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한국(BC7197)

요하문명(遼河文明) / 샤오허옌(小河沿)문화

자연정화 2018. 6. 28. 07:21

요하문명(遼河文明) / 샤오허옌(小河沿)문화

 

근래 훙산문화 지역에서 주목받는 것은 샤오허옌(小河沿)문화(BC 3000년 ~ BC 2000년)이다. 샤오허옌의 분포 지역은 매우 넓다. 서쪽으로는 네이멍구 동남부에서 동쪽으로는 차오양(朝陽) 일대, 북쪽으로는 시라무룬 강에서 남쪽으로는 진시(錦西) 일대로 훙산문화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1974년 중국은 츠펑(赤峰) 시 아오한 기(敖漢旗) 샤오허옌 향(小河沿鄕) 난타이디(南台地) 지역의 유물들을 발굴한 결과 처음에는 훙산문화로 분류했는데 특이한 점이 발견되어 이를 샤오허옌문화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문화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연대이다. 샤오허옌문화의 상한선은 기원전 30세기이며 하한선은 기원전 24세기 무렵이다. 연대적으로 샤자뎬(夏家店) 하층 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샤오허옌문화의 하한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샤자뎬 하층 문화 유적에서 샤오허옌문화유적 층을 부순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76호 무덤에서 출토된 나무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4830년(±180년), 4345년(±80년)이란 연대가 나왔다.

 

이 문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한다. 1980년 중국의 리공두는 샤오허옌 유물들이 산둥반도의 다원커우문화(大汶口文化)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훙산문화의 하위개념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샤오허옌문화’라 구분 지었다. 반면에 궈다순은 샤오허옌문화가 훙산문화와 다소 다른 면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훙산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후훙산문화’라 칭했다.

 

샤오허옌문화의 특징은 여러 가지다. 우선 거주지가 단실과 쌍실로 나뉜다. 쌍실은 긴 둥근형으로 집안 중간에 벽을 쌓아 두 칸으로 나누었는데 큰 칸은 사람이 거주하고 작은 칸은 창고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집안에 창고를 따로 둘 정도로 보관할 작물이 많이 소출되었다는 것을 뜻하므로 농경 수준이 상당한 정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그릇은 대부분 모래질에 갈색 그릇으로 전체 출토량의 60퍼센트에 달한다. 그릇의 종류는 대형 단지, 통형 독, 채도, 그릇받침, 두, 보식, 대접, 긴 목 주전자 등이 대표적이다. 그릇 중에는 짐승 모양을 본뜬 것도 있고 아가리가 두 개, 귀가 여러 개 달린 것들도 있다. 이곳에서 부호가 새겨진 그릇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동물 소조상이 나왔고 이 중에는 곰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공구는 돌삽, 송곳, 돌도끼, 끌, 망치 등 간석기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뼈에 홈을 내어 여러 색의 돌날을 박아 칼을 만든 것도 보이는데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기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늘귀의 크기로 구멍 크기가 0.5밀리미터 미만임을 볼 때 이 당시 이미 매우 가는 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질그릇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부호들도 연구 대상이다. 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한 형태의 부호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는 점이다. 부호의 반복성과 함께 타 지역과 공유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의사소통을 위한 방편이라 볼 수 있다. 즉 어떤 의미가 있는 표식이라면 초기 문자의 출현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 문화 시기에 원시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다.

 

샤오허옌이 남다른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이곳에서 발견된 기물들이 산둥 반도 중 · 후기 다원커우문화의 기물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다원커우문화는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존재했던 문화인데 그중 산과 해를 표현하는 형태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들 간에 확실한 차이점도 있다. 다원커우문화의 대표적인 기물인 삼족기나 뚜껑 있는 기물들은 샤오허옌문화에서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기대 박사는 두 문화가 교류하면서 샤오허옌문화가 다원커우문화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샤오허옌문화가 훙산문화를 계승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다. 원래 같은 층의 상층부에서 발견되는 것은 하층부와 연계된다고 인식한다. 실제로 훙산문화와 샤오허옌문화는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질그릇을 보면 확연한 유사점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질그릇은 경질이며 붉은색이 많고 후기로 갈수록 검은색 그릇이 많이 나타나며 물고기, 기하무늬 등도 발견된다. 두 문화 모두 도안은 변하지만 홍도(紅陶)가 계속 유지되면서 그림 그리는 방법이 이어지고 있다.

