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요,원,몽고

[2] 몽골제국 - 금나라

자연정화 2018. 6. 29. 15:14

[2] 몽골제국 - 금나라

 

2. 금나라

 

옹구트

 

1211년 3월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치기 위하여 케룰렌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칭기스칸을 주인으로 하고있는 모든 부족장들이 각각 참모를 대동하고 이에 참가하였다. 멀리 서쪽 끝에서 참가한 부족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칭기스칸은 여진인들(금나라)이 그 동안 정기적으로 군대를 보내 몽골족의 장정을 제거해왔고 옛 몽골의 칸들을 말뚝으로 찌르고 나무 당나귀에 못박아 죽인 것을 상기시키고 사랑하는 몽골의 처자와 아이들을 굴비처럼 엮어 노예로 팔아먹은 수모를 갚아야 한다고 하였다. "몽골족의 암바카이칸은 타타르족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금나라로 보내져 죽임을 당했다. 그는 사자를 고국에 보내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달아 없어질 때까지 원수를 쳐 무찌르라고 명하였다." 실제로 금나라는 칭기스칸도 붙잡아 죽이려 했다. 금나라를 도와 타타르부를 격파한 공로로 조공 무역권을 획득한 칭기스칸이 1208년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를 거부한 때였다.

 

그는 몽골인들의 민족적인 감정에 호소하고 약탈의 현실적 기대감을 불어 넣어줌으로서 단결심을 불러일으킨 뒤 높은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영원한 하늘의 권능으로 금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도록 도와줄 것을 빌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어깨에 건 후 땅에 세 번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오 영원한 하늘이여! 저는 모욕적인 죽음을 당한 조상들의 복수를 하기위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제가하는 일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당신의 힘을 내려주소서!" 나흘째 되는 날 그는 비로소 승리의 약속을 받아 하산하였다. 칭기스칸이 신흥 몽골제국의 발전에 걸림돌인 금나라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몽골초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텐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칭기스칸은 있을지도 모를 케레이트족이나 나이만족 등의 반란에 대비하여 콩기라트부의 타후차르에게 2천명의 군대를 주어 고향에 남도록 한 뒤 남은 전 복속 부족민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남하하였다. 칭기스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오고데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자신은 무칼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베데이, 조치-카사르와 막내아들 톨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총 7만명이 케룰렌 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춘 3월에는 눈이 녹아 물을 얻을 수 있고 덥지 않아 대 사막을 건너는 데에는 적합한 때였다. 1211년 5월 칭기스칸은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있는 동맹부족 옹구트 지구에 다다르자 군을 세우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

 

옹구트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에 있었지만 칭기스칸과는 나이만전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부족이었다. 칭기스칸은 1206년의 대대적인 논공행상 때 그들 부족장을 새로운 몽골제국의 고관으로 대접하고 딸 아라가이-베키를 그들 족장의 세자 패요랍한테 시집을 보냈다. 옹구트족은 만리장성의 북방 접근로인 산서성 북부 외곽지대를 지키는 금나라의 파수병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옹구트는 칭기스칸에게 변경지역을 넘겨주고 침공로를 열어주었으며 지원군도 보냈다. 난하 상류에 근거를 가진 키타이 호족 야율아해, 독화 형제도 칭기스칸의 막하에 투신해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키타이족 장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 당시 금나라의 정규군 맹안모극군은 27만명으로 여기에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지만 몽골통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유목군단

 

난하 상류에 도착한 칭기스칸은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고 8월에 옹구트 부장 알라쿠시의 향도로 대청산을 넘은 우익군을 기다려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였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다퉁, 대동)방면으로 공격하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내몽골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 야호령을 향해 진격했다. 금나라는 옹구트가 몽골군에 가담한 줄도 모르고 이 방책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 근처 오사보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나라 군사는 깨끗이 남방에 있는 천혜의 요새 야호령으로 후퇴하였다. 칭기스칸의 대군이 무주를 유린하면서 야호령으로 육박하자 금나라의 최고사령관인 완안승유는 40만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야호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몽골군은 두 군데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하기 전 제베는 몽골 돌격대를 모아놓고 몽골군이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전부터 이들을 박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칭기스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전방의 결사대로서 죽음만이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주는 고향이었다.

 

먼저 몽골의 돌격대가 성난 파도처럼 금나라 군에 뛰어들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다. 금나라 군은 돌격하는 이들에게 불덩이 기름을 퍼부었다. 그러나 불을 끄려고 땅에 구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타고있는 말들이 숯이 되어 넘어질 때까지 달리면서 싸우고 베었다. 이들은 말이 쓰러지자 맨 땅위에서 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나타내거나 울부짖지도 않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러 살육하였다. 금나라 군이 두려움을 느끼고 전열이 흩어져 뒤에 도착하는 금나라 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자, 대 혼란이 일어나 이들을 뒤따라오는 몽골 기마병에게 짓밟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제베는 이들이 질서있게 퇴각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이들을 궤멸시켰던 것이다. 이 살육전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금나라 군사는 몽골군에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이전의 몽골군이 아니었던 것이다.

