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 후기 ~ 신석기의 온도·해수면 변화
해수면이 변화하는 것은 ‘빙하의 형성 - 붕괴’가 이동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해수면의 상승은 빙하가 형성되는 비율보다 융해되는 비율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1만 년만 나와 있는데, 그 이전의 2만 년 ~ 1만 8천 년 전이 가장 낮은 깊이로 120m 정도 내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2만 년 전 ~ 1만 년 전의 기간은 낮은 온도가 계속되고 있어서, 해수면이 더 낮았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위 그래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만 1천 년전 바닷물의 급격한 상승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부근만 생각한다면, 이때부터 황해 자리에는 강이 급격히 불어났을 것입니다.
2만 1천 년 전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1만 1천 년 전까지 최소 1만 년의 기간 동안 황해는 우리나라 전체 크기보다 큰 면적의 대평야였습니다. 왜냐하면 황해는 대부분이 40미터 미만의 대륙붕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 그야말로 산 하나 없는 지평선만 계속되는 평야였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특징은 집단 농경생활과 돌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바닷물이 엄청난 속도로 한반도 서쪽을 흐르는 대한 운하를 거슬러 올라오기 전까지 그들은 대한강 서쪽의 넓은 초원에서 사냥을 했을 것이며, 대한강 동쪽의 평야에선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얕은 바다에선 고기를 잡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위치는 어쩌면 현재의 황해의 가까운 바다 밑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강원도와 충청도, 제주도에서만 신석기 초기의 흔적이 발견되는 이유일 지도 모릅니다. 황해의 경우, 평균수심이 40미터 정도, 가장 깊은 곳이 80미터입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많은 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만년전부터 7천년전까지의 3천 년 간을 비교적 안정된 해안선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평야보다 몇 배 넓은 면적의 평야가 남아 있는 황해 평야와 새로 생겨난 태고의 황해, 시대에 따라 발달되었을 물·불·돌을 다루는 기술로 크고 작은 나라들이 번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도 넓이의 갯벌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고요 ... 이 때에는 전설의 섬 이어도도 15미터 정도의 높이를 가진 돌섬이었습니다.
이후 7천 년 전부터 5천 년 전 사이, 또다시 해안선의 상승이 일어납니다. 이 때 이미 이어도는 눈에 보이기 어렵게 됩니다. 이후 가뭄과 홍수가 되풀이되는 기상이변의 시대가 지나 단군조선과 요임금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유적으로 추정 가능한 연대는 어떨까요 ... 지금부터 시대순으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 이 시기의 유적 및 유물들
이 시기의 한반도를 비롯한 황해 주변, 만주의 유적들을 살펴봅니다.
2만 2천여 년 전 하얼빈 염가강 유적
* 1982년 발굴
* 후기 네안데르탈인 (하얼빈인) 유골 발굴
* 맘모스, 털코뿔소, 야생말 등 여러 동물들의 뼈로 쌓은 반원형의 벽
* 나무와 결합하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석기 발굴
시베리아의 프리지촌, 지리사비지 유적, 강택유적, 막그다와 유적, 매이진 유적 등 여러 곳에서 짐승뼈 주거지 발굴
2만 5천 5백 ~ 1만 8천 5백 년 전 전남 장흥 신북유적
* 2003년 발굴
* 좀돌날 석기를 위주로 한 유물 3만 점, 석기 공방, 마제석기 20여 점 출토
* 화덕자리 다수 발굴
* 끼움날 도구를 빈번하게 사용
* 수정, 흑요석 도구 발굴
* 4만여 평 이상의 규모
* 거주지, 공방, 부엌, 사냥터가 구분된 대규모 살림터로, 발굴 당시 세계 고고학사의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
1만 8천 년 전 압록강 유역 단동전양인 유적
* 1981년 발견
후기 구석기 요령성 남부 해성 소고산 유적
* 1981년 발견
* 요동반도 심양 남쪽 산지의 구릉에 위치
* 돌조각, 돌도끼, 찍개 등의 각종 석기 1만여점과 뼈바늘 3점, 작살, 창끝 등 마제골기 출토
1만 8천 년 전 주구점 산정동인
* 1933년 발견
* 거주지, 창고, 묘지로 주거공간 구분
* 8명의 인골 화석 발굴
* 뼈바늘, 구멍을 뚫은 장신구 발굴
1만 7천 년, 1만 5천 ~ 1만 2천 년 전 충북 청원군 오산면 소로리
* 1994년, 오창산업과학단지의 지표 조사 중 발견
* 원시 볍씨 다수 종 출토 (Indica/Japonica 분리 이전)
* 타제석기, 당시의 기후를 알 수 있는 오리나무, 느릅나무, 벼와 관련된 곤충 등 발굴
* 1만 5천 년 이전 지층에서 석기공방 2곳 발굴
구석기 ~ 삼국시대 충북 청원군 강외면 오송생명과학단지 (청원 만수리 구석기 유적)
* 2005년 오송생명과학단지의 지표 조사 중 발견
* 2006 ~ 2007년에 걸쳐 14만 2천 평 발굴 중
구석기 후기 늦은시기 진안 진그늘 유적
* 2000년 발굴
* 등잔 모양 석기 발굴
* 슴베찌르기, 돌날 문화
구석기 후기 늦은시기 순천 월평유적
* 1998년, 2001년 2차에 걸쳐 발굴
* 유물 다수 출토, 2만여평 규모
* 사적 458호, 전라남도 기념물 181호로 지정
빙하기가 진행 되던 시기로, 1만 2천 년 전쯤 중국 하남 지방으로 벼농사가 퍼져나갑니다.