 

훙산문화와의 연계가 뚜렷이 보이는 또 다른 증거는 옥기(玉器)다. 옥기 자체는 많이 발견되지 않지만 치레거리, 짐승을 모방한 것, 상징적 표현 등 다양한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태아 형태의 옥기다. 이 옥기들은 각종 짐승들의 태아 형태를 표현했는데 오직 훙산문화와 샤오허옌문화에서만 출토된다.

 

무덤에서도 유사성이 발견된다. 무덤의 배열은 집단 무덤떼를 만들고 무덤과 무덤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다. 이와 같은 유사성을 고려하면 훙산문화를 샤오허옌문화가 계승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무덤은 큰 의문점을 제기한다. 훙산문화에서는 주로 석관묘나 석곽묘를 견지했는데 이들 지역에서 이런 무덤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검을 묻는 방식도 훙산문화는 곧은 장이 대부분이지만 샤오허옌문화는 모두 굽은 장이다. 부장 기물 역시 훙산문화 무덤은 옥기가 많이 발견되는데 샤오허옌 쪽은 주로 질그릇을 부장했다.

 

또한 샤오허옌문화에서는 훙산문화 거주지에서 기본으로 활용되던 석성(石城)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훙산문화의 무덤을 훼손한 것도 있음을 볼 때 이들은 훙산인들과 다소 다른 풍습으로 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혹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학자들은 그동안 훙산문화가 한국인의 고대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샤자뎬 하층 문화로 이어진다고 추정했다. 훙산문화 지역이나 샤자뎬 하층 문화 지역이 큰 틀에서 중복되기 때문이다. 특히 샤자뎬 하층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24세기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14세기 전후에 와해되었다고 추정하므로 연대상 단군조선의 시작과 연계된다. 그런데 그동안 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린 것은 샤자뎬 하층 문화와 훙산문화가 연대상 적어도 600~700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연대상으로 볼 때 훙산문화를 이어 샤오허옌문화, 샤자뎬 하층 문화가 연계되므로 이 문제만 놓고 보면 그동안의 걸림돌이 제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샤오허옌문화와 훙산문화 간에 무덤의 매장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근래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샤오허옌문화와 훙산문화가 매장법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문화가 인적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샤오허옌문화의 인골을 조사한 결과 크게 분류하면 몽골인종에 속하고 작게 분류하면 동아몽골인종과 북아인종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문화 사람들은 주로 고동북유형(古東北類型)과 고화북유형(古華北類型)이 나타난다. 비율상으로는 고동북유형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중원 지구의 양사오문화와는 현격히 다른 점이다.

 

무덤의 구조도 대부분 움무덤이 많고 그릇 형태도 매우 유사하다. 또한 흑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훙산문화에서 기원하여 샤자뎬 하층 문화까지 이어진다. 아직 샤오허옌문화의 유적지는 극히 일부분만 단편적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차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는 미지수라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지면 의문점이 시원하게 풀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대를 살펴보면 훙산문화 지역에서 한국과 긴밀한 연계가 있는 북방 초기 청동기시대인 샤자뎬 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샤오허옌문화를 이어 기원전 23~24세기부터 발달했고 기원전 1500년경부터 샤자뎬 상층 문화(夏家店上層文化), 기원전 14세기부터 짜오양 시의 웨이잉즈문화(魏營子文化)가 등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샤자뎬 하층 문화는 농경문화인데 상층 문화는 유목문화라는 점이다. 이는 농경 위주의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후가 변하여 양과 염소, 말을 기본으로 하는 유목 생활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샤자뎬 상층 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린 동제품(공식적으로 기마전투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은 동아시아에서의 기마 풍습의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 문양의 청동 제품들이 발굴되는 점을 감안할 때 샤자뎬 상층 문화는 유라시아 초원 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인들은 이들 북방 초기 청동기시대를 ‘초원 청동기시대’라고 부르며 유목 민족이 근거했던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전의 샤자뎬 상층 문화를 동호(東胡) 지역 문화라고 부른다.