 

금나라는 다시 완안승유의 지휘하에 제3의 천혜요새인 선평에 대군을 집결시켜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해 무너졌다. 완안승유의 정예군과 몽골군은 회하보라는 곳에서 다시 싸워 금나라군이 전멸되었다. 회하보의 패전은 금나라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다음의 목표는 몽골고원과 중국을 잇는 거용관으로 금나라는 이곳을 사수하였다. 칭기스칸은 이곳 거용관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몰라 무슬림인 자파르를 불렀다. 자파르는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 그는 빽빽한 숲 사이로 외길이 있어 그리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고, 어둠을 틈타 몽골군은 말의 입을 틀어막고 그의 안내를 따라 경계를 무사히 넘었다. 관문의 견고함을 믿고 안심하고 있던 금나라 방위군은 잠들어 있는 사이에 급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1211년 9월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에서 180리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해 10월 칭기스칸의 세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데이도 몽골 별동대를 이끌고 탕구트와 금나라의 육상통로인 산서성 최북단의 대동(서안), 즉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하북성 북부의 선화(당시 선덕)와 보안지역 등 변경지역을 파괴하였다. 칭기스칸은 초기의 승세를 타고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금나라 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몽골군은 성이나 성곽에 대한 공략법이 서툴러 산의 능선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만리장성 돌파가 기병만으로는 쉽지 않음을 알았다. 칭기스칸은 중도의 성벽이 보이는 순간 말머리를 돌렸다. 칭기스칸은 회군하면서 제베에게 요동을 거쳐 고원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제베는 이에따라 금나라의 발상지인 요동의 동경을 함락시키고서 몽골고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의 1차 공격은 탐색전에 가까웠으나 큰 소득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번 싸움에서 중요한 전투부대와 기동력을 잃었다. 금나라의 북변방위와 말들의 관리를 맡고있던 키타이족 군단은 야율아해와 독화 형제의 사전교섭으로 전투다운 전투없이 몽골로 돌아서 그대로 몽골의 천호체제에 편입되었다. 또한 내몽골 초원에 널려진 금나라의 군목감(국영가축사육장)을 습격하여 40만 마리의 말을 끌어가 금나라 군사의 기동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금나라의 기동부대인 이들 집단이 대량의 군마와 함께 몽골로 돌아갔기 때문에 개전 초부터 몽골의 노도와 같은 공세와 금나라의 지리멸렬한 패퇴가 있었다. 칭기스칸의 천호대는 1206년의 95개에서 1227년에는 129개로 되었는데 불어난 34개 천호대의 대부분은 키타이 군단이었다.

 

1211년은 금나라에게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1212년 가을 몽골군은 다시 돌아와 공세를 취하였다. 이번에도 몽골은 많은 지역을 다시 석권하고 중도 다음으로 금에게 중요한 산서 북부의 서경(대동)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서경은 다시 금나라에게 돌아갔다. 몽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하여 공성기법의 전문성과 공성공병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금나라에 적대적인 한족들을 징발하여 해결하였다.

 

키타이의 독립운동

 

몽골-금간의 전투에서 몽골군의 우위는 요동지방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은 또 금나라에 타격을 주었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금나라는 피지배민인 키타이족이 몽골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여 키타이인 1호당 여진인 2호에 끼워 살게 하였다. 의심을 받는다고 느낀 키타이족 약 10만이 1212년 키타이 제국의 왕족이었던 야율유가를 도원수로 하여 요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몽골군에 동맹을 요청하였다. 금나라가 직접 감시하는데 대한 공개적인 반란이었다. 몽골은 즉각 사자를 보내 야율유가와 교섭한 후 쌍방의 대표가 금산에 올라가 백색 말과 소를 제물로 바치고 북쪽을 향하여 활을 꺾는 동맹의식을 행하고 제베가 거느리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여기서 키타이군과 제베의 군사가 합세해서 금나라 요양을 공략하게 되었다. 제베는 계략을 써 후퇴를 가장해서 주위에 복병을 남겨 두어 적이 안심한 틈을 타 일제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1213년 춘삼월 금나라 완안호사는 본대를 이끌고 걸석열환단은 지대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전장은 장춘 부근으로 금나라의 지대는 승리하였으나 본대가 패하여 금나라의 국경은 서북의 옹구트족 쪽과 마찬가지로 동북의 키타이족 쪽으로도 무방비상태가 되었다. 금나라는 패장 완안호사에 대신하여 포선만노를 요동군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그의 부장격이었던 완안철가와도 대립하여 그를 처형하고 나서 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남쪽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에 반기를 들어 대진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불렀다.

 

패전을 계속하는 금나라에 실망한 요동의 여진인은 포선만노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포선만노의 적은 야율유가의 키타이 정권과 금나라의 장군 걸석열환단 이었다. 포선만노는 금나라 군에 밀려 동북으로 후퇴하여 틀어 박혔다. 그후 포선만노 정권은 몽골에게 복속과 반역을 반복하였는데 칭기스칸의 아들 오고데이의 대에 멸망되어 요동에서 여진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한편 야율유가는 무칼리와 함께 케룰렌강 부근의 둔영지에서 칭기스칸을 만났다. 칭기스칸은 야율유가가 의를 따라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그를 요동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를 보좌하는 몽골인 부왕을 두었다. 위구르와 함께 키타이는 몽골에 합류함으로서 몽골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얻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제왕을 칭하라고 권하였으나 신중한 그는 이것을 물리치고 죽을 때(1220년)까지 몽골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따로 자립하였지만 70여일 후 야율유가-몽골 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만리장성 돌파

 

1213년 가을 세 번째의 몽골 침략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칭기스칸은 앞서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대 공세를 펴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였다.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금나라 군이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제베는 중앙 전위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관문입구를 향해 쳐들어가는 척 하다가 곧 자기 휘하부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퇴각하였다. 금나라 병사들은 그가 정말로 퇴각하는 줄 알고 추격해왔다. 유도작전을 위한 위장된 퇴각이었다. 제베는 적의 추격에 걸릴 듯 걸릴 듯하며 추격해오는 적을 멀리까지 유인해 갔다. 그들은 이렇듯 계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히 추격해 왔다. 이때 퇴각하던 제베의 전위대가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 그 뒤쪽에는 칭기스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본대가 돌격해 왔다. 적의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쌓였다.