1만 5천 ~ 1만 4천 년 전 한반도|만주|동시베리아 최초의 개
* 2002년 연구결과 발표
* 개의 미토콘드리아의 변화 정도 측정, 동아시아 개의 유전자가 가장 다양함을 밝혀냄
* 1만 4천 ~ 1만 2천 년 전 베링해협을 건널 때 개도 함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감
1만 4천 년 전 - 제주도 사람 발자국 화석
* 2002년 발견
* 제주도 남제주군 사계리 소재
* 사람과 말 발자국, 사슴, 새 화석 발견
* 동북아 최초의 사람 발자국으로 인정받았으나 연대와 관련된 논란이 있음
1만 4천 년 전 - 강원도 홍천 화하계리 유적
* 마을 전체에 분포
* 백두산 유역의 흑요석 사용 (교역 또는 이동의 흔적)
1만 2천 년 전 눈강 유역 앙앙계 대흥둔 유적 세석기 문화
* 1981년 발견
* 흑룡강과 눈강 사이에 위치
* 찍개, 긁개, 조작기 등 발굴 - 끼움날 도구 사용
* 털코뿔소, 맘모스, 프레제발스키 야생말, 야생 낙타, 동북 들소, 원시소 등과 공생
1만 3천 ~ 1만 1천 년 전 흑룡강 중류 평원 북부의 오시포프카 문화 가샤 유적
* 1975년 ~ 1990년 발굴
*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1만 3천 년 전의 토기편 발굴
* 동일 문화에 속하는 가샤, 쟈바이칼에서 11000년 전 부근 토기편 출토
* 맘모스가 사라지고 토기가 등장
1만 1천, 1만 5백 년 전, 중국 양쯔강 중류에서 중국 최초의 볍씨 흔적 발굴
1만 5백 년 전, 북경 부근에서 중국 최초의 토기 발굴
8천 년 이전(1만 년 전 추정) 제주도 고산리 마을터, 흑룡강 유적 형식의 갈색 무문양 토기 50여 점, 슴베화살촉 다수
9천 년 전 중국 가호 유적지
* 중국 문화, 언어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유적
8천 5백 ~ 8천 년 전 발해 북부 흥륭와 문화
* 홍산문화의 전단계
* 한반도-만주-시베리아의 문화의 유형
8천년 이전 ~ 7천 년 전 함북 서포항, 강원 오산리, 강원 양양 문암리, 남해안 층 신석기 토기군
* 빗살무늬 토기에 앞서 납작밑토기 등장
8천년 전 경남 창녕군 비봉리 늪지대 최초의 나무배
*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한 침수를 계기로 발굴
* 나무를 그을려 안을 파내는 방법으로 제작
* 원래 길이는 4 m 를 넘었다고 추정
* 재질은 소나무
8천 ~ 5천 년 전 중국 황하 상류 대지만 유적
* 최초의 도자기 발굴
7천 5백 년 ~ 5천 전 중국 양쯔강 하류 하모도 유적
* 대량의 벼, 보습 발굴
* 채색토기
6천 5백 ~ 5천 년 전 발해 북부 홍산문화
* 신석기 후기 유적
* 환호를 두른 부락, 가축을 기른 흔적, 제단 발굴
5천년 전 경남 창녕군 비봉리 늪지대 짚으로 뜬 망태기 (10 x 15 cm)
* 도토리 가루, 호두, 솔방울, 개·사슴·멧돼지 뼈, 석기 출토
대략 8천 ~ 6천 년의 시기에 중국 서부의 대지만, 동남 해안의 하모도, 발해 연안의 홍산문화가 발생·융성했습니다.
