화랑도는 6세기 동아시아에 나타난 최초의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7세기, 그들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무사도와 화랑도는, 북방기마민족의 군사문화를 지녔던 일단의 세력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건너가 농경문화와 융합하면서 만들어낸 가치관이자 습관일 것이다. 즉, 신도(선도)는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것이고 불교와 유교는 중국에서 수입한 외래 사상이다. 신라와 일본의 군사문화는 기마민족 고유의 요소들과 중국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한 차원 발전시킨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사무라이 집단을 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경주에서 신라 군사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이종학씨이다. 그는 신라와 일본 무사 계통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다.
1. 일본인들이 모시는 하치만신(八幡神)은 신라 도래인과 관련이 있는 바다의 신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源氏 집안에선 하치만신을 氏神, 즉 씨족의 신으로 모셨는데 하치만신은 신라계통일 뿐 아니라 무신이라고 한다.
2. 신라 도래인들은 주로 도쿄 근방 관동 지방에 살았다. 집단 거주지는 신라군(新羅郡)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지역 중의 하나인 甲斐의 源氏 후손이 16세기 일본 전국 시대의 맹장 다케다신켄(武田信玄)이었다. 甲斐源氏인 다케다신켄은 스스로 조상을 「신라삼랑의광(新羅三郞義光)」이라고 자칭하면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3. 일본 무사집단의 본류는 관동 무사이다. 이 관동 무사들은 신라후손들인 源氏를 중심으로 하여 무사집단을 형성하여 그 뒤 일본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무사의 源流는 두 갈래라고 한다. 귀족을 지키는 경호병 출신과 새로운 농토를 개척한 재지무사(在地武士)가 그들이다. 이 무사집단의 핵심이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었다면 이들이 화랑도 정신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화랑도는 동아시아 최초의 장교(그리고 국가 엘리트) 양성기관이었다. 이 화랑도는 무술만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정진하고 국토순례도 했다. 화랑도의 애국심은 경직된 명령체계나 탁상공론이 아니라 국토순례와 풍류에서 나온 부드럽고 포용성이 큰 생동하는 애국심이었다.
김춘추, 김유신, 김흠순(김유신의 동생) 등 삼국통일의 주역들은 화랑도의 대표, 즉 풍월주(風月主) 출신들이었다. 화랑도는 그러나 삼국통일을 성공시킨 이후에는 쇠락하여 슬며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화랑도의 실종은 통일신라가 급속도로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고유한 풍습과 가치관을 잃어가는 과정과 겹쳐진다. 화랑도의 뿌리는 신라지배층인 흉노족 등 북방기마민족의 샤머니즘과 닿아 있는 것인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유교적인 사상체계가 이 화랑도의 원래 마음밭을 변질시키니 그 토양에서 꽃핀 화랑도는 서서히 고사(枯死)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인들이 북방기마민족의 혼을 잃어 간 과정이기도 하다.
이 화랑도의 전통이 신라 도래인을 통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의 사회체계와 사상적 기반 위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린 것이 무사도란 것이다. 일본은 바다로 대륙과 (격)隔해 있는 관계로 해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덜 받았고, 고유의 샤머니즘을 신도(神道)라는 하나의 종교의식에 담아 보존해 갈 수 있었기에 이 토양에서 샤머니즘을 모태로 한 화랑도 정신을 살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북방기마민족의 군사문화를 농경적으로 발전시켜 계승한 화랑도가 일본에 건너가서 무사도로 꽃피었다는 해석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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