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한국(BC7197)

요하문명(遼河文明) / 홍산문화(红山文化)

자연정화 2018. 6. 27. 11:52

요하문명(遼河文明) / 홍산문화(红山文化)

 

훙산 문화 (홍산문화, 중국어 간체자: 红山文化, 정체자: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 또는 광의적으로 요하 문명(遼河文明)은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대표 문화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와 랴오닝 성 조양 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 토기와 적석총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로 중국의 중원 문화와 구별되며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요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에 의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興隆窪文化), 훙산 문화, 자오바오거우 문화(趙寶溝文化), 신러 문화(新樂遺跡)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와 주요 유적

 

형성시기

한 글

한 자

위 치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신낙 문화 유적

(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新樂 文化(신러)

랴오닝성 선양 시 북부 지역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6500년

신석기시대 소하서 문화 유적

小河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흥륭와 문화 유적

興隆洼 文化(싱룽와)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사해 문화 유적

査海 文化

내몽골 접경 사해 유역

기원전 5200년

   ~ 기원전 5000년

신석기시대 부하 문화 유적

富河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부하 유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400년

신석기시대 자오바오거우 문화 유적

趙宝溝文化(자오바오거우)

내몽골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

紅山文化(훙산)

내몽골 요동 하북 지방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小河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

夏家店 下層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맹극하(孟克河) 유역

 

 

연대 인상과 평가

요하 유역에서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도리이 류조의 처음 발견 당시의 추정보다 연대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8000년까지 인상되었다. 이에 따라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의 영향을 받은 아류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황하문명의 원류가 아닌가 주목받고 있다.

 

 

위치

내몽골자치구 츠펑 시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홍산이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옥기가 발견돼 홍산옥기(紅山玉器)라 하였고 중국 중원에서 보기에 홍산 뒤쪽에서 발견되었기에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의 하베이성 북부에서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랴오닝 성 서부에 해당된다.

 

역사

현재의 명칭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에서 유래하였다. 홍산문화는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에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이것이 오늘날 동북공정은 중국인 양사영으로부터 시작된 격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으로 당시의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고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이렇게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후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으며, 채도와 세석기의 특징을 가진 이 문화는 1954년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하여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동이족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제1공작대와 아오한치(熬漢旗·오한기) 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 오한치의 싱룽고우(興隆溝·흥륭구) 유적 제2지점에서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요하문명의 대표적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에서 여신상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남신상이 발견된 것은 중국 최초이다. 인민일보·CCTV 등 중국 언론들은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중화조신(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와함께 2004년 11월, 기존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요녕성박물관)을 개축하여 건축면적 2만 8900m2, 12개 전시실에 전람면적 8530m2에 이르는 신관을 개관하였고 2010년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같이 중국 내몽고에는 박물관 신축과 개관, 확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임서(林西)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2010년 후반기에 이전했고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박물관은 그전에 이미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상

훙산 문화에서는 농업이 주를 이루며, 가축을 사육한 축산도 발달하고 있어 돼지나 양이 길러졌다. 한편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으로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집하기도 했다.

 

▲ 홍산문화의 적석총 형태 무덤에서 용·곰등 다양한 동물 문양 옥기가 출퇴됐다. 이는 동물을 숭배했던 토뎀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1.새모양 옥기, 2. 봉황모양 옥기, 3. 구름모양 옥기, 4. C자형 옥룡, 4. 곰모양 옥웅룡

 

#6~7등급의 계급사회로 추정

옥기는 적석총에서 많이 출토 되었다. 이들 적석총에 매장된 옥기는 수량이 많고 품질이 뛰어난 재료를 사용해 묘주인이 귀한 신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장품의 정도에 따라 신분계층을 유추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출토된 옥제품 유물로 보아 6~7등급 정도 구분되고 있다. 이미 이 시대에 씨족구성원들의 신분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짐작컨대 이미 홍산문화는 계급사회를 이루어 국가체제로 접어들 무렵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산 정상에서 발견된 대형묘의 주인은 손에 옥거북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공은 신과 소통하는 제사장임을 추측하게 한다. 여기서 옥은 제사장이 신에게 헌납하는 예물이라 할 수 있다. 제사장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옥을 통해 스스로 신적 존재임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제사장·천신·옥은 고귀한 일체의 관계로 원시사회의 존엄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 자연석을 네모로 깍아 정연하게 쌓은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적석총. 이런 형태의 무덤에서 옥기가 수없이 발굴되었다.