6천 년 전 노래섬, 가도, 장암리, 선유도 유적
5천 5백 ~ 5천 년 전 충북 옥천 대천리 집터
* 2000년 발굴
* 9.5 x 5.1 m, 깊이 35 cm 의 직사각형 터
* 집터 안에서 나무·뼈·돌 등으로 만든 괭이·삽·도끼·호미·칼 등 다양한 석기 발굴
* 벼껍질, 벌집, 삼씨, 꽃받침, 쌀, 보리, 밀, 조, 기장 등 탄화 곡물 발굴 - 연중 농사
* 내부 공간 기능별로 분할
4천 5백 ~ 4천 2백 년 전 청원 쌍청리 유적
* 1993년 발굴
*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한 2기의 집터가 발굴되었으며, 그중 현재 그 중 한 기의 3.1 x 2.6 m 의 파손된 터가 남아 있다.
*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돌보습, 갈판, 숫돌 등 다양한 농경도구 출토
이 근방이 단군조선의 건국시기입니다.
▣ 문명의 자각
《규원사화》의 환웅천왕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묘사를 인용해 봅니다.
단지 보기에 바람과 구름이 어둡고 검고 깊으며 번갯불이 빛나고 쏜살같이 달려 두르고, 우뢰와 천둥 소리는 맹수가 울부짖는 것 같으니, 옥녀는(玉女) 낯색을 잃어버렸고 모든 도깨비들(百鬼)이 도망쳐 숨어버렸다.
‘도깨비’가 네안데르탈인을 의미한다면 ... 동북아에서 이들이 사라진 시기가 바로 3만 년 전 부근입니다. 당시의 한반도는제주도의 백록담이 생성되는 시기였고,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적과 《부도지》, 《규원사화》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정착생활에 의한 최초의 문명이 한반도 남서부에서 시작 --> 기후변화로 각 부족들이 흑룡강 유역, 황해평야 등지로 흩어짐 --> 황해 평원, 일본에 진출한 부족들 바닷물 침입으로 쇠퇴, 흑룡강 유역에서 토기를 중심으로 문명 발달 --> 기후변동으로 대부분이 평야가 넓고 따뜻한 중국 남부로 진출, 중국 벼농사 시작, 일부는 황하 북부해안 진출 --> 북방계 일부 황하 이남으로 진출 --> 반발세력이 황하 중류에서 일어섬 --> 발해만 북쪽의 홍산·소하연 문화 발생 --> 기후변동으로 문명 일시 소멸 --> 하나라/단군조선 각각 건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사》에는, 후기 구석기인들이 서서히 북쪽으로 이주하고, 신석기 초기에 신석기인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신석기 말기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문명이 동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의견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연결하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이며, 이는 《부도지》, 《규원사화》, 우리 별자리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같습니다. 결국 세 가지 주장이 모두 다른 듯이 설명하고 있지만, 실은 모두 맞는 셈이죠.
이것으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구석기 거주지를 보유한 한반도에 그에 걸맞는 신석기 유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분명 대지만이나 반파, 하모도, 홍산 유적은 신북, 월평, 오송 유적에 맞는 규모의 신석기 유적들입니다.
▣ 1만 7천 년 전의 경작
몇 년 전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한 줌의 볍씨가 발견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 일로 BBC 뉴스 에 보도되었었죠.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소로리에 있는 석기시대 유적터를 발굴하면서 한 줌의 볍씨를 얻었는데, (1994 ~98) 이들을 방사성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1만 5천 년 전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17,310년과 13,010년 ~ 14,810년 전의 각각 다른 연도를 얻었다고 합니다.
(미국 Geochron Lab에 의뢰한 연대와 서울대 AMS Lab의 결과가 200 ~ 100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대체적으로 이 부근이 됩니다.) 현재 ‘재배’되는 벼의 가장 오랜 품종은 소로리에서 발굴된 것이 됩니다.
발굴된 한 줌의 볍씨로부터 대략적인 계통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 그림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벼는 자포니카, 인디카의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아랫쪽 가지는 현존하는 볍씨를 나눈 것이고, 윗쪽 가지는 소로리에서 발굴된 볍씨들입니다.
