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요,원,몽고

[3] 몽골제국 - 서아시아 정복

자연정화 2018. 6. 29. 15:24

[3] 몽골제국 - 서아시아 정복

 

3. 서아시아 정복

 

중앙아시아

 

카라키타이를 지나, 그 서쪽에는 무슬림의 땅 다르알 이슬람이 있다. 아랄해로 흐르는 시르다리아강 하류의 비옥한 이 지역을 차지했던 셀죽제국은 1157년 산자르의 사망이후 쇠락하여 셀죽술탄이 임명한 지방총독이 독립하였으며 카라키타이에 종속하였다. 이 코라즘샤 가문은 1194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15년 사이에 페르시아 일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1210년에는 내분으로 약화된 카라키타이에서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대 오아시스지대를 제압한 후 수도를 우르겐치(히바)에서 사마르칸드로 옮겼다. 이어 1215년에는 골조 술탄들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를 점령하였고 이란 방면에서 실권회복 중이던 바그다드 칼리프정권 압바스조를 압박하였다.

 

이제 이 군사정권은 북으로는 아랄해에서 남으로는 페르시아 만까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자그로스 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함으로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코라즘은 이슬람세계의 패권자가 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체제안정에 장기간의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국군대는 키르기스 초원의 구즈나 캉글리의 여러 부족에서 모은 용병들이었으며 정착 이란인과 유목 투르크족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있었다.

 

 

금나라가 몽골에 짓밟힌 소식은 코라즘샤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소문을 확인하고 몽골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려 칭기스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칭기스칸은 이들을 군영에서 맞아, 자신이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코라즘샤를 해지는 곳의 군주로서 친선을 다짐했지만 알라의 사도인 코라즘샤와 야성의 화신인 칭기스칸의 대결은 불가피하였다. 메르키트 잔당을 추적하던 당시 몽골군과 코라즘 군대 사이에는 소규모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칭기스칸은 이를 피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인 주치에게 코라즘과의 마찰을 피하고 전리품도 가능한 한 양보하도록 하였다.

 

당시 몽골은 새로운 점령지역의 정지작업과 몽골의 행정체제 수립에 바쁘던 때라 분쟁을 바라지 않았다. 주치의 화해제의에 코라즘샤는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나의 적이다. 칭기스칸이 싸우지 말라 했더라도 알라께서는 너와 싸우라 하였다. 칼이 조각나고 방패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싸우자" 하였다. 전투는 하루종일 이어졌으나 몽골군은 코라즘군이 두 배나 많아 간단히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 밤을 기다려 철수하였다.

 

이날축

 

금의 수도를 함락한 후 1216년 몽골로 돌아온 칭기스칸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그가 복속시켰던 부족들, 특히 나이만족의 반란이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 이들 반란세력은 코라즘의 간접지원을 받고 있었다. 칭기스칸은 1216년부터 2년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를 시켰다. 서방으로는 첩보, 계략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 단을 보냈다. 이즈음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 군대의 배치, 주민들의 분위기, 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1218년 코라즘의 교역 사절단이 칭기스칸을 방문하자 그는 답례로 낙타에 귀중품을 실어 450명의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은 코라즘 땅 오트랄에 도착하면서부터 칭기스칸의 권위와 종교적인 관용, 몽골군의 강인함, 그리고 반항하는 자들이 받는 비참한 처벌에 대해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다니자 국경 수비대장 이날축은 이들을 스파이 집단으로 몰아 모두 죽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칭기스칸은 몽골의 특명사절을 보내 이를 따졌다. 그러나 코라즘샤는 그중 1명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의 수염을 밀어버리고 쫓아냈다.

 

몽골인들은 전쟁과 외교를 같은 무게로 보았으며 사신의 처형은 곧 전쟁을 의미하였다. 비통한 칭기스칸은 언덕 위에 올라가 모자를 벗고 하늘을 향해 사흘 낮과 밤 기도를 올렸다. 칭기스칸에게 복수는 도덕적 의무였고, 하늘의 뜻이었다. 원정에 앞서 그는 전투규범과 수칙을 포고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후계자로 셋째 아들 오고데이를 뽑은 후 한족과 키타이족 등의 징발병력과 위구르 등 지원병력을 합쳤다.

 

후계자 문제

 

쿠릴타이에서 후계자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칭기스칸이 큰아들 주치를 부르자 둘째아들 차가타이가 불같이 나오며 "아버지는 이 더럽고 추잡한 메르키트 개자식에게 제국을 넘기려는 것입니까?"라고 외쳤다. 그러자 얼굴이 벌개진 주치는 "아버지가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신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라고 화를 냈다. 두 왕자가 멱살을 붙잡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주위의 친족들과 장군들 중 노장 보르추와 무칼리가 뛰어나와 이들을 뜯어 말렸다.

 

"차가타이, 왜 이러십니까? 메르키트가 쳐들어 왔을 때 어머니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외간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납치 당한 것인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주치와 같은 배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이 살아있는 어머니를 그렇게 욕되게 한다면 상처는 덧나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전란 속에서 목이 타는 갈증과 굶주림을 참으면서 당신들을 먹여 살렸고 아버지 칸은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가죽통에 피를 쏟으면서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주치의 계승은 분쟁을 낳게될 것이 확실하였다. 장내가 겨우 진정되자 칭기스칸이 입을 열었다. "주치를 왜 나쁘게 말하는가? 큰아들은 주치가 아닌가? 앞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질책하였다. 차가타이는 바로 밑동생 오고데이 곁으로 가면서 대답하였다. "큰 아들인 주치와 저둘은 앞으로도 아버지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3남인 오고데이야 말로 마음이 넓으니 그를 후계자로 하십시오." 차가타이의 말에 칭기스칸은 "주치도 의견을 말하라"하자 "저도 한마음으로 아버지께 힘을 바치겠습니다"라 하였다. "오고데이의 의견은 어떤가?" "황망하오나 저는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일찍이 칭기스칸은 "규범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는 차가타이에게 가고, 관용과 은사, 그리고 부귀를 구하는 자는 오고데이에게 가라. 용기와 명예, 그리고 불퇴전의 정복의지를 찾는 자는 톨루이를 따라라" 하였다. 칭기스칸은 후계자로서 능력보다는 포용력이 있는 오고데이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로서 칭기스칸은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차가타이에 대하여 두고두고 한을 품게 되었다. 차가타이도 후계자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과 같이 대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