 

샤자뎬 하층 문화는 연대상으로 볼 때 단군조선의 시작과 맥을 같이하는 등 고조선의 중심지로 과거부터 중국, 북한, 한국 학자들이 부단히 거론했던 곳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샤자뎬 하층 문화가 가장 밀집해 분포된 차오양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지만 해도 1,300여 곳이나 되는데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된다. 이들 유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국인이라면 잘 알 것이다.

 

한마디로 한민족인 동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는 장소라는 뜻으로 이는 역으로 말한다면 중국이 자랑하는 5천 년 역사의 훙산문화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문화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에게 매우 낯이 익은 점을 치는 관습으로 주로 짐승의 어깨뼈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그슬려 길흉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복기대, 「小河沿文化에 관하여」, 고조선단군학회, 2009년 11월(제21호).

朝陽市文化局, 『牛河梁遺址』(學苑出版社, 2004).

 

 

 

 

샤자뎬 하층문화 (夏家店 下层文化)

샤자뎬 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 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下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下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xiàcéng wénhuà Lower Xiajiadian culture[*])는 기원전 2200년부터 1600년경까지 현재의 중국 동북부, 내몽고 자치구 남동부,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한 고고 문화를 말한다.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하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같은 지역의 훙산 문화에 이어지며, 그 과도기를 샤오허얀 문화(小河沿文化)라고 한다.

 

생활의 중심은 잡곡 재배이며, 그 밖에 목축, 수렵도 행해졌다. 유적에서는 돼지, 개, 양, 소 등이 발견되었다. 정주 생활을 하면서 인구밀도는 높았다. 석기, 골기, 토기가 발견되고 있고, 그 밖에 금, 납, 칠기, 비취, 동기,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동기, 청동기로 만든 귀고리가 많고, 뼈를 이용하여 점도 행해졌다.

 

집은 둥글고, 흙과 돌로 만들어졌다. 취락은 벼랑이나 경사면에 방어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또는 석벽을 취락의 주위에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그 후, 샤자뎬 상층문화가 퍼졌다.

 

 

샤자뎬 상층문화 (夏家店 上层文化)

샤자뎬 상층문화(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上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上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shàngcéng wénhuà)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경,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서 형성된 청동기 문화를 말한다.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상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유라시아 스텝의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또 서주(西周)와 동시대에 이 영향도 있다.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남동부,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영역에서 앞서는 샤자뎬 하층문화 보다 약간 넓은 범위에 이르러, 북쪽은 자모론 강의 북쪽에 이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인구밀도는 낮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했지만, 유목 생활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토기는 뒤떨어지지만, 청동기나 석기가 더 우수했다. 청동기에는 검, 도끼, 도, 투구 등이 있고, 동물이나 자연에 대한 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스키타이로 연결된 유라시아 스텝을 통한 밀접한 문화적 접촉을 나타내고 있다. 후기가 되면 주나라(周 )양식의 청동기가 출현한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항구적인 건축물이 적어서, 하층 문화의 건축물 또는 그 재료를 유용하는 것이 많아진다. 말과 마구가 많이 발굴되어 말이 중요한 생활 수단이 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축은 돼지를 대신해 양이나 산양이 더 중시되게 되었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해 지배계층의 무덤은 더욱 호화로운 부장품을 가지며, 묘제는 적석총과 분구를 특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