 

적을 완전히 소탕한 몽골군은 회래에서 거용관까지의 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즉 그해 7월부터 8월에 걸쳐 화산으로 둘러싸여 노란 바람이 부는 광활한 일대를 지키는 요새도시 선화를 점령하였다. 여기서 다시 남동쪽으로 요새화된 보안을 톨루이를 공격군의 선발대로 하여 크게 이겼다. 이로서 장가구와 북경을 연결하는 길을 장악하게되어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몽골군은 장가구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손에 넣었고, 위녕성의 방위를 지휘하던 유백림도 투항하였다. 몽골은 선덕에서 승리한 것을 시초로 덕흥을 부수고 거용관의 북쪽입구에 육박하였다. 금나라는 칭기스칸과의 협상을 위해 칭기스칸을 알고있던 키타이인 석말령안을 보냈으나 그는 몽골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거용관에는 인적도 드물고 대낮에도 어두운 22킬로미터의 산길이 뻗어 있었고 길 양편에는 험준한 산의 절벽인 천연적인 요새에 인공적인 성곽이 연결되었다. 이 장성의 아래쪽에는 금나라 병사들이 그 동안 문을 철제로 하고 지면에 장해물을 설치하는 등 정예부대가 방위를 하고있었다. 당시 금나라는 12만 명 정도의 여진족 기병과 약45만 명의 한족 보병으로 구성된 거의 60만 대군을 보유하였고, 몽골 침공군의 병력은 다른 부족의 지원병 약 1만 명을 포함하여 6만 5천 명 정도였다. 몽골병사는 그곳에서 제지되었다.

 

칭기스칸은 거용관의 견고함을 보고 작전을 변경하였다. 즉 한 부대를 거기에 머물게 하여 감시시키면서 자신들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 비호령을 넘은 뒤 자형구, 역주를 부수었다. 이후 칭기스칸은 제베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소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하게 함으로써 남북양쪽에서 협격하여 거용관을 함락시켰다. 칭기스칸은 탁주로 내려왔다. 칭기스칸은 탁주를 취한 후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고 군사를 세방면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데이의 세아들은 우익군, 동생 카사르와 테무게-옷치긴은 좌익군, 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였다.

 

화북유린

 

 

몽골의 우익군은 보정에서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성을 남하하였다. 이들은 하남성 북쪽에서 황하에 부딪치자 태행산맥의 남단을 서쪽으로 돌아 산서성으로 나왔다. 물론 이들은 그 근처 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하였다. 이후 금나라의 중요한 거점인 고북고와 대동 등을 점령하였다. 대동은 만리장성이 두 줄로 되는 곳 중간에 있는 해발 1300미터의 성곽으로 산서성을 지키는 요지였다. 이 도시는 옛부터 공략할 자가 없었는데 몽골인 특유의 병법에 의해 무너졌다. 이들은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 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

 

중군은 전투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화북평원의 입구인 용호대에 진을 쳤다. 그들의 진지 앞에는 북경에서 남경까지 800 km 이상의 넓은 경작지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지고 전방 약 30 km 쯤 되는 곳에는 궁전과 탑들이 바라다 보였다. 중도는 당시 거대한 금나라의 수도로서 길이 43 km에 이르는 성벽과 해자로 둘러쳐져 있었으며 금나라 군사 60만이 몽골군 7만 5천과 대적하였다. 중군은 중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중도는 너무나도 견고한 성곽도시였으므로 이것을 쳐부술 만한 장비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칭기스칸은 이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는 그저 포위한 채 막사를 치고 이 막사에 소수병력만 남겨둔 채 주력인 기병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이 작전은 하나 하나의 성시에 응하지 않고 몇 갈래로 나뉘어 질풍과 같이 다가와서 휩쓸고 돌아가면 곧 다음의 지방으로 사라지는 약탈만을 한 것이다. 화북의 대 평야로 진격해 간 그들 몽골기병은 그곳 끝없는 벌판에 경작된 논밭의 곡식을 짓밟고 불을 질러 태워 없애 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논밭 주위에 늘어서 있는 모든 농가도 불살라 버렸다. 중도 남서쪽의 보정으로부터 하남성의 북쪽에 이르는 500 km 이상의 평원을 완전히 유린해 버린 것이었다. 칭기스칸은 하북과 산동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을 취하고 제남을 함락시켰다.

 

성곽도시 공략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잡은 포로 또는 그들 백성들을 선봉대 앞에 세워 돌격하는 수법을 썼다. 종대로 돌격해 들어오는 몽골군 앞에 내세워진 자기들 군사와 백성에 대하여 차마 무기를 들 수가 없어 대부분의 성곽이나 도시가 모두 함락되었다. 이들 기병의 유린에 견딜 수 있었던 곳은 고작 하북의 진정과 대명을 비롯한 몇 안되는 요새화된 도시뿐이었다. 그들은 산동성의 남쪽끝인 북위 35도선까지 병력을 몰았다. 그것도 황하에 부딪쳐 기병만 가지고서는 해협과 같은 이 넓은 강을 건널 수 없어 그 정도로 끝내게 되었다. 이 결과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 즉 중도는 고립되었다.

