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요,원,몽고

거란국(契丹國) / 요(遼, 916년 ~ 1125년)

자연정화 2018. 6. 18. 16:35

거란국(契丹國) / 요(遼, 916년 ~ 1125년)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내몽골, 중앙아시아, 랴오닝 성, 헤이룽장 성, 지린 성, 연해주, 함경북도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 (392년 9월)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 복속했다.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을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12세기 이후부터는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서요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1218년 서요가 멸망하자, 거란족은 한족과 몽골족에게 모두 동화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거란의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요(遼)

요(遼, 916년 ~ 1125년) (문화어: 료나라),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은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탄'은 대거란이라는 의미로,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킨 명칭이다. '키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역사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이때 요나라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이후 서요는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통치 구조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 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정치

요는 거란인과 기타 유목민은 고유한 제도(북면제)로 다스리고, 한족과 농민은 중국의 제도(남면제)로 다스리는 이원 지배체제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국가 중대사는 거란인이 주재해 거란인이 우월을 지켰다.

 

중앙정부 최고 기관으로 북·남 추밀원(北南樞密院)이 있었는데, 각각 독자적으로 부서를 거느렸다. 북면관에는 거란의 독자성이 강한 기구를 설치하고, 남면관에는 중국식 6부를 설치했다.

 

지방제도도 부족제와 중국식 주현제로 나뉜다. 거란족과 유목민에게는 기존 혈연 조직을 재편한 부족제를 시행해서 중앙의 통치 권위를 세웠다. 발해지역에는 동란국을 세워 발해의 제도를 그대로 채용했는데, 이는 사실상 중국식 주현제였다. 연운십육주 지역도 주현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법 적용에 있어서도 거란인과 유목민에게는 거란의 법을, 발해와 중국인에게는 중국법을 적용했으며, 관할 관청도 달랐다. 법률문제를 관장하는 중앙정부기구로 이리필원(夷離畢院)이 거란인을, 대리사(大理寺)나 형부(刑部)가 한족을 담당했다. 지방에서는 거란족은 부족장이, 한족은 주·현의 장관이 관여했다.

 

경제

요는 농업을 장려해 농업 생산에 주력했고, 여기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직물·도자기·기와·마구 등 제조업이 발달했으며, 인쇄술이 발달해서 거란대장경을 조판했다. 제조업 발달을 배경으로 상업도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요는 북송, 고려와 교역하였다. 요와 송은 차, 비단, 도자기, 양, 말, 낙타와 교역하였으며, 고려와 함께 금, 은, 인삼, 말, 가죽 등과 함께 교류하였다. 요는 송, 고려는 공통적으로 말을 가지고 교역하였다.

 

종교

거란의 고유 종교는 원시적 샤머니즘이었다. 태무(太巫)라는 사제가 범민족적인 제사를 주관했고, 각 씨족마다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가 있었다. 발해와 중국에서 불교를 도입했고,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많은 발해 승려가 요의 수도에 사찰을 세웠다. 화엄종이 가장 융성했고, 진언종과 다라니 신앙도 민간에서 성행했다. 성종 이후에는 대장경 등 불교 서적을 인쇄했고 명승도 나왔다. 한족이 들어오면서 유교와 도교도 함께 들어왔지만, 유교는 한족 지배를 위한 방책에 불과했고, 도교는 민간에서 유행했다.

 

 

 

문자

거란족은 고유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서 독자적인 문자인 거란 문자를 만들었다. 태조는 대자(大字)를 만들었고, 위구르 문자를 본떠 소자(小字)를 만들었다. 거란 문자는 공문서에 사용한 표음문자로 한자의 해서와 전서를 모방한 서체인데, 현재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거란어는 고대 몽골어와 유사하다.

 

 

예술

984년에 요가 세운 허베이 성의 독락사 관음각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건축 기술을 계승한 것이다. 1054년에 산시 성에 세운 목탑은 8층으로, 규모와 기술에서 전대미문의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동몽골의 경릉에서 발굴한 인물화, 산수화, 사원 벽화가 대표적이다. 산수화에는 사냥을 즐기는 거란족의 생활 풍습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당과 5대의 산수화 기법을 계승하고 있다. 요삼채(遼三彩)라고 부르는 도자기도 유명하다. 요삼채는 당삼채의 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자연 경관과 사계절의 변화를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5개 수도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 연경(燕京)이라고도 한다. 현재 베이징 시.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 : 내몽골 자치구 닝청 현 근처.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 내몽골 자치구 바린 좌기 근처.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 현재 랴오양 시.

서경 대동부(西京大同府) : 현재 산서 성 다퉁 시.

 

 

서요(西辽)

서요(중국어 간체자: 西辽, 정체자: 西遼, 병음: Xī Liaó) 혹은 카라 키타이(Kara Khitai)는 요의 왕족인 야율대석(西遼의 德宗)이 요가 멸망한 후 중앙아시아에 세운 나라이다. '서요'는 중국식 국호이고 '카라 키타이'는 대거란(튀르크어로는 흑거란)이라는 의미이다. 1132년 건국되고 수도는 발라사군(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 부근)이었고 서요 시기에는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朵)"로 불리었다. 동서 투르키스탄을 영유(領有)하고 1211년 나이만의 왕자 쿠츨루크에게 멸망되었다.

 

 

소수의 거란인으로 지배한 정복 왕조로서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 교도였다. 재정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로부터 공납(貢納)과 위구르 상인이나 이슬람 상인 등의 동서 무역에 의한 수입에 의존했다. 또한 동서 교류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의 이슬람 세계와 동방의 중국 세계의 문화 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서요에 대신한 쿠치루크의 지배는 칭기즈 칸 군대에 곧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