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신라군도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6.22 10:43:21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4>
4. 신라군도
주산군도는 재당신라인의 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곳이다. 어쩌면 청해진보다 더욱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그 근거로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존속기간과 정치적 성격, 또 지리적 위치이다.
우선 존속기간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다시피 청해진이 설치된 때는 당나라에서 번진발호가 종식된 지 9년 후인 828년이다. 그 9년간 장보고는 적산항로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적산법화원을 건립하는 등 해상활동의 기반을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해진은 불과 23년만인 851년 신라조정에 의해 폐지되고 만다. 더구나 이 기간은 장보고가 피살된(841년) 후의 유명무실했던 존속기간 10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문성왕 13년(851년) 봄 2월 청해진의 폐지와 그곳의 백성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청해진이 폐지된 때를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주산군도는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수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중심 영역에 있었다.
다음으로 당시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자.
필자가 주산군도의 중요성에 있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산군도는 당唐의 관할지역이 아니었다. 즉 당의 행정구역 밖에 위치하여 당 조정에 대해 독립적이었다는 말이다. 아래는 819년 당唐 조정에 의해 지방행정 정비령이 시행될 때 절동관찰사(절강성 동부 관할) 설융薛戎이 당唐황제 헌종에게 올린 품의의 내용을 인용하고 해석한 것이다.
‘今當道望海鎭(금당도망해진) 去明州七十餘里(거명주칠십여리) 俯臨大海(부림대해) 東與新羅日本諸蕃接界(동여신라일본제번접계) 請據文不屬明州(청거문불속명주), 許之(허지).’ 〈당회요唐會要, 권78 제사잡록諸事雜錄(상上) 원화元和14년 8월조條〉
‘현재 우리 도道의 망해진은 명주에서 70여리 떨어져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의 신라와 일본 제번諸蕃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문서를 통해 명주에 속하지 않겠다고 청원해 왔습니다. 이에 (황제는) 허락하다.’
위에서 망해진은 현재의 진해鎭海이고 명주는 현재의 영파寧波인데, 바다 동쪽의 신라일본제번이 바로 주산군도이다. 그리고 819년은 이정기의 치청이 무너지고 번진발호가 종식된 해이다. 이로서 우리는 장보고와 장지신이 활약할 시기의 주산군도는 당나라의 통치권 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2가지 사실을 더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주산군도에 대한 정치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설융의 시각인 제번諸蕃이다. 중국의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서 번蕃은 황제의 통치권 밖의 지역, 즉 외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반해 통치권 내의 외국인 거주지는 번방蕃坊이라 하여 따로 구분하였다. 그 예로 당시 양주와 명주에 거주하던 수십 만 명의 아리비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거주지는 반드시 번방이라 지칭했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방의 경우엔 번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라번방이라 하지 않고 신라방이라 한 것은 당시 재당신라인이 외국인이 아니라, 고선지나 흑치상지와 같이 당나라 국적자로 취급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산군도의 신라번에 대해선 일본의 사서에서도 확인되는데 속일본기 보구寶龜 연간의 ‘근래 신라번 사람들이 빈번히 내왕한다.(比年新羅蕃人비년신라번인 頻有來者빈유래자)’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위 당회요와 속일본기의 기록에서 당시 주산군도가 신라번으로 당唐에 대해 독립적인 집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사실의 하나는 설융이 주산군도를 신라일본제번이라 하여 마치 주산군도에 일본번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했으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어떤 사료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주산군도가 명주항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일본인의 내왕이 잦았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일본번은 당시 명주불속을 실현하기 위한 주산군도 주민의 세勢의 과시로 판단된다.
그런데 당시 당唐조정이 주산군도의 명주불속 청원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그것은 주산군도의 역사이다.
역사적으로 주산군도가 중국 역대왕조의 통치영역에 들었던 때는 사실상 당唐현종 시기 주산군도에 옹산현翁山縣을 설치한 738년의 일이다. 이것이 주산군도에 설치된 역사상 최초의 행정기구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이전의 명복상의 지배에서 실제적 통치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옹산현은 불과 25년 만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일어난 원조袁晁의 반란(거병) 때문이었다. 원조의 반란은 무려 20여만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반란으로, 원조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표방한 연호 보승寶勝은 당시 당 황제 숙종의 연호인 보응寶應에 대항한 것이었다. 즉 당唐을 꺾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거병의 규모나, 성격에서 볼 때 단순한 지방 차원의 반란이 아니었다.
위 거병이 오늘날 중국사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원조의 기반이 절동지방의 해상세력에 기반한데다, 절동지방은 과거 백제의 해외영토였기 때문이다. 즉 원조의 거병은 백제를 무너뜨린 당唐에 대한 복수이자, 백제 재건의 시도일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또한 당시 북방에서 일어난 안록산.사사명의 난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당唐제국을 번진발호 사태로 이끄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요인이야말로 간신히 번진발호를 수습한 당 조정이 주산군도의 명주불속 청원을 받아들인 배경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원조의 거병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거병의 후예들은 재당신라인으로 변모하여 9C 동아지중해 해상무역을 지배하며 힘을 구축한 뒤, 당唐 멸망시기 절동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는데 이 왕국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자유무역국가이자, 당대當代 중국의 한족 왕조들에 의해 동이東夷계 국가로 지목된 오월국吳越國이다. 이에 대해선 다른 장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이제 주산군도와 청해진의 위치를 놓고 주산군도의 상대적 중요성을 논해 보자.