 

오트랄

 

1219년 칭기스칸은 후계자문제를 결정한 뒤 막내동생 테무게-옷치긴에게 몽골고원을 맡기고 코라즘정벌에 나섰다. 그해 여름 몽골군은 이르티쉬 강변에 집결하여 병사들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대규모 집단수렵을 실시하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코라즘을 공격하기 위하여서도 도하훈련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은 그해 가을 발하쉬 호 남쪽 오트랄 지방 카얄릭에 도착하였으며,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 칸, 알마릭의 새로운 군주 수크낙-티긴, 그리고 이디쿠트인 바르축으로부터 복속민의 병력을 충원, 보강하였다. 이때의 몽골군은 10여만 이었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수적으로 적었으나 엄격한 군율에 의해 잘 훈련되고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탁월한 장군들의 지휘를 받았다.

 

원정도중에도 그는 위장 서신 등으로 코라즘 지배층을 이간시키고 회유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마비시킴으로서 병력손실을 줄이려 하였다. 칭기스칸은 대상들을 이용해 코라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칸은 하늘이 내린 사해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 소문을 퍼뜨렸다. 코라즘의 군대는 그 태반이 킵착과 캉그리의 용병이었다. 이들은 킵착과 캉그리의 왕녀이며 코라즘샤의 어머니인 타르칸-카툰에게 더 충성하였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시키면 캉그리족에 의한 군사쿠데타 가능성이 있었다.

 

 

칭기스칸은 타르칸-카툰에게 "당신은 코라즘샤가 마구잡이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나는 그와 전쟁을 하겠으나 당신은 공격하지 않고 코라즘과 코라산, 그리고 거기에 속한 아무다리아강 북방의 땅을 주겠다"고 한 후 코라즘샤와 그녀 휘하의 투르크군을 이간하기 위하여 그녀의 지휘관들이 칭기스칸에게 봉사할 것을 바라는 편지를 가짜로 만들어 코라즘샤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코라즘샤는 토착영주들과 지휘관들에 대한 불신 속에 전쟁을 치뤄야 했으므로 병력집결보다는 제국전역 각 도시마다 분산 배치하는 전수방위를 택하였다. 즉 그는 군대를 시르다리아강 전선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하였다.

 

전 몽골군은 먼저 시르다리아강 중류 오트랄로 진입한 후 네개군단으로 나뉘어 곳곳에 늘어서 있는 코라즘의 변방도시들을 공격하는 동시에 수도인 사마르칸드로 진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사마르칸드를 함락시킨 후에는 다시 후방에 있는 변방 도시들을 일시에 공격한다는 제2전략도 마련하였다. 그 전략에 따라 네개군단은 사마르칸드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부여받은 지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몽골의 공격은 잘 통제되어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 코라즘 국경선의 도시, 요새를 착실히 포위 함락시켰다.

 

먼저 큰아들 주치군은 오트랄에서 시르다라아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아랄해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젠드와 시그낙으로 향하였다. 젠드의 백성들은 투항했고 시그낙의 백성들은 저항하였다. 주치의 군대는 시그낙을 공격하여 성벽을 완전히 파괴한 후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시르다리아강 상류로 파견된 5,000명의 몽골군은 바나카트(타쉬겐트 서쪽)를 취하고 코젠드를 포위하였다. 이 고장의 지사인 정력적인 티무르-말릭은 대담한 방어전을 펼쳤지만, 결국 작은 배로 시르다리아 강을 따라 도망쳤다.

 

두아들 차가타이와 오고데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강변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성채인 오트랄을 포위하였으나 오트랄의 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오트랄은 함락되어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이날축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다. 파괴를 마친 그들은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칭기스칸과 막내아들 톨루이가 이끄는 중앙군단은 사마르칸드의 배후에 있는 부하라를 향하였다. 사실 다른 기마군단은 이 중앙군단이 대 우회 작전을 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코라즘의 관심을 유도하는 역할도 하고있었다.

 

트란속시아나

 

1220년 2월 칭기스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주력군을 이끌고 곧바로 키질쿰 사막을 지나 부하라로 진격하였다. 몽골군이 갑자기 출현하자 투르크 수비대는 공성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으나 아무다리아 강변에서 전멸 당하였다. 400명의 투르크 병사들만 남아있던 성은 기습 점령되었으며 수비대 전원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다른 도시를 공략할 때의 화살받이로 이용되었다. 도시는 철저히 약탈되었고 도시전체를 불태워 시내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모두 죽었다.

 

이어 칭기스칸은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이 도시를 공격하기 전 칭기스칸은 오트랄을 함락한 두 아들 차가타이, 오고데이와 합류하였다. 이미 코라즘샤는 1220년 4월 사마르칸드에서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 서쪽으로 작전상 후퇴하였다. 몽골군을 아무다리아 강의 남쪽이나 서쪽으로 끌어들인 후 장기게릴라전을 펼쳐 공성전에 약한 유목민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한꺼번에 반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마르칸드에는 11만에 이르는 많은 투르크와 타직 병사들이 소집되어 당시 사람들은 이 도시를 함락하려면 수년이 걸리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대상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전쟁에 반대하였다. 투르크 군대는 코끼리를 투입한 뒤 공격에 나섰으나, 거짓으로 퇴각하다 급습하는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 격파되고 말았다. 칭기스칸은 이 요새를 4일간 수많은 인간방패를 돌진시켰다. 드디어 성채를 방위하던 캉글리족에 속한 투르크인 병사들 3만명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사마르칸드는 철저히 약탈당하였다. 부하라의 경우와는 달리 사마르칸드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저항하지 않아 대부분 구제되었다.

