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문명(遼河文明) /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싱룽와 문화(중국어 간체자: 兴隆洼文化, 정체자: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병음: xīnglóngwā wénhuà Xinglongwa culture[*])는 기원전 6200년경에서 기원전 5400년경의 중국 만리장성 북방에 존재하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그 출토 범위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고 자치구 부근에서 랴오닝성 부근에까지 걸쳐 있어 홍산 문화에 선행하는 랴오허 유역의 문명의 하나로 추정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을 통하여 중국은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빠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동이족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 훙산 문화, 자오바오거우 문화, 신러 문화 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개요
싱롱와 문화는 비취 등의 구슬 제품이 출토된 문화로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용이 출현하는 문화 중에서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평저원통형의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운 토기가 출토되었다. 황하 문명 외에 선사시대 중국의 신석기 시대 문화가 남쪽의 장강 유역 및 북쪽의 랴오허에서 발견되어 싱롱와 문화는 랴오허 문화의 하나로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흥륭와(왼쪽)와 함경북도 서포항에서 나온 빗살무늬 통형관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계획적으로 취락을 쌓아 올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거가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의 취락 흔적이 세 개의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또 몇 개의 유적에서는 한 층 더 큰 건물이 발견되었고, 굴에 둘러싸인 환호 집단 취락지도 발견되었다.
싱롱와 문화의 표식유적인 싱롱와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 아오한 기의 구릉 남서쪽 기슭에 있다. 이 유적은 남동쪽 1.3 km 위치에 있는 싱롱와 군락 유적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흥륭와문화 촌락유적지 / 사각형의 반지혈식半地穴式 방이 150개, 묘장이 10개, 탄갱이 12개가 있으며, 촌락 주위에 방어호圍壕가 만들어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정주定住 민족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목 기마 민족의 도래 이전이다.
출토품
유적에서는 수혈식 주거가 120개소가 발견되었고, 각 주거의 중앙에는 부뚜막이 있었다. 싱롱와 유적의 중앙에는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외에도, 중국에서도 초기 시대에 발견되는 환호(굴을 파서 만든 집)도 발견되었다. 이 굴 안은 2만m2도 있는 큰 취락이 존재하였다. 매장 풍습도 독특하여, 몇 개의 유골은 주거 아래에 매장되어 있었다. 싱롱와 문화의 다른 유적 같이, 싱롱와 유적의 분묘 등에서도 비취로 만든 구슬이 발견된 분묘에서는 구슬 제품 외에도 돼지 한 쌍과 함께 매장된 유골도 있었다.
최근 발견된 싱롱구 유적(興隆溝遺跡)에서는 잡곡이 있던 증거가 발견되었고, 신롱와 문화에 있어서 유일한 농업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 유적과의 비교
1990년대 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인근 동해안 지역에서 군사보호구역지표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해변에 뒹구는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98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신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2001년엔 사적 제426호로 지정됐다.
1998년과 2002년에 신석기 조기(早期) 또는 전기(前期)에 해당하는 융기무늬 토기와 오산리식 토기 등이 나왔고, 2010년에는 신석기 중기(中期)에 해당하는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고 한다. 동해안의 경우, 신석기 조기(早期)는 BC 6,000년 경, 전기(前期)는 BC 5,200~4,600년 경, 중기(中期)는 BC 3,600~3,000년 경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또 고성시 문암리 유적지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밭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랑과 고랑의 형태를 띤 경작지와 더불어 탄화된 조가 함께 발굴되었다고 한다. 즉, 신석기인들이 밭을 만들고 곡물을 재배하며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청동기 시대를 서기전 1,500~400년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문암리 유적을 통하여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서기전 3,000년 경으로 대략 1,500년쯤 앞당기게 되었다고 한다.