우리는 앞 장에서 항주만 어귀에 위치한 주산군도의 지도를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보타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 장의 지도에서 보타산普陀山이라 표기됨)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보타도는 중국불교 관음신앙의 산실이자, 주산군도의 중심이다. 보타도란 이름과 관음신앙은 인도남부의 보타락가산普陀落迦山에서 유래하는데, 우리나라 강화도의 보문암普門庵, 여수 금오산의 향일암向日庵, 남해의 보리암菩提庵, 강원도 낙산사의 홍련암紅蓮庵 등이 모두 관음도량이다. 관음신앙은 항해 및 해양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타도의 불긍거관음원과 마찬가지로 섬이나 해안가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관음사찰도 원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항해사찰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라의 세계’에서 촐라국과 체라국을 통해 만난 남부인도를 이번엔 관음신앙의 시원始原인 보타락가산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쨌든 장지신은 당시 이곳 보타도와 관음사를 활동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근거지로 한 주산군도는 동중국해 연안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데다, 명주나, 양자강 하구의 양주를 지척에 둔 항로의 기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명주와 양주는 거대한 중국시장의 해상관문으로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와의 교역의 접점이었다. 더구나 이들 도시는 배후생산기지로서의 역할까지 맡았는데, 당시 명주 인근의 월주도요지는 청자의 집산지로 이름이 높았고, 의복기술로도 유명했다. 이곳의 의복기술의 역사는 역대 황실과 모택동, 주은래의 전담 재봉사를 배출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재봉사들의 명성은 ‘홍방紅帮’이란 이름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장지신은 당시 이러한 생산품을 동남아와 인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 공급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장보고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만灣에 불과한 황해를 뒷무대로 하여 산동과 일본을 잇는 적산항로를 담당하는 데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고작 13년간을 말이다.
더구나 장지신은 앞서 살펴본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이 말해주듯 독립적인 입장에서 활동이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장보고의 청해진은 당唐과 신라조정을 그 배경으로 한 만큼 활동의 제약이 따랐다. 장보고가 신라의 정변에 가담하고, 또 자신이 옹립한 신라조정과 갈등국면을 초래하다 암살당한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장보고와 장지신.
황해를 가로질러 한반도 남해연안을 따라 일본 규슈로 이어지는 적산항로를 지배한 장보고. 그리고 명주와 보타도에서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일본 규슈에 이르는 명주항로의 달인 장지신.
일본의 사료엔 장지신의 해운력과 함께 당시 발해 선단의 활동 법위가 광동에까지 이르렀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한 장지신의 활동역역은 필경 필리핀과 보르네오, 말라카 해협의 동남아 일대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 지역은 이미 수백 년 전 백제선단의 무대였음에 더욱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인도양과 아라비아 해를 거쳐 아프리카 동부 연안에까지 이르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와크와크’라 불린 극동계 선원들이 상아와 해구갑을 구하기 위해 동아프리카를 들락거렸다는 아랍의 기록이 그것의 희미한 흔적이리라.
필자가 지금까지 장지신에 주목해온 이유가 위의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청해진과 보타도의 친연성을 확인한 바 있다. 여기에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즉 청해진이 배후기지라면 보타도는 전진기지라고. 달리 말해서 장보고가 황해의 지배자라면 장지신이야말로 동아지중해의 지배자라고 말이다.
다른 장에서 따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해당 시대時代를 잣대삼아 선인들의 능력과 지혜를 가늠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시대가 과거로 멀어질수록 무조건 후대에 비해 그 능력을 저급하게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말이다. 이는 서양 역사학이 낳은 오류이다.
엔닌일기에 의하면 신라의 내부 사정이 산동 적산법화원에 알려지기까지 고작 10여 일 남짓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전달 속도에 필자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재당신라인 네트웍은 이러한 능력에 기초하여 당대 동아지중해 무역권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일본의 기록을 보면 당시 재당신라인에 의한 명주항로의 평균 항해일은 6~7일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장지신은 2차례나 3~4일 만에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장지신은 이러한 인물임에도 오늘날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요인은 장지신이 장보고와 달리 당唐이나 신라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당의 기미정책의 밖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이민족인 그에게 후대의 중국사가史家들이 주목할 일이 없었을 것이며, 송宋이나 명明의 통일한족漢族정권에서 반복하여 행해진 이른바 역사공정은 자신들의 통치권 내부의 이민족의 역사를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우리 해양사는 정확히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앞장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 걸쳐 우리 해양사의 궤적들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선造船 역사도 그만큼 오래되었음이 틀림없다.