 

주민들은 먼저 성밖으로 끌려나갔으며 몽골군은 그들 가속 5만명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금화 20만 디나르를 요구하였다. 또 6만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사로잡아 공성포의 제조와 관련된 3만 명은 성을 공격할 때 대포를 발사하는 회회포 군단으로 편성하였다. 나머지 3만명에 달하는 장인들은 왕공과 공주 그리고 장군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사마르칸드의 인구는 4분의 1로 줄었다.

 

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은 결정되었다. 제베와 수베테이에게 쫓긴 코라즘샤는 추격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게 되었다. 타르칸-카툰 역시 마잔다란의 조그만 요새에 피신했으나 4개월간에 걸친 몽골군의 포위로 식수가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 코라즘샤의 자식들은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분배되었으며, 타르칸-카툰은 몽골에 있는 칭기스칸의 본영으로 이송되어 모욕 속에 살게 되었다.

 

1220년 가을부터 칭기스칸은 새롭게 편성된 회회포군단과 정복지에서 모집한 보병을 이용하여 코라즘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으나 코라즘의 옛 수도 우르겐치는 칭기스칸의 두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가 매달려 공격을 했으나 6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칭기스칸은 사태의 진상이 두 형제간의 갈등임을 파악하고 오고데이를 총대장으로 보내 포위작전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 오고데이는 먼저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 1221년 4월 성벽을 타고 넘어 성내로 들어가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오고데이야 말로 몽골제국을 통치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주치는 모든 시민들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공예가와 기술자들은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 정렬시켰다. 그런 후 일반시민들은 몽골군의 각부대 사이에 분배되어 칼, 도끼, 활로 학살되었다. 이 학살을 면한 자는 노예가 된 젊은 여자와 어린이들 뿐 이었다. 이후 몽골군은 시내를 약탈하고 아무다리아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시내에 숨어있던 자들을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우르겐치는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 결국 몽골은 1년반 사이에 트란속시아나에서 코라즘세력을 몰아냈다. 이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코라즘에 많았으나 조직과 지휘의 통일성 그리고 규율에서 몽골이 크게 우세하였다.

 

코라산(동부이란)

 

몽골군이 트란속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코라즘샤 무하마드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코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자기 영토의 반대편 끝인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 칭기스칸은 제베와 수베테이가 지휘하는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제베와 수베테이가 접근하자 발흐는 투항하여 위난을 면하고 통치자를 영접하였다. 한시가 급한 제베는 니샤푸르도 위임통치 정도로 상황을 끝냈으나 수베테이는 투스(마쉬하드), 담간, 삼난을 약탈하였다. 두 장군은 계속 무하마드를 추격하여 이라키아잠으로 들어가 라이를 공격한 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이어 하마단을 전력 질주하여 통과한 후 카룬에 이르러 무하마드를 잡으려다 놓치자 그들은 분풀이로 잔잔과 카즈빈을 파괴하였다. 무하마드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그를 추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무하마드는 이미 거기서 지쳐 죽었다.

 

 

코라즘샤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코라즘샤 무하마드의 후계자 자랄-알딘 망구베르티는 나사에서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트란속시아나와 코라산의 재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코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 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코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다. 칭기스칸은 1221년 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코라즘 잔당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코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칭기스칸은 칙령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 "누구라도 항복하는 자는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줄 것이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처자식은 물론 친족 모두를 몰살시킬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전조사없이 도망하는 코라즘군을 쫓아 발을 들여놓은 몽골군은 엄정하지 못하여 주민들을 많이 해쳤다. 몽골군은 발흐를 점령하였는데 그곳 주민의 항복에도 그 도시를 파괴하였다. 우르겐치 함락과 같은 시기에 톨루이는 7만의 군사를 이끌고 메르브를 공격하였다. 시내의 수비대는 돌격을 하였으나 포위군에게 쫓겨 되돌아왔다. 성장은 스스로 톨루이의 막사에 찾아가 항복하였으나 같이간 사람들과 함께 결박되었다. 이어서 몽골군은 시내에 들어가 전 주민을 성밖으로 몰아냈다. 주민들은 남과 여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로 나뉘어 몽골군의 각부대에 분배되어 울부짖음 속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목숨을 건진자들은 노예로 쓸 약간의 소년소녀에 불과하였다. 메르브의 학살사건은 몽골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얼마 전 칭기스칸의 사위 토구차르가 공격하다 죽은 니샤푸르를 기습하여 "개와 고앙이까지 죽였다." 이어서 투스 인근의 아랍-페르시아 문명을 파괴하고 헤라트로 간 톨루이는 자발적으로 항복한 헤라트 주민을 무차별 살해한 후, 탈리간에서 칭기스칸과 다시 합류하였다.

 

칭기스칸은 탈리간을 파괴한 뒤 힌두쿠시를 넘어 바미얀을 포위하였다. 이 작전에서 차가타이의 아들이자 칭기스칸의 손자인 젊은 무투겐이 전사하자 칭기스칸은 바미얀의 모든 생명을 죽여버림으로서 코라산지역 (동부이란)은 회복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무조건 항복인가 죽음인가의 원칙으로 일관한 것은 자기들이 하늘로부터 세계정복의 사명을 받은 종족으로 이러한 신성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쟁을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칭기스칸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주민 20%를 다룰 위구르인 관리 다루가치와 서기들을 남겼다.

 

자랄-알딘

 

파르완에서 자랄-알딘은 칭기스칸의 양자 시기-쿠두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처음으로 격파하였다. 파르완의 승리는 살아남은 동부 이란의 도시들에 용기를 주었다. 칭기스칸은 직접 자랄-알딘을 추격하러 나섰다. 그가 가즈니로 진격하자 자랄-알딘은 다시 도망쳤다. 칭기스칸은 강행군을 하여 인더스강에 이르렀을 때 자랄-알딘은 막 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그는 추격해 온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자기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말을 탄 채 인더스강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강 저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몽골병사들이 그를 추적하려 하였으나 칭기스칸은 그들을 제지한 뒤 "아버지라면 마땅히 저런 아들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 건너편에 도달한 그는 델리-술탄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자랄-알딘의 가족들은 몽골에게 잡혀 사내아이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몽골은 인도영내로 추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잘라이르부의 발라-노얀이 지휘하는 몽골군 분견대가 물탄까지 수색활동을 벌였지만 더위 때문에 바로 철수해 버렸다.