 

좌익군은 발해만을 따라 영평과 요서의 문턱으로 향하여 산해관에서 내륙 쪽 여진족의 발상지인 만주의 북부 즉 흑룡강 및 송화강 일대를 평정하였다. 이후 칭기스칸은 막대한 전리품을 안고 만리장성 쪽으로 돌아갔다. 이들 몽골의 뒤에는 금은보화를 비롯한 고급 견직물을 실은 수레가 따랐으며 그들의 말과 가축의 떼는 물론 수만 수천의 소년 소녀가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다.

 

이렇듯 칭기스칸이 크게 승리하자 금나라에서는 자체 내부에서 붕괴할 징조가 나타났다. 송과의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던 여진족장군 호사호가 북방 변경군의 지휘를 맡게되었는데, 1213년 8월 그는 비밀리에 금나라 수도로 돌아와 궁정반란을 일으켜 영제를 암살하였다. 그는 몽골군이 중도를 압박하고 있는 사이 영제의 조카 오도보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금나라의 이와 같은 혼란을 틈타 칭기스칸은 그해 가을 그들의 수도인 중도에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이때 패전장군 술호고기가 도망하여 중도로 돌아갔으나 호사호에 의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그가 위소왕을 살해했다고 폭로하였다. 오도보는 그의 패전을 용서한 다음 좌부원수로 다시 세우고 이어서 평장정사(재상)에 임명하였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 1214년초 칭기스칸은 몽골 좌익군과 우익군을 합류시켜 중도 북쪽교외에 둔영을 치고 중도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칭기스칸의 막료들이나 병사들은 곧장 돌격해 들어갈 것을 바라고 있었으나 칭기스칸에게는 뾰족한 공성수단이 없었다. 금나라의 치열한 반격으로 포위기간이 길어지자 몽골군은 식량이 동이나게 되어 굶주리게 되었으며 질병이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칭기스칸은 부족몰살에 가까운 참담한 정황을 침착하게 감추며 화친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칭기스칸은 "그대가 갖고 있던 산동과 하북의 군현들은 이미 모두 나의 땅이 되었다. 이제 그대는 오직 대도만을 붙들고 있다. 하늘이 마침내 그대를 쇠약하게 하시거늘, 나마저 그대를 궁지로 몰아버린다면 하늘이 무어라 하겠는가. 나, 이제 그만 군사를 거두려 하니, 그대는 우리 병사에게 먹을 것을 주어 우리 장수들의 분노를 달래 줄 수는 없는가"하였다. 금나라의 평장정사 술호고기는 "들으니 적의 병사도 말도 피로하다고 합니다. 이때를 타서 결전합시다."라고 하였지만 도원수(군사령관) 완안복흥은 "우리 군의 병사는 너무 급히 모아서 군인정신이 없습니다. 병사는 수도에서 군무에 응하나 가족들이 시골에 있어 신경이 모두 그쪽에 가 있습니다. 싸워서 진다면 새나 짐승과 같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운이 좋아 이긴다고 해도 처자의 곳으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누가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이래서는 결전을 할 수 없습니다. 숙고하여 사자를 보내어 강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군이 물러가면 뒤의 일을 다시 생각합시다"라고 하였다. 사나운 적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있는 황제 오도보로서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몽골에게 공물로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그녀를 지키기 위한 장정 10인 졸개 100인, 동남동녀 500인을 붙여왔으며 비단옷 3000벌, 말 3000마리를 보내왔다. 몽골군은 군사를 되돌리고 완안복흥은 그들을 거용관 밖까지 전송하였다. 정복자는 전리품을 갖고 장가구 지방을 거쳐 내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다. 칭기스칸의 계획은 금나라의 전멸이 아니고 군사상의 위협을 없앰과 동시에 경제상의 지원을 약속시키는 정도였다. 이 공물은 이후, 매년 세폐로서 보내게 되었다. 이로서 금나라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쇠퇴하였다.

 

중도의 고립과 함락

 

몽골군사들이 이 선물을 받고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가자, 금나라 황제는 비로소 안도하였다. 우선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일을 모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그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몽골군이 떠나자마자 금나라 황제는 중도(연경)가 유라시아 초원과 너무 가까워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휴전을 성립시킨 2달 후인 6월 그는 중도를 버리고 황하로 가로막혀 있는 하남성의 개봉으로 서울을 옮김으로서 천연의 요새인 황하에 의지한 셈이었다. 중도에 남아 지휘하는 자는 완안복흥과 석말진충이었다. 완안복흥은 승상과 도원수를 겸하고 정치, 군사의 최고책임자였으나 군사면은 이전에 서경을 몽골의 맹공에서 지켜낸 석말진충에게 일임하였다. 그는 평장정사(재상), 좌부원수란 직함을 가졌다.

 

 

천도에 대하여 금나라의 마지막 같은 인상을 받자 금나라의 무골들은 집단항명을 하였다. 오도보의 행렬이 중도 남쪽부근의 양향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하던 금나라 군대중 키타이-여진족의 군사들이 그를 버리고 몽골편에 붙어버렸다. 이들은 중도를 공격함과 함께 칭기스칸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집단 투항하였던 것이다.