 

#생활장식품부터 신앙적 의미 신물까지

홍산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인 요령성 건평현의 우하량 무덤에서 다량의 옥제품이 출토되어 중국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부장품이 있는 31기의 무덤 중 옥기를 수장한 무덤이 26기에 달했다. 부장품 무덤의 80%가 옥기를 수장했다. 우하량 무덤의 부장품들은 모두가 옥기에 속하고 옥 이외의 부장품은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이 우하량 문화유적이 지닌 특징이라 하겠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이 이 지역에 대해서만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진입한 충간에 옥기시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옥은 장신구나 제사용기에 많이 쓰이는 진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보석으로 하늘의 자연색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며 천신의 맑고 신성한 마음을 상징한다. 옥을 수장한 것은 옥이 신과 교감하며 천신과 소통하려는 홍산문화 주인공들의 정신세계의 표상이라 하겠다.

 

 주요 기종은 용머리 장식, 옥제거북이, 옥으로 만든 신상, 옥제 새, 팔찌, 귀걸이, 구름모양 옥제 패색, 인체의 형상, 곡옥형 옥제품, 곤충모양 등 종류가 다양한데 소형은 거의 치레걸이로 줄을 달 수 있게 구멍이 나 있다. 이 가운데도 주목을 받고 있는 옥제품은 용의 형상과 새모양, 곰모양의 옥웅룡이다. 이때부터 용의 형상을 창안해 용을 신성시한 신앙의식 사상이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1971년 적봉시 북부의 옹무특기에서 발견된 'C'자형 옥으로 만든 용의 형상물은 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으로 불리우면서 홍산문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곰·새 등 동이족과 깊은 연관성 가져

이들 무덤에서 새모양의 옥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던 동이족의 보편적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봉황모양도 발굴 되었는데 용봉 토템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음양(陰陽)문화의 뿌리라 하겠다. 또 곰 모양과 용모양을 혼합한 옥웅룡(玉熊龍)이 다수 발견되어 곰을 신성시한 홍산인들의 토템을 짐작할 수 있다. 옥웅룡은 죽은자의 가슴부위에 놓여 있었는데, 주인공은 이것을 목에 걸고 신성한 의식을 치른 것으로 여겨진다.

 

 옥웅룡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신물(神物)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홍산인들의 여신(女神)과 더불어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홍산문화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신석기인의 곰 숭배 문화는 퉁구스족이 가져온 2~3만년전 고 아시아족의 것으로, 우리민족과는 뿌리부터 곰 토템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홍산인들은 사소한 치레걸이에서부터 신성시한 신물에 이르기까지 거의 옥제품으로 일관해 왔다. 옥은 홍산인들의 절대적 필수품이었다. 부장품으로 나타나는 옥제품은 살아 있을 때의 애장품이오 고귀한 신물이었다. 이러한 신물의 재료인 옥석(玉石)은 어디서 조달한 것일까?

 

▲ 우하량 적석총에서 8000년전의 옥기가 출토되어 학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허리부분에 옥웅룡, 머리부분에 머리장식 옥이 보인다.

 

#400여㎞ 떨어진 압록강유역 수암옥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에는 옥산지가 없다. 중국학자들의 추적연구결과 홍산문화의 소산인 적석총에서 출토된 옥기는 거의 압록강 하류부근인 수암지역에서 생산된 수암옥으로 밝혀졌다. 적봉에서 남쪽으로 450km가량 떨어진 지역이다. 이곳 수암까지 홍산문화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홍산인들은 옥석을 구하기 위해 천리길을 마다 하지 않았다. 홍산문화의 옥 종류로 청옥, 홍옥, 황옥, 백옥등 갖가지 옥을 용도와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가공했는데 옥가공술은 현대인도 혀를 내두를 만큼 빼어난 옥제품을 남겼다. 현대의 기계로도 가공하기 힘든 장식품과 신물을 당시 석기로 어떻게 만들어 냈을까?