 

몽골은 금나라보다 수월하게 트란속시아나와 코라산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몽골은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집하여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10명 당 한명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으며 수비대는 이 사람들이 몽골군으로 비쳤다. 이 방법은 몽골의 훈련과 조직에 의해 완벽해지면서 그들의 보편적인 전술이 되었다. 칭기스칸이 사마르칸드 공성전 때 이용한 사람은 부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이었으며, 우르겐치 공격에서는 사마르칸드의 포로들이 이용되었고, 톨루이가 메르브를 함락시킬 때는 코라산의 시골주민들을 이용하였다.

 

몽골은 코라즘을 대부분 정복하였으나 아주 복속시킨 것은 아니었다. 탕구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칭기스칸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전군에게 선회를 명령하고 천천히 몽골본토로 퇴각하였다. 그는 처음에 인도를 거쳐 돌아가려 했으나 만년설로 덮여있는 높은 산맥과 울창한 숲 그리고 이곳 도로에 관한 지식부족 등으로 결국 페샤와르를 거쳐 몽골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제베와 수베테이의 페르시아, 러시아 침공

 

코라즘샤 무하마드가 죽은 뒤에도 제베와 수베테이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여 라이를 약탈한 뒤 하마단을 항복시켰다. 그 뒤 잔잔을 파괴하였고, 카즈빈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계속하여 한겨울에 무간평원을 가로질러 그루지아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다. 수베테이는 이들을 제베가 있는 매복장소로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그루지아 남부지방으로 짓쳐 들어갔다. 몽골군은 포로들을 앞세우고 성채공격을 하였으며 도시가 함락돼 주민학살이 끝난 뒤에 그곳을 떠나는 체 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되돌아와 도망쳤던 자들의 목을 베었다. 그런 후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가 샤마카를 약탈하고 이곳을 지나 코카서스산맥을 넘었다.

 

 

코카서스산맥을 넘어 북쪽 스텝으로 내려온 제베와 수베테이는 그 지역민인 알란, 레즈기, 시르카스, 그리고 킵착 투르크인들과 충돌하였다. 몽골군은 먼저 투르크-몽골의 형제애에 호소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주어 킵착인들이 배신하도록 한 후 다른 지역민들을 하나씩 차례로 격파하고, 마지막에는 킵착인까지 격파하여 약탈물을 되찾아 갔다.

 

패배한 킵착인들은 루시 공작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제후들이 이끄는 8만의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내려왔다. 몽골군은 러시아군이 지쳐 널리 분산될 때까지 후퇴하다가 아조브해 북방의 칼카 강가에서 갈리치의 왕자와 킵착인들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몽골군은 크리미아의 수닥과 솔다이아에 있던 제노아인들의 창고들을 털었으며 흑해변에서 겨울을 지낸 후 볼가강을 건너 카마강가의 불가르와 우랄산맥의 캉그리를 격파한 후 원정을 끝내고 시르다리아강의 북부 초원에서 칭기스칸의 본군과 합류하였다.

 

칭기스칸은 개선한 후, 유목지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즉, 몽골 본토는 칭기스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 아들인 톨루이에게 잇도록하고, 큰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 러시아의 킵착 초원지대를 주었으며,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에게는 카라키타이의 옛 땅인 중앙 아시아를 나누어주었다. 또 셋째 아들인 오고데이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고 서부에서 천산산맥에 걸친 옛 나이만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만주지방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황금씨족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를 맡게 하였다.

 

 

4. 칭기스칸의 만년

 

도인과의 해후

 

칭기스칸은 서방원정의 고난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으나 자신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장생의 비법을 알고 있다는 도인 장춘진인 구기처를 초청하였다. 1220년 도인은 중국을 출발하여 위구르-알마릭-탈라스를 거쳐 1221년 말 사마르칸드에 도착하였으며 마침내 1222년 5월 힌두쿠쉬 산맥의 남쪽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칭기스칸을 만났다. 칭기스칸은 장생의 비약을 물었고 장춘진인은 생명을 지키는 방도만은 안다고 하였다.

 

 

이어서 장춘진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든지 몽골인들의 관습에 대한 질책, 혹은 성생활의 금욕을 말하였고 칭기스칸은 모여있는 측근들에게 "너희들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처럼 한인들은 신선을 존중한다. 나는 그가 진정 하늘이 내려준 사람임을 믿는다" 하였다. 칭기스칸은 1223년 제국의 모든 도교도장에 대한 관리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로서 장춘진인의 전진교는 중국에서 불교의 기득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주치의 죽음

 

후계자를 논할 때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차가타이의 주장은 주치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차가타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처럼 대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 그후 칭기스칸의 코라즘 원정에서 주치와 차가타이의 우익군이 우르겐치를 포위공격하였으나 두 형제간의 불화로 몽골군은 커다란 피해만 입었다. 이에 칭기스칸은 오고데이를 총대장으로 보냈고, 그는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 이 도시를 다시 공략하여 함락시킴으로서 몽골제국의 후계자임을 능력으로 보였다.

 

칭기스칸은 사마르칸드에서 겨울을 나고 1223년 봄을 시르다리아강 북쪽에서 보냈다. 그는 노얀과 바아토르들을 거느리고 타쉬겐트 부근에 장막궁정을 펼쳤다. 그리고 차가타이, 오고데이 등 자기 아들들과 함께 쿠릴타이를 주재하면서 키르기즈 산맥 북쪽에 있는 쿨란바시 초원에서 거대한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큰아들 주치는 우르겐치 공격후 시르다리야 강 이북의 이르티쉬강 쪽에 있는 그의 소유령으로 돌아간 뒤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합류하지 않고 수렵물만을 보냈다.