 

금나라의 천도는 두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칭기스칸은 노하여 1214년 가을 사무카와 석말명안의 총 지휘하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완안복흥은 개봉에 위급을 고하였다. 몽골군의 진군이 알려지자 많은 성밖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난하였다. 몽골의 전위 특수부대원들은 중국인 농부로 가장한 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달려왔다. 말들이 달리다 지쳐 쓰러지자 마지막에는 걸어서 중도로 들어가는 피난민 대열에 섞여 성문 앞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성문 앞에서 삼엄한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군량을 가지고 오던 금나라의 증원군이 중도와 하간 사이의 패주에서 몽골군의 습격으로 격파되어 흩어지자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중도는 식량이 동이나 인육을 먹는 형편이 되었다.

 

이윽고 몽골군이 중도로 접근하자 성문은 닫히고 파수병들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성안의 몽골 특수부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민가에 금나라 군의 방어용 무기인 살상용 불기름으로 불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몽골군이 이미 시내까지 들어와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내의 이곳 저곳에서 시커먼 불기둥이 타오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은 관가와 저자거리를 털기 시작하였다. 병사들도 자리를 이탈하여 약탈과 강도, 강간, 살인에 끼어들어 중도는 생지옥이 되었다. 절망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자결해버렸으며 석말진충은 부하를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들어갔으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키타이 출신인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당시 장성의 건너편 드론-노르 호수가의 환주에서 더위를 피하며 머물던 칭기스칸은 자신의 양자인 시기-쿠두쿠를 보내 성내의 재물을 환수케 하였다. 그 뒤 중도는 한달 동안 약탈이 허용되었으며 수천 명의 주민들이 죽고 도시전역이 화염 속에 소멸되었다. 당시 몽골인은 도시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금, 은, 보석의 약탈과 살육, 방화 등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던 것이다. 10세기의 키타이나 12세기의 여진인은 최소한의 살육으로 왕조를 계승한 후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칭기스칸의 몽골인들은 무제한적 파괴만 있었다.

 

지금까지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약탈전과 복수전의 성격을 띠어, 노예와 가축과 재물을 얻기 위한 유목민의 전투였다. 그러나 이제 키타이와 한족출신 참모들의 영향으로 전쟁목적은 수정되었다. 칭기스칸은 금나라 황제에게 함락된 모든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아직 함락되지 않은 하북과 산동의 모든 지역을 바칠 것과, 황제는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하남 왕일 것을 명령하였다.

 

황하의 북측지역은 무정부상태로 되어 대소의 무장세력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또 중앙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던 지방의 군단들은 독립 군벌로 변해갔다. 금나라의 고향 만주는 연락이 끊어져 속속 몽골에 집단 투항하였으며 몽골은 내몽골 초원과 예전 키타이의 연운16주를 손에 넣었다. 금나라의 영역은 이제 그 새 수도인 개봉 일원을 중심으로 섬서성의 일부 요새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하남과 협서를 가진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몽골은 아시아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

 

칭기스칸은 이어 금나라의 왕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가 천도한 새로운 서울 하남성의 개봉까지 점령하려고 사무카를 보냈다. 그러나 개봉은 황하가 앞을 지켜 몽골의 기병으로는 정면공격할 수가 없었다. 사무카가 이끄는 몽골의 대부대는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협서성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1216년 말부터 1217년의 겨울 사무카의 몽골 대군은 중국의 로마라는 서안과 동관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이곳은 황하와 위수가 합류하는 관문으로 2,700미터 높이의 험준한 화산이 그 입구를 막고 있어 화산 밑의 좁은 계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 사무카는 다시 군대를 이동시켜 낙양방면으로 갔으나 절벽 등 험로로 해서 진군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쪽의 고산으로 빠져 낙양의 남쪽 성곽을 점령한 후 개봉남쪽에 있는 평야로 진출했다.

 

이로서 금나라는 많은 병력을 모아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개봉전방 4킬로미터 지점에서 그들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황하가 얼어 먼길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강을 건너 회군하였다. 금나라는 이때부터 몽골군이 확보하고 있던 북경지역을 제외한 여러 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였다.

 

한편 무칼리는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그것은 키타이인 석말야선이 여진족의 발상지에 가까운 요동의 동경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칭기스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석말야선은 무칼리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게 되었고, 동경은 1215년 경기병의 급습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또 석말야선은 북경성의 방위를 위해 새로운 지휘관이 임명되어 부임해 오고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단 2명의 기병을 데리고 신임 지휘관을 도중에 급습하여 죽인뒤, 그의 임명장을 빼앗아 성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조정에서 새로이 임명한 지휘관이라고 하였다. 그는 초병들을 철수시키고 새로운 군관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무칼리는 무혈입성하여 10만 8천을 헤아리는 민호와 10만명의 병사, 그리고 수많은 군량과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어서 오고륜, 인답호 등을 비롯한 47명의 장군들 및 32개의 성읍이 투항하였다. 이로서 무칼리는 투항한 키타이족 및 여진족, 한인 무장 군벌들을 앞세워 지방자치와 같은 분할통치를 실시했다.

