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요,원,몽고

칭기스칸의 부하라 전격전

자연정화 2013. 9. 16. 13:51

칭기스칸의 부하라 전격전(Thunderbolt Operation, April 11, 1220)

 

접촉

 

코라즘은 북으로는 아랄해에서 남으로는 페르시아 만까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자그로스 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함으로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카스피해와 발하쉬호 사이에 아랄해가 있다. 이 아랄해로 두 개의 큰 강이 흘러들어 오는데 동남쪽에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아 강과 서남쪽에서 흘러 들어가는 아무다리아 강이 그것이다. 이 두개강 사이의 지역을 트란속시아나라 불렀으며, 아무다리아 강의 서쪽지역은 코라산이라 불렀다.

 

이 트란속시아나 지방의 가장 위쪽, 즉 아랄해 바로 남쪽에는 불모지인 키질쿰 사막이 있었지만, 사막의 남쪽과 파미르고원, 그리고 역시 고지대인 힌두쿠쉬 사이의 광활한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코라즘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드를 비롯해서 부하라, 우르겐치 등의 대도시와 그 밖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았다. 그리고 시르다리아 강 연안에는 가장 북쪽의 오트랄을 비롯해서, 훼나케트, 잔드, 코젠드 등의 도시들이 연이어 있었다.

 

1216년 금의 수도를 함락한 칭기스칸은 2년 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에 대비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 군대의 배치, 주민들의 분위기, 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드디어 2년 후인 1218년, 칭기스칸은 이르티쉬 강 하류로 대규모의 공병 요원과 군수 요원들을 보내 도로와 교량을 수리하였고, 방목 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전진로 상의 목초지에 대한 상세한 정찰활동을 끝냈다.

 

1219년 마침내 칭기스칸은 그의 주력부대를 발하쉬 호 동쪽 이르티쉬 강 상류를 엄호물로 하여 병력을 모았다. 7월까지 집결된 총 인원은 10만의 몽골군 뿐만 아니라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 칸, 알마릭의 새로운 군주 수크낙-티긴, 그리고 이디쿠트인 바르축으로부터 복속민의 병력 3만이 충원되어 15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칭기스칸은 식량조달과 도하 훈련을 위하여 대규모 집단사냥을 하였다.

 

칭기스칸은 그의 군대를 4군으로 나누었다. 제1군 5만의 병력은 칭기스칸 자신이 맡았고 4만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제2군은 차가타이와 오고데이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3만의 병력인 제3군사령관에는 주치, 그리고 2만 병력으로 이루어진 제4군사령관은 제베였다. 칭기스칸은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먼저 주치에게 군대를 주어 아쿰 사막과 카라 타우알라 타우 산맥 사이의 황폐한 골짜기로 흐르는 추강을 건너, 시르다리아 강 하류 쪽 저지대로 향하게 하였다.

 

주치는 발하쉬 호 서부지역의 말을 전부 본대로 끌고간 후, 마을과 들판에 불을 질러 더 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코라즘의 자랄-알딘이 맞아 싸우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주치가 그의 임무를 끝낸 뒤였다. 몽골군의 후위대가 자랄-알딘과 전투를 치른 후, 몽골군은 평원의 마른풀 마저 불을 지르고는 연기와 화염 뒤로 사라져 버렸다. 코라즘은 20여만의 병력을 시르다리아 강을 따라 성곽도시들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펼쳤다.

 

그 후 몇 달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1219년 7월, 몽골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베가 이끄는 제4군은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일종의 별동대로서 몽골군의 주력이 있는 이르티쉬 강변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카쉬가르 지방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제베군은 4,000 m 높이의 눈이 깊게 쌓인 테렉 고갯길을 통하여 빽빽이 들어찬 나무를 잘라 길을 만들며 파미르고원을 넘어, 페르가나의 대 분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넓은 들판과 낮은 언덕, 그리고 사람의 무릎과 허리까지 올라오는 갈대밭이 끝없이 서로 연결된 곳이었다. 그곳이 바로 코라즘의 영토였고 그곳으로부터는 시르다리아 강과 군사 및 경제요충의 도시 코젠드가 멀지 않았다.