 

 깨고 쪼고 다듬고 문지르며 하나의 옥기를 생산하는데 수개월,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현대의 정밀한 도구로도 뚫기 힘든 세밀한 구멍을 비롯한 조형을 만드는데는 특별한 옥제품 생산가공의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숙련된 장인이 아니고는 세련된 옥기를 다듬기 어렵다. 그들이 다듬은 옥기는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 신이 남긴 조형물처럼 여겨진다.

 

 홍산인들에게 옥은 신과 소통하는, 신에게 바치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옥과 천신을 대등하게 여기고 옥을 숭앙하며 천신에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옥, 그것은 홍산인들의 영물(靈物)이었을 것이다.

 

 

유적 유물

이들은 농업을 주로 한 문화로 용등을 본떠 만든 비취등의 구슬로부터 현재 중국에 연결되는 문화나 종교의 존재도 볼 수 있다.

 

홍산 문화의 주된 유적은 서 랴오허 상류의 지류인 황수(潢水) 및 투허(土河) 유역에 퍼져 있다.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세석기 등으로 그 대부분은 농기구이며, 돌보습(石耜),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다.

 

홍산 문화의 도기는 진흙 홍도 및 협사회도(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채도(채문 토기)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협사회도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다. 다른 도기에서는 임산부를 본뜬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홍산 문화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같은 채도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 문화의 흑도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진다. 또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환도도 발견되고 있다.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돼지, 호랑이, 새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저룡(猪龍)》또는 《옥저룡(玉猪龍)》이나 《옥웅룡(玉熊龍)》등으로 불리는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 문화가 이후 중원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홍산문화의 옥기나 유적 등에 대한 다른 견해 또한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저룡(猪龍)이나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명명하는 형태의 옥기가 실은 용이 아닌 생물의 태아를 본 떠 만든 것이라는 견해와 홍산문화에서 적석총(돌무지무덤)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한민족(韓民族, 또는 동이족)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가 나오면서 한(韓)·중(中) 간에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요하문명의 상징물이 급속도로 중국화하고 있는데 홍산문화 유적지가 밀집한 내몽고의 적봉시, 옹우특기, 오한기, 요녕성의 능원시, 건평현 조양시 등의 상징을 몇 해 전부터 홍산문화의 상징인 옥저룡(玉猪龍)ㆍ옥웅룡(玉熊龍)으로 교체했다. 중국 영토에 사는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역사도 중국사라는 논리이다. 56개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중화민족으로 묶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론의 바탕이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1996~2000)’→‘동북공정(2002~2007)’→‘중화문명탐원공정(2003~ )’→‘국사수정공정(2005~2015)’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구조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사수정공정은 이런 일련의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인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2005~2007년 기초자료 수집을 마치고 2007년부터 본격 수정을 시작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5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재편찬하고 있는 것이다.

 

뉘우허량 유적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기존의 홍산 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유적은 5km2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다.

 

여신묘 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여신묘에서는 채도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 홍산 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이 생겨나고 있다.

 

양사오 문화 초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홍산 문화의 유적에서도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 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원형이나 방형(사각형)은 천단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3][4]

 

1980년 초기, 이전에는 역사기록에 없는 그 누구도 몰랐던 여신묘에서 다량의 옥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은 이곳에서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당시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보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라는 이유다.

 

여신묘와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필요하므로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고 있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였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있는 다량의 옥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뉘우허량 유적의 발견이후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은 뉘우허량 유적으로 대표되는 흥륭와문화(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7년에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기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은 모양인데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흥륭와문화(홍산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도 나왔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도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라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의 논문에 의하면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 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 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에는 흥륭와 형성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 km 떨어진 랴오닝 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홍산문화의 가장 놀라운 유물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