 

그 후 몇번 칭기스칸은 주치를 소환하였으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주치가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려 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뜻하였다. 1224년, 칭기스칸은 여러 정보망과 정황을 통하여 자신이 죽은 뒤, 주치가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 신생제국이 이러한 회오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칭기스칸은 인간적인 감정보다는 제국의 내일을 우려하여 당시 마흔 살이던 주치를 암살하였다.

 

칭기스칸은 돌아가기 전 칸의 대리인으로 도시에 다루가치라는 행정관을 두었다. 그는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뽑으며, 역참 시설의 유지, 호구조사의 시행, 중앙정부 공납의 수송 등을 책임졌으며 토착귀족들과 관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정복지에 두어진 주둔군은 소규모였지만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어놓기에는 충분하였다.

 

또 칭기스칸은 타 유목민의 씨족-부족장에게 천인대(밍간)장의 지위를 주었다. 특히 커다란 씨족-부족의 장은 한사람에게 몇 개의 천인대장에 임명하였다. 오이라트나 옹구트등 몽골과 동맹한 부족, 씨족의 장들도 각각 몇 개의 천인대장의 지위를 받았다. 천인대장은 전쟁 때에는 일정한 수의 병사를 공출할 의무를 지는 동시에 전리품이나 칸의 하사물의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칭기스칸은 이번의 서정에서 여러 부족들을 몽골중심의 단일체로 흡수 일원화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몽골제국의 행정구조는 한족과 키타이(거란)족의 골격을 빌리고, 이를 운용함에 있어서는 범 민족적 참여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1224년 여름 칭기스칸은 탈라스와 추강 사이의 초원에서 보낸 후 1225년 몽골고원으로 돌아감으로서 7년간의 원정을 끝냈다.

 

최후의 원정

 

몽골로 돌아온 칭기스칸은 1225년 겨울부터 1226년 여름까지 오르콘 강의 지류인 툴라 강의 막사에서 보냈다. 이제 북경에서 볼가강까지의 세계가 그 앞에서 떨었다. 정복자는 코라즘 문제를 해결하자 탕구트(서하)를 응징하기로 하였다. 보통은 대원정의 전후에 2년간의 준비와 휴식을 주었는데 칭기스칸은 1226년 곧바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 탕구트는 신하국이었음에도 코라즘 정벌전에 지원군 파견을 거절하였다. 몽골이 금국 정벌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탕구트에서는 1211년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새로 즉위한 신종은 서정을 위한 몽골의 출병요청을 거절했던 것이다. 더욱이 탕구트는 1225년에는 금과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하여 항몽연합전선을 꾀하였지만 서정에 골몰했던 몽골은 여유가 없었다. 1223년 무칼리가 죽자 잃었던 땅 일부를 다시 회복한 금나라를 재정복하기 위해서도 몽골은 감숙, 알라산, 오르도스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

 

 

1225년 가을 대장 아타치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은 신장의 서부에서 위구르 지역을 통과해 하서주랑을 따라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 칭기스칸 자신은 이듬해 2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탕구트의 복판을 향해 쳐들어갔다. 1226년 11월 아타치의 서로군과 합세한 칭기즈칸의 군대가 서하의 배도인 서평부(영주)를 포위하자 탕구트는 노장 명외영공에게 병력 10만 명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했다. 황하의 얼음판 위에서 벌인 양측의 최후 결전은 결국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탕구트가 농성전을 꾀하자 칭기스칸은 주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의 서경을 선제 공격했다. 금의 탕구트에 대한 원군 파견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 1227년 봄 몽골은 황하 곁에 있는 수도 흥경(영하)을 포위하였다. 몽골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무자비하였다. "주민들은 헛되게 몽골을 피하여 산으로 동굴로 숨었다. 벌판은 사람의 뼈로 뒤덮였다."

 

그러나 이때 칭기스칸은 병을 얻었고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1227년 여름 영하가 포위되어있는 동안 칭기스칸은 오늘날의 평량 서북에 해당하는 용덕의 청수하 지역 육반산의 남록에 하영하면서 오고데이와 톨루이를 불러들였다. "내 병은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니, 진실로 너희 가운데 하나가 군주의 지위와 제국의 권력을 수호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 권좌를 높여야 한다. 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고 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뒤 오고데이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지휘관들이 모였고 톨룬-체르비는 전투를 중지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칭기스칸은 먼저 탕구트 왕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무례한 회신을 받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처럼 큰소리를 치는데 물러갈 수 없다. 죽어도 이를 묻고 오겠노라. 영원한 하늘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1227년 8월 18일 탕구트의 최후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칭기스칸의 죽음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그 3일후 탕구트의 수도 영하는 몽골의 저돌적인 공격과 엄청난 파괴력에 맞설 수 없어 사령관 아사감부는 패배하였고 탕구트 왕은 항복하였으나 처형되었다. 정복자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전 주민이 살해되었다. 칭기스칸의 마지막 원정은 결국 피바다로 막을 내렸다. 칭기스칸은 정복만으로 인생을 마쳤다. 칭기스칸 시대의 몽골은 풀 냄새가 짙은 제국으로 제국의 행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사망과 매장

 

칭기스칸의 시체는 수레에 실려 고향으로 호송되었다. 장례행렬 도중에 만나는 생명체는 모두 죽였다. 행렬은 오르도스 지방의 무나산에서 수레가 진흙에 빠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칭기스칸의 뜻으로 생각하여 그곳에 가 매장하였다. 8월은 무척 더운 계절이고 장례행렬도 느릴 수밖에 없어 칭기스칸의 시신은 고향까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해 사체가 케룰렌강 상류의 쿠테아랄 근처 사아리-게르(물이 흐르는 초원)에 도착한 뒤에야 칭기스칸의 죽음은 비로소 공표 됐다. 8월 28일 이곳에서 장례의식을 치른 뒤에 그는 텡그리가 있는 오논과 케룰렌의 발원지인 성산 부르칸-칼둔(헨테이)의 고르반골 기슭에 묻혔다. 그곳은 금단의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우량카이족 일부가 그곳을 지켰다.