 

코젠드는 사마르칸드로 부터 동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여서 마치 사마르칸드의 동쪽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베의 제4군은 시르다리아 전선의 남쪽 끝에 있는 코젠드로 진격하였다. 이로서 제베는 곧바로 타쉬겐트와 사마르칸드를 위협하게 되었다. 코라즘은 서둘러 이곳 시르다리아 강 상류에 부대를 보강하였다. 또 부하라에만 4만 병력을 집결시키고 사마르칸드에도 추가병력을 배치하였다.

 

목표선정

 

제베의 제4군이 코젠드로 향해 진격해 나갈 무렵, 칭기스칸의 주력은 추강을 건넌 후 아쿠 쿰 사막의 남쪽을 우회하여 폐허화된 발하쉬 호 서부지역을 곧바로 통과하였다. 아쿠 쿰 사막이 끝나는 시르다리아 전선의 북쪽 측면에서 몽골군 제1, 2, 3군은 시르다리아 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칭기스칸은 두개 집단군을 시르다리아 강 방어선 정면을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인솔하여 상대의 배후 깊숙한 곳에 있는 부하라를 공격목표로 시르다리아 방어선의 북측으로 우회하기로 하였다.

 

부하라와 시르다리아 강 전선 사이에 있는 사마르칸드는 몽골군이 앞뒤에서 협공하기로 하였다. 몽골군은 사마르칸드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각기 부여받은 지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이 이끄는 두개의 집단군은 계획에 따라 시르다리아 강 하류에서부터 형성된 전선을 휩쓸기 시작했고, 곳곳의 요새들을 쉬지 않고 공격하면서 제베가 있는 곳을 향해 상류로 진격하였다.

 

차가타이와 오고데이가 지휘하는 제2군은 곧바로 오트랄로 향하였다. 오트랄은 진흙과 질긴 갈대의 줄기를 섞어, 구워 만든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놓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후 오트랄에서는 5개월 째 공방전에 벌어졌다. 오트랄 성내의 가옥은 나프타 화염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불탔고 거리에는 시신들이 즐비하여 악취와 파리떼가 들끓었다. 장기전으로 화살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날축과 합류했던 카라차는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한쪽 성문을 연후 돌격하였으나 이때를 기다린 몽골군이 물밀듯이 오트랄의 성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시가전에서 패한 방위군은 도시 내에 있는 시터델로 피신하여 다시 1개월을 버텼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파괴를 마친 그들은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말머리를 돌렸다.

 

주치의 제3군은 오트랄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르다라아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아랄해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젠드와 시그낙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분산되어 있는 코라즘 제국의 병력을 섬멸하며, 코젠드를 점령하고 그들과 연합하기 위해 하류(북쪽)로 행군하는 제베의 병력과 합세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젠드의 백성들은 투항했고 시그낙의 백성들은 저항하였다. 주치의 군대는 시그낙을 공격하여 성벽을 완전히 파괴한 후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기습공격

 