 

국왕 무칼리

 

1211년부터 15년까지 해수로 5년에 걸친 금나라 침략은 몽골인에게는 거국일치의 전쟁이었다. 몽골제국 성립 후 이 작전으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대몽골국(에케-몽골울루스)의 백성이란 의식을 갖게되었다. 잡다한 유목민들을 모아 원정 6년 동안 단체생활을 통해 이들 유목민들이 몽골이라는 공통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 자체 기술개량은 물론 선진기술 도입, 외국인기술자 활용을 통해 전쟁관련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즉, 몽골군은 투항한 금나라 야전군에게서 투석기나 대포, 초보적인 로케트 등 선진 공성 기술을 전수 받음으로서 코라즘 원정 때에는 한 차원 높은 전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칭기스칸의 금나라 원정은 1211년에 시작되어 짧은 휴지기가 있었을 뿐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1227년), 그의 후계자 시대에 이르러서야 결말이 났다(1234년). 그 주된 이유는 몽골군은 기동력 있는 기병들로 지방과 무방비상태의 도시들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났으나, 중국인 공병들이 지키는 성채를 빼앗는 기술은 오랫동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중국원정을 초원에서처럼 수행하였으니, 계속 공격하고도 전리품만 갖고 철수했기 때문에 금이 도시를 재점령하고 갈라진 성벽과 보루를 수축하여 요새를 재건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은 어떤 요새는 두세 번 다시 점령하여야 하였다. 몽골군은 적을 대량으로 학살, 추방하거나 집단적으로 징집하였는데 학살된 자들보다 그 자리를 차지할 주민들이 항상 넘친 북 중국에서는 대량학살이 별 효과가 없었다.

 

똑같은 군사행동을 거듭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칭기스칸은 중국에 있어서의 군사행동 일체를 무칼리한테 일임, 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1217년의 가을 그에게 국왕칭호를 내렸다. 칭기스칸은 금나라와 싸울 때 변절한 한족을 동원하고, 금나라에 밀려난 키타이족 무장집단의 자발적인 협력이 있으면 많은 몽골기병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대한 뒷일을 국왕 무칼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칭기스칸은 원래부터 정착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으며 그보다는 초원의 유목민인 투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제 칭기스칸은 투르키스탄 정복을 위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그가 떠난 뒤로 그의 장군들은 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금나라를 붕괴시키지는 못하고 지구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북중국에는 한인이 인구도 많고 경제, 문화면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213년 몽골의 침입에서 한인 사씨일족이 몽골측에 가담하였다. 한인을 자기편으로 둘려고 하는 외교전의 승리자가 몽골제국이었다. 몽골군이 북중국에 침입하자 지방 유지인 사병직은 가족을 모아 상담하였다. "국가는 소란상태에 있는 이때 우리 가족 100명은 어떻게 자위할 수 있는가. 몽골은 항복하는 자는 벌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므로 귀순하자." 그는 같은 마을의 노인과 어린이 수천 명을 데리고 칸의 군영을 찾았다. 사병직은 노인이었으므로 장자 사천아가 일족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근에서 참가한 자들이 십 여만 가구에 이르렀다. 사씨 일가는 대대로 의리를 중히 여기고 재산을 가볍게 보는 것을 가훈으로 하여 토착민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었다. 사천아의 모집에 응하여 1만명의 젊은이가 모였으므로 이것을 의용군으로 조직하여 몽골군에 협력하게 하였다.

 

사천아는 칭기스칸을 배알하여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을 때 칸은 모두 동의하였다. 또 그때 무칼리가 국왕이란 칭호를 받아 대금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몽골 중로군을 지휘하였다. 사천아는 그에게도 한마디하였다. "지금 중원은 거의 평정되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가는 곳에는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왕자다운 사람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죄를 사하는 뜻에 반한다. 또 국왕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천하를 위하여 횡포한 것을 없애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아서는 횡포를 가지고 횡포에 답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인민을 귀여워 해주는 것은 왕자의 책무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몰락은 빠르다." 이후 사천아는 항복해온 금나라 장군의 배반으로 살해되어 동생인 사천택이 뒤를 이었다. 사천택은 칭기스칸 이후에도 오고데이나 쿠빌라이에 봉사하여 몽골의 중국지배에 힘을 바쳤다.

 

되돌아보면 금나라는 정예군단만 해도 최하 50만을 거느린 정착문명의 제1 대국이었고 몽골제국은 그때까지 겨우 10만의 기마병뿐이었다. 게다가 여진인인 금나라는 겨우 100년 전에 정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렵민의 피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에 익숙치 못한 몽골인들은 중국인 공병들의 기술뿐 아니라 여진족 전사들의 용맹함에도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나라군은 자기들이 주둔한 곳만을 무대로 했고 몽골군은 전력을 아껴가며 금나라 군대의 일부를 선택해 싸웠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것과 뻔히 고정된 것의 싸움이요 맹수와 집짐승의 싸움이었다.

 

1216년 고비북쪽으로 돌아온 칭기스칸은 몽골군을 둘로 나누어 한 부대를 이끌고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참모장격의 야율아해는 칭기스칸과 같이 서쪽으로 가고 동생인 야율독화는 무칼리의 부장이 되어 동쪽으로 각각 나뉘었다. 칭기스칸은 잘라이르족 출신의 노장군 무칼리에게 태사, 국왕의 칭호를 주어 5투하라고 부르는 5개의 유력 부족집단 (잘라이르, 콩기라트, 이키레스, 우르우트, 망구트)을 위시하여 좌익중 24개의 천호와 새로 편성된 키타이군 20개의 천호를 배속시켜 중국방면을 위임하였다. 몽골 정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인 2만 3,000명이고 나머지는 같은 수의 키타이계 보조병이었다. 무칼리는 부족한 이들 병력을 이끌고 1217년에는 칭기스칸이 점령하지 못한 하북 남부의 거점 대명을 일시 탈취하였다. 또 1218년에는 산서의 도읍인 태원과 평양을 금으로부터 탈환하였고, 1220년에는 산동의 도읍인 제남을 탈환하였다. 그해 그의 부장은 황하 북부에 있는 하남성 창덕을 점령하였다.

