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본과 줄타기 하는 김정은식 외교
자료출처 : 시사in 2015. 11. 14. 남문희 대기자
미국이 중국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의 방북에 매우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분명하다. 류윈산 방북이 북·미 대화와 6자회담의 모멘텀이 돼, 북한 문제에 대한 미·중의 ‘콘도미니엄 체제(공동관리 공동지배)’가 부활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류 상무위원은 방북 과정에서 미국의 희망 사항에 대해서는 변죽만 울렸고, 중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만 급급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의 협상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도 이유겠지만, 그보다 김정은 비서의 예상치 못한 담판 시도에 휘둘렸던 것으로 해석된다. 두 사람의 회담은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 하루 전인 10월9일 밤 이뤄졌다. 시진핑 주석의 친서를 두 손으로 전달하는 류 위원과 이를 한 손으로 받는 김 비서의 모습을 담은 신화통신 사진이 이날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김 비서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터트리며 중국의 아킬레스건을 치고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신의주특구와 황금평 개발을 약속만 해놓고 지키지 않은 사실을 맹렬히 성토했다고 한다. 계속 이런 식이면 일본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압박도 나왔다. 일본을 어디로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바로 남포다. 일본 전자공단의 남포 진출 문제는 2012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동안은 주로 납북자 문제와 연동한 선입금으로 남포에 인프라 투자를 하는 방안이었다(<시사IN> 제297호 ‘일본, 남포공단에 한발 더 가까이’ 참조). 납북자 문제는 지난 9월 북·일 비공식 접촉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는 게 확인됐다. 그런데 최근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일 간에 납북자 문제 외에 별도의 접촉 사안이 존재해왔다. 러일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을 비롯한 일본인 유해가 평양 대성산 근처에 2만 구 정도 묻혀 있다고 하는데, 2012년 장성택이 살아 있을 때부터 1구당 1만 달러, 모두 2억 달러를 받고 송환하는 문제가 논의돼왔다는 것이다. 여건만 된다면 북·일 간에 남포 진출 문제를 협의할 채널은 언제든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REUTERS : 10월27일 미국의 이지스 구축함인 라센함이 남중국해 중국 인공섬 12해리 이내에 진입했다.
남포는 평양의 턱밑이자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 서해의 최대 항구다. 이곳에 일본의 전자공단이 들어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최근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일본 측이 한국의 주권은 휴전선 이남에 국한한다고 에둘러 밝힌 바 있다. 국내에서는 이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로 해석하는데 그와 별개로 일본 자본이 북한에 진출할 경우 일본 기업과 시민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위대를 보낼 수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중국의 코밑 남포에 자위대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관동군에게 만주를 유린당한 악몽이 있는 중국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사태다.
류 위원은 이런 내용을 시진핑 주석에게 바로 알렸고, 이에 대한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시사IN>에 알린 대북 소식통은 축전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중국 건국기념일인 10월1일 북측은 단 두 줄짜리 소략한 축전을 보냈을 뿐이다. 따라서 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10일 중국의 축전 역시 비슷한 형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회동이 있고 난 다음 날 중국은 매우 정성스러운 내용으로 장문의 축전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좀 더 직접적인 반응은 신의주특구 문제에서 드러났다. 북한 대외경제성과 중국 랴오닝성 정부가 신의주특구의 본격 개발에 전격 합의한 것이다. 2002년 양빈(楊斌) 때부터 시작해, 2006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남부 순방 후, 그리고 2012년 당시 대중화그룹의 개발계획 등 신의주는 ‘말로만 개발’의 대표 사례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지난 7월 시진핑 주석의 동북 3성 방문을 기점으로 동북 개발이 본격화하는 시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홍콩에서 시작해 선전-상하이를 거쳐 북상해온 성장의 ‘선벨트(Sun Belt)’가 동북 3성에서 본격적으로 점화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신의주특구 개발 얘기는 동북의 선벨트에 북한이 동승한다는 의미가 있다. 국내의 한 전문가는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중국은 북한을 책임지고 국제무대에 등장시키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이제 그 일부를 지키겠다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 대회에서 남한과 ‘별개 국가’ 선언될까
내재적 시장화에 이어 동북 3성의 성장 벨트에 본격 합류하게 되면 앞으로 북한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려면 먼저 어정쩡한 상태를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해야 한다. 유엔 회원국이면서도 남북 간에는 특수관계 내지 반국가 단체라는 모호한 성격 규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분란의 대상이 돼왔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1970년대 동서독처럼 ‘두 개의 국가’로 병립해 공존하자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이 10월30일에 밝힌 내년 5월 초 제7차 당 대회 소집 얘기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많다. 지금까지의 흐름상 ‘두 개 국가’로의 병립 문제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미 지난해 7월7일 북한 정부 성명에서 남북 상호간 체제 인정 및 내정 불간섭, 새로운 통일 방안으로서 연방연합제(사실상의 국가연합)를 주장한 바 있고, 그 뒤 지난 8·15에 있었던 북한 표준시 변경, 8·25 남북 합의 때 대한민국 호칭 사용, 국호에 대한 영문 표기를 Corea로 변경하려는 시도 등 별개의 국가 행보를 거듭해왔다. 안보 분야의 한 대북 전문가는 '최근 평화협정에 대한 북한의 입장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라고 지적한다. 주한 미군 주둔 및 북방한계선(NLL) 문제에서 유연해졌고 한시적 핵 보유론의 등장 등 실용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AP Photo : 김정은 제1비서가 10월10일 류윈산 중국 상무위원과 함께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했다.
북한 노동당 대회는 당의 강령 및 규약과 노선의 변경을 주 임무로 한다. 36년 만에 개최하는 당 대회를 통해 대남 적화통일 등 남쪽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 내지 변경함으로써 남쪽과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고 별개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세리머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동북의 선벨트에 동승하려면 자본과 물자와 인력의 교류가 원활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 동서독이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교류 협력이 본격화했던 점에 대해 중국이나 북한이나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북·중 관계 사정에 밝은 전문가는 지적했다. 류윈산 방북 결과가 콘도미니엄 체제의 부활보다는 해체 방향으로 나타나자 미국의 대응 방식도 ‘리셋’되고 있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류윈산 방북 이후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과 북한 관리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좇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한국과 일본의 역할 분담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류윈산 방북 후인 10월27일 미국의 이지스 구축함인 라센함이 남중국해 해역에 진입하면서 대중국 압박이 본격화했다. 앞으로 일본은 중국 압박의 첨병 구실이 강화될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 대한 관리는 자연스럽게 한국 몫이다. 일단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면서 미국도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기류가 어떤 양상을 띨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남문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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