 

1229년 오고데이는 즉위하자 곧 몽골 방식에 따라 대대적인 제사를 올렸다. 그는 관습에 따라 자기 아버지의 영령에 사흘간 음식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또 아름답고 고운 처녀 40명을 수령들과 고관들의 가문에서 선발하여, 보석 등으로 치장하고 값진 옷을 입혀 말과 함께 칭기스칸의 영혼에 제물로 바쳤다. 칭기스칸 시대의 몽골은 풀 냄새가 짙은 제국으로 제국의 방향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5. 칭기스칸의 성격과 업적

 

성격

 

칭기스칸은 키가 크고 몸집이 탄탄하였다. 눈은 고양이 눈이고 노년에도 흰머리가 없었으며 성욕이 대단하였다. 칭기스칸은 금나라의 수탈대상인 유목부족에서 태어나 유목사회의 생존질서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의 한을 풀기 위해 흩어진 부족을 하나로 끌어 모아 정착지 주변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그는 몽골을 통일한 이후 그의 주위에 몰려든 전사들에게 나누어줄 약탈물을 얻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몽골초원에 있던 가축의 숫자는 패권을 두고 벌어진 내전과 기후변화로 격감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채워야 했다.

 

당시 몽골 인들은 말을 수출하고 밀가루와 무기, 직물 등을 수입했는데, 만성적인 무역역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탈물에 대한 기대야말로 흩어지기 쉬운 집단을 묶어두고 추종자들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주로 동물 뼈나 가죽으로 만들던 병기는 쇠와 구리 등 철기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쟁을 벌일 기술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칭기스칸은 말하였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삼아 노는 것이다."

 

유목민의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세력이 엮어지면 바로 중국 땅에 쳐들어 감으로서 이 공백을 메우는 또 다른 유목세력이 나타나 중국지역을 선점한 기존 유목세력을 쓸어버리곤 하였지만, 이를 잘아는 칭기스칸은 탕구트와 금나라 침공에서 보듯 기선을 제압하여 적의 공격능력을 마비시킨 다음, 몽골고원으로 돌아가 초원에 남아있는 적대세력을 신속히 단속하여 힘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칭기스칸은 샤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스스로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로서 텡그리(하늘)에 의해 선택받았으며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확신하였다. "당신들이 순순히 복속하고 나오면 좋은 대우와 안식을 얻을 것이나 만약 저항한다면 영원한 하늘만이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 것이다." "(우리는) 투항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 눈을 멀게 하였고 손을 없앴으며 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이런 사명감과 의지가 경제적 실익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그의 정복욕에 거대한 추진력을 부여하였다. 젊은 시절 자신이 겪은 고난과 운명의 시련을 되돌아볼 때 유라시아의 막강한 군주가 된 것을 초월적인 힘의 덕택으로 돌린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언제나 자기 최면을 걸듯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무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골몰하였다.

 

그는 평생 소치기나 마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소박한 생활을 하였고, 병사들을 형제애로서 대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주인을 배반한 자들은 적과 아군을 막론하고 죽였으며, 자신의 밑에 들어온 사람들은 끝까지 보호하였다.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모든 잠재력을 점화하고 송두리째 분출시켜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그는 싸움터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면 누구든 신분에 관계없이 지휘관으로 발탁했고, 이 지휘관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부여했다. 칭기스칸의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칭기스칸은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발휘하는 충성과 능력에 대하여 승진으로써 보답하였다. 이러한 선발체제로 몽골군은 무칼리, 제베, 수베테이와 같은 엘리트 군관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 밖의 일을 바라지 않았으나 몽골의 병사들은 신체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잘 단련되었고, 집단수렵을 통해 전술을 익혔으며 고난과 고통을 견딜 줄 알았다. 또 몽골군 안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지배하였다. "모든 몽골군은 옆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은 노력을 하였고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재산과 권력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병사들은 상급자들과 똑같은 양의 음식을 요구할 수 있었다. 어떠한 지휘관도 사람들 앞에서 혼자 포식할 수 없었다. 양식은 똑같이 나누었다." 또 칭기스칸은 철저히 부하들과 약탈물을 분배하였으므로 부하들은 열과 성을 다해 정복전쟁에 임했다.

 

몽골군의 군장은 대부분 이전부터 유목민들이 사용해온 것을 개량한 것이다. 이들은 가죽투구와 가공하지 않은 비단 옥이나 대충 무두질한 가죽옷을 걸치고 옻칠한 가죽 흉갑을 입었다. 장수들 역시 무거운 갑옷 대신 가벼운 비단 옷을 걸쳤다. 비단옷은 맞은 화살을 빼내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화살은 대개 반원을 그리며 날아오게 마련이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경우, 머리와 심장에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몸과 팔다리에 맞는다. 화살이 비단에 박히면 질긴 성분 때문에 잘 뚫지 못하고 뚫어도 박히는 부분에 비단이 밀려들어간다. 비단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면 화살이 금방 빠져 나와 상처가 깊게 나지 않고 쉽게 아물었다.

 

 

무기로는 가볍고 작은 활, 찌를 수도 있고 휘두를 수도 있는 짧은 칼, 갈고리가 달린 창, 가볍고 예리한 도끼를 들었다. 몽골군은 흉노의 긴 활과 키타이의 짧은 활의 중간크기 활을 만들어 화살의 비행거리를 현격히 늘렸다. 화살촉도 개량해 끝이 뾰족한 일반 인명살상용, 화살촉에 구멍을 뚫어 날아갈 때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심리전용, 비행거리가 긴 후방부대용 등 다용도 화살을 만들어 사용했다. 몽골의 군사 기술자들은 일직선이던 전투용 칼날을 휘어지게 만들었다. 날이 일직선이면 한번 공격으로 적병을 치거나 찌르는 것 중 한 가지만 가능한데, 날이 휘어 있으면 일단 치고 나서 베는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올가미도 한 개씩 가지고 다녔는데 적을 잡아 묶거나 말을 매두거나 무거운 장비를 끌 때 사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주머니를 차고 다녔는데 밀납과 활줄, 화살촉을 갈기 위한 줄, 실과 바늘 따위가 들어 있었다. 또 방수가죽부대에 여벌의 옷을 넣고 다니다가 강을 건널 때에는 부풀려서 배처럼 써먹었다. 말꼴을 담는 주머니와 냄비를 가지고 다니는 병사도 있었다. 식량으로는 말린 양고기와 응고한 양젖을 간편하게 달고 다녔다. 이렇듯 가짓수는 많지만 아주 가벼웠다. 그래서 양곡을 실어 나르는 번거로움이 적었다. 또 가족 그리고 가축과 함께 이동하여 보급로가 따로 필요 없었던 것이다.