 

무칼리는 1221년에 보안, 부주를 비롯한 섬서북부의 도시들을 빼앗고, 1222년에는 위수 남쪽 섬서의 옛 도읍 장안을 손에 넣었다. 1223년에 그는 황하 만곡부와 산서의 남서쪽 끝에 있는 중요한 요새인 하중(포주)을 기습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기진하여 사망하였다. 무칼리는 중국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부터 기병 외에 보병, 포병을 고용하여 조직적인 점령에 힘을 기울였으며 122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몽골에 대한 탕구트와 금나라의 대규모 저항을 막아내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7년 동안 끊임없는 전쟁 끝에 그는 금나라를 다시 하남성에 가두었다. 그가 죽은 뒤 하중은 다시 금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인구가 과밀하고 천연의 요새로 꽉 들어찬 북 중국의 전투는 끝없는 공성전으로 변질되었다.

 

고려침공

 

칭기스칸의 몽골군에 밀려 금나라가 오금을 펴지 못하자 100년이 넘게 금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던 키타이의 유민들이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요양을 차지하고 금나라에 맞섰다. 금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키타이족이 살길을 찾아 고려로 몰려들면 잡아서 금나라로 보낼 것, 자국의 군사를 출동시켜 이들을 공격하였는데 양식과 말이 모자라니 고려에서 빌려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금나라는 연이은 전쟁과 흉년으로 식량이 모자라 고려에 와서 곡식을 사갔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엄중하게 막고 있었다. 고려는 요구를 거절하는 뜻으로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이제 고려와 금나라는 동지도 아니었고 군신관계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드디어 1216년 몽골과 금나라 양쪽에서 쫓기던 키타이 유민 9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키타이인들은 처음에는 곡식과 살 터전을 요구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침입한 것이었다. 키타이 유민들은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이들은 산과 들에서 지내며 매우 굶주렸던 터라 지나오는 고을에서 곡식과 가축등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이들은 별다른 방비도 하지않은 평안도 일대로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다. 이때에야 고려 최씨의 무신정권은 별초군 100명과 신기군 40명을 보내 지방군과 합세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키타이 유민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고 들어와 경기도 일대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묘향산으로 들어가 유서깊은 보현사를 불태우는 등 방화, 약탈을 저지르다 고려군에 쫓겨 가족들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그 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서경과 황해도 주변에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키타이 유민군이 개경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최충헌은 일부군사만으로 시가지 방위를 담당하게 하고 수만명의 군사를 자신의 집을 방어하는데 돌렸다.

 

 

개경주위로 침투한 키타이 유민군은 작은 규모로 개경에 들어오기도 하였고 남쪽으로 내려가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제천까지 진출하였다.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이들은 박달재로 후퇴하였다. 고려군은 박달재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키타이 유민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도망쳤다가 고려군이 계속 추격하자 함흥 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의 근거지는 간도지방과 두만강아래 함경도 땅이었으므로 고려군은 추격을 멈추었다. 이들은 다음해에 또 침입하여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하였다. 고려는 조충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삼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고려군은 키타이 유민군을 황해도 서흥에서 격파하고 대동강 언저리에 있는 강동성까지 추격하였다. 고려군은 이들의 유격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키타이 유민군은 강동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사태를 지켜보던 몽골장군 카치운이 몽골군 1만과 동진군 2만을 이끌고 키타이 도둑을 몰아내겠다고 큰소리치며 고려로 들어왔다. 두나라 연합군은 맹산, 순천 등의 성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강동성으로 나왔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길이 막혔다. 카치운은 강동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려군 원수 조충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충은 군사 1천명을 딸려 쌀 1천섬을 실어 보냈다. 카치운은 뒤이어 강압적으로 고려군사를 더 보충하라고 하였다. 김취려는 정병을 이끌고 갔는데 카치운은 이들에게 칭기스칸에게 절하게 하고 김취려와 조충에게는 형제를 맺었다. 다음날 아침 세나라 연합군은 강동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키타이 유민군 총지휘자인 함사는 목을 매었으며 군졸과 아녀자등 5만이 나와 항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2년 5개월 만에 키타이 유민군의 소란은 끝났다. 카치운은 키타이의 책임자 100여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200여명과 키타이 부녀자등 700여명을 고려에 주고 나머지는 몽골로 데려갔다. 카치운이 서둘러 몽골로 돌아간 것은 칭기스칸이 서역원정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투를 치르면서 몽골군은 정복국에서 으레 벌이는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고 개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는 일도 삼갔다. 아무리 세계 최강의 군대라지만 1만명의 군사로는 고려군을 당하기에는 벅찼을 것이다.