칭기스칸의 제1군은 오트랄을 피해 북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남서방향으로 향했다. 이들의 행보는 차가타이와 주치의 맹렬한 공격에 가려져 눈에 띠지도 않고 재빨랐다. 그들이 시르다리아 강을 건너자, 그들의 눈앞에는 광활한 키질 쿰(붉은 모래) 사막이 펼쳐졌다. 이들은 투르크멘의 한도시인 자눅을 점령하여 키질 쿰(붉은 모래)사막을 통과하는, 오아시스가 이어지는 길을 알고 있다는 안내자를 찾아,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약 600 km의 사막을 횡단하였다. 무하메드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에 들어서였고, 그때 이미 칭기스칸은 남쪽 사막 끝에 나타나 누루타를 함락시키고 부하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한번의 놀랄만한 기동으로 칭기스칸은 코라즘 전선 전체를 돌아서 적의 잠재 병력이 무수히 남아있는 서부지방이 시르다리아 전선과 연결되는 것을 막아 버렸다. 칭기즈칸은 일익 우회포위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역사상 처음있는 전략적 기습이었다. 부하라는 사마르칸드를 코라즘의 서쪽영토와 연결해주는 길목도시로 아무다리아 강변에 연한, 고정인구 40만 가량의 큰 도시였다. 칭기스칸은 부하라의 성문중 하나를 열어두어 주둔군을 성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하였다. 코라즘 병사들은 몽골군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남쪽으로 도망쳤으나 아무다리아 강이 그들을 막고 있었고, 뒤에서 나타난 몽골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일부 투루크 병사들만 남아있던 부하라 성은 기습 점령되었으며 수비대 전원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다른 도시를 공략할 때의 화살받이로 이용되었다. 이로서 불과 1달 반만에 수적으로 열세한 몽골군은 30만에 달하는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부하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닿자 시르다리아 강을 방어하고 있던 코라즘군은 뒤의 공격을 염려하여 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코라즘왕 모하메드는 사마르칸드로 물러섰으며, 그의 아들 자랄-알딘은 아랄해 남쪽의 우르겐치에서 각지로 동원령을 내려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어 칭기스칸 본군과 다른 세 개의 집단군은 이제 사마르칸드에 집결하게 되었다. 무하메드의 모든 병력은 사방에서 집결한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으며, 서쪽 땅의 통신로는 차단되었다. 코라즘의 마지막 요새 사마르칸드에는 11만에 이르는 많은 투루크와 타직 병사들이 있었다. 코라즘의 캉글리군 5만이 코끼리를 투입한 뒤 공격에 나서자 몽골군은 선회가 가능할 때까지 후퇴하였다가 캉글리의 측면을 공격했고, 이로 인해 사마르칸드 주둔군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칭기스칸은 4일간 수많은 인간방패를 돌진시켜 항복을 받아냈다.

 

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은 결정되었다. 주민들은 먼저 성밖으로 끌려나갔으며 몽골군은 그들 가속 5만명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금화 20만 디나르를 요구하였다. 또 6만 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사로잡아 공성포의 제조와 관련된 3만 명은 성을 공격할 때 대포를 발사하는 회회포 군단으로 편성하였으며, 나머지 3만 명에 달하는 장인들은 왕공과 공주 그리고 장군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제 코라즘 제국은 후방병력들이 동원되기도 전에 주요성채가 함락됨으로서 불과 한달 남짓한 전투 끝에 새로운 방어선을 미처 구축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 후 몽골은 1년 반 사이에 트란속시아나에서 코라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철저한 추격

 

칭기즈칸의 섬멸전은 철저하였다. 그는 고도의 기동성을 지닌 기병대를 이용, 상대의 무장역량과 지도자급 인물을 끝까지 추격하여 확실한 승리를 추구하였다. 사마르칸드가 위급할 때 후계자 자랄-알딘은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동진 하였으나 성은 이미 함락되고, 역으로 칭기즈칸은 이 병력을 추격하였다. 이에 자랄-알딘은 코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 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코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으며, 자랄-알딘은 칭기스칸에게 계속 쫓겨 카불을 거쳐 더위가 심한 먼 인도로 도망쳤다.

 

이미 사마르칸드를 벋어난 코라즘 샤 무하메드는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몽골군을 아무다리아 강의 남쪽이나 서쪽으로 끌어들인 후, 장기게릴라전을 펼쳐, 공성전에 약한 유목민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한꺼번에 반격해 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제베와 수베데이가 지휘하는 3만의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코라즘 샤 무하메드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코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 그 후 다급해진 무하메드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로서 코라즘 제국은 대단히 짧은 기간에 멸망되었고 다시 일어설 가능성까지 완전히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