 

말안장도 높이를 낮추어 말을 탄 병사들이 몸놀림을 자유롭게 했으며, 등자를 사용해 기마병이 말을 달리면서 일어서 몸을 뒤로 돌리고 활을 쏠 수 있게 했다. 몽골 군화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병사의 발을 보호해 주도록 발목부분에 금속판을 붙였으며 디자인도 개선시켜 신발 코를 위로 들리게 했는데, 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일어섰을 때 등자에서 발이 빠져 낙마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결국 그는 중국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대 정복자들, 즉, 알렉산더, 히틀러, 나폴레옹이 차지한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하여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전에 없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르키스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어떠한 폭행도 없이 황금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전략과 전술

 

몽골군의 전술은 흉노와 투르크(돌궐)가 사용하던 방법과 같다.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로서 그들의 화살은 200미터나 400미터 이상 멀리 있는 사람도 쏘아 맞힐 수 있었다. 사슴 무리에 몰래 접근하는 법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정찰조를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사냥할 때에 몰이대형으로 달아나는 야생동물들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법은 적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수 있는 우회기동법을 가르쳐주었다. 몽골군은 침묵 속에서 기수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다가 돌진의 순간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이는 사냥물을 흥분시키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사냥꾼방식이었다. 사냥감을 지치게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기진맥진하게 한 뒤, 포위하여 조직적인 살육으로 끝을 내는 거대한 몰이사냥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만일 적이 완강하게 방어하면 전열을 열어주어 적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가 추격하면서 가능한 많은 도주자들을 베어버렸다. 이렇게 날개모양의 전투대형으로 적을 에워싸는 방법은 오래 전부터 행해져 온 영원불변의 전술이었다.

 

"낮에는 늙은 늑대의 경계심으로, 밤에는 갈가마귀의 눈으로 지켜보아라. 전투에서는 적을 매처럼 덮쳐라." 따라잡기 어려운 기동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던 몽골군은 초원의 늑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가 적이 경계심을 늦추면 다시 돌아와 덮쳤다. 몽골군은 마치 영양과 호랑이를 사냥하듯, 적을 사냥했던 것이다. 또 몽골은 적을 발견하자마자 한 사람이 서너 대씩 화살을 쏘아대면서 돌진한다. 적이 꺾이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면 그들은 자기군사가 있는 곳으로 거짓 퇴각하여 적을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험한 지형의 함정으로 유인하여 전위와 양익에 배치된 몽골의 경기병들이 화살을 날려 적을 쉴새없이 공격하여 적진을 흐트러뜨린 뒤 갑작스럽게 반격을 가하였다. 적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도록 후퇴하면서 통과하는 지역을 약탈하거나 잘 선택된 지점에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줄을 지어 지나가기 시작하면 튀어나와 기습하기도 하였다.

 

"몽골군이 행군할 때는 아무리 작은 부대라도 항상 정찰병을 사방에 파견하여 복병을 조심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약 100-200 km 정도를 정찰하였으며 토착민들을 붙잡아 전투하기에 적합한 장소 및 야영이 편리한 곳 또는 양식 등의 사정을 알아왔다. 또 지휘자의 막사는 항상 높은 곳을 잡고 그 주위에 순찰 경비병을 두었다. 어떤 막사든지 두 필의 말을 밤에도 안장을 풀어놓지 않은 채 만약의 사태를 위해 대비해 두고 그 밖의 말은 방목해 두었다. 막사는 해가 저문 후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여 적의 야습을 막았다." "전투에 들어갈 때는 높은 곳에서 적정을 자세히 살핀 후 유리할 때는 싸우지만 불리하면 싸우지 않았다. 전진을 중지하고서 적정을 잘 정찰하여 약점이 발견되면 고작 백기로서도 1만이 넘는 적을 포위할 수 있었으며 1천기를 가지고서도 1백 리의 간격을 메꿀 수 있었다. 적의 견고한 진을 돌파하는데 전군의 10분의 3을 선봉대로 충당하였으며 적과 부딪치면 삼삼오오로 흩어진다. 한곳에 모며 있으면 포위 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이 흩어지면 이쪽도 흩어지고 반대로 한 곳에 모이면 이 쪽도 모인다."

 

몽골의 경기병 들은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은 재빨리 돌아다니면서 적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적군이 진지를 구축하거나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며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군이 발견하고 공격하려면 재빨리 달아나고 주둔해 있던 자리에서 전열을 정비하려면 어느새 다가와 공격을 퍼부었다. 전열의 맨 앞에 선 경기병들이 적의 기동력을 잃게한 후 중무장한 기병대가 돌격하였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병력수가 많아도 이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만약 돌격부대가 격퇴를 당하면 그 다음 부대가 계속하며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파고든다. 중기병들은 대부분 육박전을 펼쳤으므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긴칼과 창을 꼬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화살로 적의 인마를 주로 살상하였으며 백병전은 가능한 한 피하였다. 이러한 몽골의 경기병과 중기병은 화북을 휩쓸었고 중동과 러시아에서도 위세를 떨쳤다.