 

삼림민의 소탕

 

칭기스칸은 1216년 자신의 숙적이던 메르키트족 톡토아의 동생 호두가 부민들을 모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본토로 돌아왔다. 1217년 메르키트족에 대한 출정 준비가 완료되자, 그는 수베테이와 토쿠차르에게 메르키트족을 전부 죽여버릴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패배한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이어서 삼림민이던 호리-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코르치는 자신의 예언대가로 칭기스칸으로부터 투마트족 출신의 미녀 30명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투마트족 정벌에 나섰으나 거기서 거꾸로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칭기스칸은 삼림민의 행태를 잘 알고있던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를 보냈는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되자 칭기스칸은 보로쿨을 보냈다. 그는 본대와 떨어져 앞서가다가 밤중에 투마트초병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

 

분노에 찬 칭기스칸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보로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되르벤족 출신의 한 장군을 뽑아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영원한 하늘에 대해 기도를 올린 뒤 출정시켰다. 투마트족은 잔치를 벌이던 도중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투마트족 수령의 둔영에 잡혀있던 코르치와 쿠두카는 풀려나게 되었다. 코르치는 약속대로 30명의 미녀를 차지하였고, 쿠두카는 투마트족 수령의 부인인 보도쿠이-타르쿤을 차지하였다. 또 100명의 투마트인이 보로쿨의 장례식에 바쳐졌다.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시 몽골군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한 키르기즈족등 삼림민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칭기스칸은 큰아들 주치를 보냈다. 주치는 쿠두카가 오이라트가 있는 곳을 안내하자 시크시트에서 그들을 복속시켰다. 그뒤 주치는 오이라트, 부리야트를 비롯한 다른 삼림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키르기즈도 굴복시켰다. 복속한 부족의 수령들은 충성의 표시로 하얀 말과 하얀 매 그리고 검은 담비털을 가져왔고, 주치는 오이라트와 키르기즈의 수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칭기스칸은 쿠두카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들들에게 황녀들을 아내로 주었고 주치에게는 삼림민을 주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나의 큰아들이여, 너는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일을 아주 잘 끝냈다. 너는 행운의 삼림민들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말과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카라키타이 정복

 

칭기스칸의 적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이만족 타양칸의 아들인 쿠출룩이었다. 그는 이르티쉬 강가에서의 패전이후 고향땅인 알타이에서 아버지와 백성들을 잃자 메르키트의 잔당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으로 갔지만 위구르의 이디쿠트인 바르축에게도 몰려 카라키타이의 군주 구르칸에게로 도망쳤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칭기스칸 침입 이전에 서위구르, 카라키타이, 코라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구르는 톈산(천산)산맥 동쪽의 동 투르키스탄에, 카라키타이는 탈라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코라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 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라키타이는 중국의 키타이가 1125년 멸망한 후 키타이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투르크)계 칼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쿠출룩은 구르칸의 신임을 얻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부인의 영향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궁정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야심도 늘어가자 그는 몽골고원에 흩어져버린 자신의 부족민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카라키타이에 조공을 바친 코라즘의 술탄 무하마드가 구르, 가즈나, 호라산, 이라크, 그리고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정복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자 더 이상 조공할 것을 거절하고 쿠출룩과 함께 동서에서 동시에 구르칸을 공격하여 카라키타이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1210년 코라즘이 적대행위를 하자 카라키타이는 거세게 반격하여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다. 그사이 이리 지역에서는 쿠출룩이 반란을 일으켜 페르가나의 우즈겐에서 국고를 약탈하고 카라키타이의 수도 발라사군으로 진격하였다. 쿠출룩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술탄이 카라키타이의 군대를 크게 이기자, 구르칸에게 봉사하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1211년 구르칸은 기습을 당해 쿠출룩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2년간 장인의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후 실권을 차지한 쿠출룩은 국경문제로 코라즘과 대결하게 되었다. 쿠출룩은 나이만 잔당을 모아들여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쿠출룩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 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몽골국에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카라키타이의 이러한 소식에 칭기스칸은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는 몽골에게는 위험인물이었으므로 처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갓 불교도가 된 그는 이슬람 신도들을 증오하여 신자들을 박해하고 공개적으로 예배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호탄의 종교지도자인 알라웃딘을 마드라사(종교학교)의 문에 십자가로 처형하였다. 1218년 제베의 지휘하에 2만 명의 군대가 쿠출룩이 머물던 카쉬가르 근교에 나타났다. 발라사군과 오늘날의 세미레치에 지역은 아무런 저항없이 몽골군에 투항하였다. 제베는 군대를 가장 엄격한 기율로 통제하였으며 모든 약탈을 금하였다. 제베는 주민들에게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좋고 자기 선조들의 믿음을 따를 수 있다는 칭기스칸의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동안 종교적인 박해를 받고 무거운 세금 속에서 신음하던 토착민들은 몽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쿠출룩은 파미르 쪽으로 달아났으나 파미르 산속에서 제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사리콜 강 부근에서 살해되었다. 제베와 자파르-호자가 쿠출룩의 머리를 매달고 각도시의 성문에 다다르자 주민들은 환영하였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지역, 즉 이리, 이식쿨, 추, 탈라스 지역은 몽골에 합병되었다. 쿠출룩 원정의 결과 몽골인들은 코라즘의 술탄군대와 직접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제 아시아내륙은 동부의 몽골, 서부의 코라즘 두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몽골은 금나라의 키타이 족으로부터 중국지배의 시야와 의욕을 갖게 되었고 카라키타이의 키타이 족으로부터는 중앙아시아 서쪽지방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카라키타이를 점거함으로써 몽골리아와 현 이란 북동부 오아시스 지역인 코라즘 간의 교통이 한결 수월해져 페르시아의 정착사회 문물이 유입되게 되었다. 키타이인들은 군사, 정치면에서 몽골의 교사로서 새로운 몽골이 되었다. 즉 순 몽골족에게 동서 키타이라는 신 몽골족이 더해져 몽골군은 코라즘 샤국에 침공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