고성시 문암리에서 발굴된 융기문토기, 돌칼, 돌도끼, 낚시바늘 등의 모습
그런데 문암리는 1998~2002년 기간중에 3차에 걸쳐 발굴됐는데, 서기전 5,000년 지층에서 주거지와 무문양 토기와 더불어 옥(玉) 귀걸이 한 쌍이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즉,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 귀걸이의 모양은 흥륭와(興隆窪) 유적에서 발굴된 옥 귀걸이와 모양이 매우 유사한데,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7,000년전 옥결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사해, 흥륭와 문화 옥결과 고성군 문암리 옥결의 모습 비교
흥륭와문화 흥륭와유지: 동북아시아 최초의 환호취락 유적
<출처 : 우실하 교수>
1982년 가을,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촌(興隆窪村)에서 흥륭와문화(B.C. 6200-5200)에 속하는 최초의 유적지인 '흥륭와유지(B.C. 6200-5400)'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오한기 지역에서도 유일하게 요하의 수계(水界)가 아닌 대능하(大凌河) 수계의 지류인 망우하의 상류지역이다. 1983-1984년 중국사회과학원 내몽고공작대 주도로 흥륭와유지에 대한 최초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최근까지 10차례의 발굴 결과 총면적이 약 3만 5000㎡에 달하는 흥륭와유지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신석기문화로 밝혀져 '흥륭와문화'로 명명되었다.
흥륭와유지 A지구에서는 보존이 잘 된 환호(마을의 주변을 보호하기위해 둘러싼 도랑)로 둘러싸인 취락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지는 동북-서남의 길이가 183m, 서남-서북의 폭이 166m의 불규칙한 원형의 회토대(灰土帶)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것이 취락을 둘러싸고 판 환호임이 밝혀졌고, 환호의 폭은 1.5-2m 깊이는 0.55-1m 정도이며, 환호의 안쪽에는 약 100여 개가 넘는 반지혈식 방 유적이 발견되었다. 방은 경사진 문도(門道)가 없는 장방형이며, 1줄에 10여개씩 11-12줄로 방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으며, 방은 크고 작 구별이 있어서 마을 중앙의 회의실로 추정되는 가장 큰 방은 약 140㎡로 우리나라 평수로 약 40평 아파트만하며, 주거용 큰 방(F1)은 길이 8.5m 폭7m 정도이며 가장 작은 방은 길이 5.1-5.4m 폭 3.5-3.8m 정도였다.
이 취락유적이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혹은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으로 불리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취락유적이자 최초의 환호로 둘러싸인 취락유적이다. 동북아시아 최초의 마을인 것이다. 유사한 환호취락유적은 세계 최초의 기장과 조가 나온 같은 시기의 흥륭구유적(興隆溝遺址) 등에서도 발견된다.
중화원고제일촌=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환호다.
흥륭와유적 마을 전체(183m×166m)를 감싸는 환호의 총 길이는 698m나 된다. 환호를 파면서 나오는 많은 흙은 환호 주변에 쌓아서 토성(土城)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외적이나 사나운 맹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노동력이 드는 마을을 만들고 몇 달 살고 이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환호취락은 이들이 정착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약 100-120 가구가 모여 살았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리(里) 단위의 시골 마을은 현재도 50-70가구 정도가 일반적이고, 100가구 정도의 마을은 예외적으로 큰 마을이다.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100-120여 가구에 평균 4-5명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약 400-600명이 마을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했었다는 것이다.
흥륭와문화 사람들은 이런 집단 주거지에서 기장과 조를 재배하며 정착생활을 했던 것이다. 흥륭와문화 흥륭구유지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기장과 조가 야생종이 아니라 재배종이라는 것은 이런 정황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농경 위주의 경제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채집, 수렵이 주이고 농경이 병행되는 시기였다.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만주지역은 미개한 야만인의 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흥륭와유지, 흥륭구유지 등으로 대표되는 흥륭와문화의 발견은 이러한 전통적인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발굴 초기(1983-1984) 흥륭와유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찍은 사진) 우측 상단 언덕위에 회색토가 보이는 부분이 흥륭와유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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