 

 

기타 몽골군 보병에 대해서 적의 기병이 쳐들어오면 후퇴해서 수비를 견고히 한 다음 반격하기도 하고, 적이 성안을 지키며 나와 싸우지 않으면 소 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내보내어 적을 혼란케 하였으며, 적이 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책을 설치했을 때에는 기병으로 하여금 활을 쏘아가면서 그 주위를 돌게 하여 적을 피로하게 만든 후 공격을 감행하였다. 지구전도 가끔 써서 적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져 동요하게 될 때 서서히 접근해서 싸웠다. 몽골군의 수가 적을 때에는 나무판자로 흙먼지를 일으켜 대병력인 것처럼 보이게 하며 겁을 먹게 하며 돌격하기도 하였다. 혹은 잠시 교전했다가 식량, 무기를 버려 둔 채 도주하여, 적이 이겼다 생각하고 추격해 오는 것을 이용, 복병이 일거에 역습하였다. 변화무쌍한 전술이며 자기들이 승리했을 때는 철저하게 추격을 감행 몰살하며, 패했을 때는 사방팔방으로 도망쳐 잡히지 않았다.

 

정복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이들이 어떻게 하여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가진 아시아의 강력한 문명 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군사상으로 볼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칭기스칸은 저항하는 자는 최후의 한 명까지 죽여 없앴다. 코라즘전에서 2만명의 몽골별동대는 코라즘샤 무하마드를 쫓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무대로 약1만km의 대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몽골군의 논리는 항복하면 포용, 저항하면 말살이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니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전법은 수많은 무혈입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둘째 그는 미리 정보를 수집하고 지리를 조사하여 면밀한 작전 예정표를 만들어 이에 따라 행동하였다.

 

셋째 그는 군대와 사회를 밀접하게 연결하여 동고동락하는 집단을 만들고 전우애를 바탕으로 야사라는 철의 기율을 요구함으로서 전투력이 극대화되었다.

 

넷째로 병사는 교대 말을 항상 3-4필 준비하였으므로 부대의 기동력이 아주 컸다.

 

다섯째로 그는 실용적 기술을 존중하였다. 몽골 기마군의 활은 팽팽한 활로서 화살의 속력이 빠르고 사정거리가 길어 초원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정착민이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시작하면 별 방법이 없었는데 칭기스칸은 금나라의 기술자들을 잡아 공성무기를 개발하여 포병, 공병, 기갑(기마)의 입체편성을 함으로서 중앙아시아나 중국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여섯째로 몽골군은 진군 중에 다른 유목민을 계속 흡수하여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병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즉, 북 중국에서는 상당한 키탄군대와 한인군대를 추가로 확보하였으며 서방원정에는 위구르와 카를룩 그리고 키탄인이 합류하였고, 한인 공성기술자와 무슬림 기술자들이 성채공격에 동원되었다. 또 항복한 적에게 군량과 병졸을 징발함으로서 수많은 전쟁에서 나라가 피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몽골군에게 전쟁은 다른 사람들을 접수, 흡수하는 시위운동에 가까웠다. 여섯째로 몽골의 적들은 통일된 행동습관이 적어 몽골군에게 각개격파 되었다.

 

정치, 외교력

 

칭기스칸은 거대한 규모로 심리전을 사용하였다. 칭기스칸은 군사적인 승리의 전제로서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였다. 불교도인 쿠출룩을 정벌할 때, 그는 민중들이 무슬림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을 옹호함으로서 해방군으로 행세하였다. 중국적인 문화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전쟁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는 금나라의 강력한 저항은 키탄인에게 몽골과의 민족적 유사성과 여진족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김으로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코라즘에게는 민족적 반목을 이용하였다.

 

 

이미 몽골초원의 전쟁에서 하늘이 자신을 군주로 선정했다고 소문을 널리 퍼뜨려 샤머니즘이 강한 당시 몽골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칭기스칸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서 이들의 도움도 빌렸다. 몽골의 승리만이 상업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기스칸에게 넘겨주었으며 오아시스 주민들에게 저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처참한 학살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을 퍼뜨려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었다.

 

칭기스칸은 무슬림 상인들을 처음에는 첩자로 이용했으며 다음으로는 중재자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신과 지역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지주들에게 멸시 당했던 중국의 상인들보다 지적이었고 자유분방하였으므로, 여러 정복지역 특히 서아시아의 몽골 정복지를 잘 통치하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대외정복보다는 고향인 몽골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관심이 더커서 메르키트와 삼림민을 치고 나이만족의 쿠출룩을 추격하였으며 탕구트를 치려고 서방작전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몽골제국은 아직도 풀 냄새나는 초원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칭기스칸의 여인들

 

칭기스칸은 500명의 처첩을 두었다. 유목민의 사회에서 동맹은 즉 결혼관계로서 칭기스칸에게 복종하여 몽골로 흡수된 부족, 씨족은 각각 딸을 보내 충성을 표하였으며 몽골과 동맹한 종족 역시 우호의 표시로 칭기스칸 家와 혼인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이중 황후라 부를 수 있는 정처로는 4명의 카툰(황후)이 있어 4개의 오르도(이동궁전) 하나씩을 다스렸으며 다른 첩들은 이들 오르도에 흩어져 살았다. 4명의 정처란 대 오르도를 다스리는 보르테-후진, 제2 오르도를 다스리는 쿨란-카툰, 제3 오르도의 에스이-카툰, 제4 오르도의 에스겐-카툰이었다. 칭기스칸에 직속한 친위대는 이 4개의 오르도에 배속되어 칸과 카툰의 신변경비와 일상생활을 돌보았다.

 

정처 보르테는 미녀의 산지로 유명한 콩기라트족 출신으로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 둘째아들 차가타이, 셋째아들 오고데이, 넷째 아들 톨루이를 낳고 쿨란-카툰은 여섯 째 아들 쿨겐을 낳았다. 칭기스칸에게는 또 6명의 딸이 있었는데 각각 큰 부족, 큰 씨족에게 시집을 갔다. 에스겐은 타타르족으로 칭기스칸이 탕구트 토벌 때 데리고 갔다. 그녀의 언니는 에스이였다. 또 그는 케레이트의 이바카-베키, 나이만족의 족장 타양칸의 어머니 구르베스, 탕구트족의 딸 차카, 그리고 금나라 왕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