두 종류는 (아마도 아직 발굴되지 않는) 볍씨로부터 분화되었고, 소로리의 볍씨는 그 조상에 해당된다고 여겨집니다. 표본의 양이 적어 이러한 결과만으로 추측하기에는 다소 성급하지만, 그래프만으로 추측하자면 아마도 소로리에 살았을 조상들이 유사 벼(Quasi rice)를 계속적으로 교배하여 품종개량을 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직접 곡물을 관리했다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미루어 볼 때,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일찍 쌀을 재배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충북 청원 지방에 살았던 후기 구석기인이고, 우리나라 땅에서 신석기 혁명이 일어난 시기는 기원전 15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요.
고대 역사서를 참조하여 지어졌다는 《규원사화》의 〈태시기 (太始紀)〉 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로써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로 무릇 궐천년(闕千歲)이다. ‘궐(闕)'이라는 것은 ‘만(萬)’을 말하는 것이다.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지금은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궐천세’라 말한다.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궐천세’라는 것은, 신시씨가 세상에 거한 것이 모두 만 천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盖:덮개, 숭상, 맞추다)
참으로 우리나라가 연대가 가장 길다는 것이 이렇기 때문이다.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혹은 말하기를, 신시씨를 이어 고시씨와 치우씨가 더불어 서로 이어가며 임금이 되며, 전후를 합하여 궐백세가 되고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단군이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 또한 비슷한 이치이다.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대저 태고의 일은 너무 오래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遠, 不可得而詳矣.
그 앞의 내용은, 신시씨, 복희씨, 신농씨, 치우씨, 황제씨 등의 이야기로, 우리 민족이 최초로 마을을 이루고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등의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시씨는,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황해의 해저 지형을 보면, 중국보다는 한반도 쪽에 더 깊습니다. 당시의 해수면은 현재의 수면 아래 수십 미터 정도였으며, 한반도 옆으로는 신의주에서 제주도 서쪽까지 뻗은, 긴 바다가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바다는 북쪽으로는 평안도 일대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 평안도 일대와 그 바로 우측으로 경기도 일대, 전라북도 일대에 세 개의 거대한 삼각주가 발달해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1만 5천 ~ 1만 2천 년 전의 농사는 주로 이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당시는 지금보다는 꽤 추운 시기였으므로 특히 벼 종류는 남쪽에서 주로 경작되었을 듯합니다.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기 전의 세상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이고, 곳곳에 거친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었다.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위 연대 대로 1만 1천 년 또는 1만 1백 년에 4천 3백 년을 더하면, 그 시기는 1만 5천 3백 년 또는 1만 4천 4백 년이 됩니다. 비록 규원사화가 국내 사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연대가 위 볍씨의 연대와 잘 들어맞습니다. 또한, 그 시기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빙하에 남아 있는 산소의 방사선 동위원소로부터 알아낸 자료를 참조하면, 1만 5천 년 전 부근에서 기온이 갑작스럽게 상승하였습니다.)
약 1만 8천 년 전부터 1만 2천 년 전까지는 큰 호수로 시작하여 황해가 생성되기 시작할 즈음이며, 이전에 비하면 따뜻한 날씨였을 것입니다. 당시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 연안의 육지는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황해가 생겨나서 그 크기가 조금씩 커지면서 중국과 한반도를 갈라놓습니다.
1만 ~ 8천 년 전을 전후로 토기와 많은 수의 화살촉과 함께 제주도의 유적이 이 시기에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과 좁은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추가로, 경남 창원의 8천 년 전의 배, 7천 년 전의 망태기, 8천 ~ 7천 년 전의 동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토기가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1만 5천 년’ 이라는 수치는 단지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최초로 빙하기의 해수면의 높이가 그려진 것은 1930년대 초반이었고, 최초의 벼농사 시기 또한 수천 년 전으로 추측되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습니다.
‘궐천년(闕千年)’ 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요 ... 단 한 번 뿐인 역사를 셈하기 위해서였을까요 ... 이 1만 1천 년은, 통상적인 빙하기에서 다음 빙하기로의 기간인 2만 2천 년의 절반이 됩니다. 추측이지만, 《부도지》에 등장하는 ‘선천(先天)’ 과 ‘후천(後天)’ 의 구분과 비슷한 단위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료출처 : 정태민 "별자리에 숨겨진 우리역사"
참고 서적 :
《한국사》 권1 - 총설, 국사편찬위원회, 2002
《한국사》 권2 -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조빈복 저, 최무장 역, 2006
《중국 동북 신석기문화》, 조빈복 저, 최무장 역,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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