이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2년 전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통나무배이다. 원래 길이가 4m 정도로 가늠되는 이 배는 소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8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알려진 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기의 배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이제 9C 당시 해운력의 기반인 선박의 규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의 기록에 전해오는 9C 신라선의 규모는 전장 20m 전후에 장폭비(전장/폭)가 4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계에선 명주항로를 취항하는 선박의 규모를 전장 30m, 전폭 8.5m, 배수량 280톤, 적재량 150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다 사찬사료인 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의 두타친왕입당략기頭陀親王入唐略記엔, (847년 7월) 장지신이 명주로 돌아가기 위해 일본에서 건조한 선박의 승선인원이 60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이보다 무려 650여 년 뒤인 1492년 신대륙을 향해 닻을 올렸던 콜럼버스의 선단이 3대의 선박에 총인원 88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장지신의 선박이 승선인원에서 무려 2배나 되는 셈이다.
▲ 신라선의 구조. [사진자료 - 서현우]
▲ 복원 신라선 모형. [자료사진 - 서현우]
선박의 구조는 평저선으로 상판과 하판의 비율이 2대 1이며, 하부엔 격자식의 칸막이 구조, 이른바 수밀격벽의 구조였다. 이는 일부가 침수되어도 항해할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한 구조로서 대양항해에 용이했을 것이다.
참고로 콜럼버스의 주선主船인 산타마리아 호는 전장 29m에 배수량 233톤이었다. 그보다 몇 년 후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의 주선 카브리엘 호는 산타마리아 호 규모의 반半에 불과했다. 이 당시의 서양의 선박은 신라선에 비해 장폭 비율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폭이 좁다는 말이다.
지난해 중국 산동성 봉래蓬萊시 앞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선(봉래3,4호) 중 비교적 형체가 많이 남은 봉래선 3호는 현존 전장 17.1m, 선폭 6.2m인데, 신라선의 장폭비에 대비하면 실제 전장 25m 정도로 추정된다.
이 선박의 발견에 대해 언론들은 고려선의 먼 바다로의 항해의 증거라고 앞 다퉈 보도한 바 있다. 한편으로 어느 교수는 ‘한선韓船이 확실한데 한선에 없는 수밀격벽 구조가 흥미롭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필자의 판단으론 수밀격벽 구조가 원래 우리 조선술의 전통인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양항해를 포기함으로서 불필요하게 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유명한 신안선에 대해 주의를 돌려 보자. 신안선은 1975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8천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원元나라 시기의 중국 선박이다.
이 선박의 구조는 전장 34m, 최대 폭이 10.3m로 추정되며, 첨저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선박에서 출항지를 나타내는 경원慶元이란 글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경원이 바로 9C의 명주로, 오늘의 영파이다. 다른 장에서 논하겠지만 영파는 명明나라의 개국으로 해금정책이 시행되기까지 재당신라인 후예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현재까진 신라선의 구조에 대해선 기록에 의한 추정일 뿐 실물이 발견되거나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더하여 신라선이 모두 평저형이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신안선에 대해 면밀히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아진다.
이제 신라와 아랍의 관계로 주의를 돌려보자.
필자는 앞 장의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의 두 번째 장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sila나, silah 등의 신라와 관련되어 보이는 지명들과 함께, 그 지명들이 아랍어의 어휘로도 존재함을 소개한 바 있다. 필자는 이들 지명과 어휘가 신라 선단의 아라비아 내왕의 증거들로 간주했다. 당시 신라 선단의 해상활동 능력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장보고와 장지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양주와 명주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수십 만 명이 거주한 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중국의 사서는 황소黃巢의 난(875~884) 때 황소군에 의해 살육당한 무려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중에 거의 대다수가 아랍 및 페르시아인이었다고 하니, 당시 중국에 진출한 아랍 및 페르시아인의 총 수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필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879년(헌강왕 5년)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처음 나타난 처용處容이 시기적으로 볼 때 황소의 난을 피해 당나라를 탈출한 아랍 또는 페르시아인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아마 이 무렵 처용 외에도 다수의 이방인이 신라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아라비아나 페르시아를 내왕한 신라인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신라선船은 규모면에서나, 항해능력에서나 아라비아의 다우선船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장보고나 장지신보다 100여 년 앞선 시기에 이미 해로海路로 인도와 아라비아 세계로 향한 신라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승려 혜초慧超(704~787)이다. 그는 723~727년간 인도와 아라비아 세계를 여행한 뒤 육로로 당나라에 귀환했다. 만약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여행에 대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아라비아 세계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그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다. 혜초보다 200여 년 앞선 시기의 백제 승려 겸익謙益은 바닷길을 왕복하여 인도를 다녀왔다. 이 외에도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인도에서 돌아오는 귀로에 689~691년간 수마트라 섬에서 찬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엔 자신과 같이 인도와 서역 세계를 여행한 7명의 신라승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 바닷길을 왕래한 인물들은 다른 장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위의 예들을 통해 우리는 아라비아 세계를 왕래한 뱃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단지 기록으로 전해오지 않을 뿐이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주산군도가 독립적인 정치․해운 집단이었음을 또 다른 근거를 통해 확인해 보자.
우리는 앞장에서 신라가 아랍세계에서 이상향으로 기록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전설의 섬 아틀라티스에 비유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상향으로 아틀란티스를, 사람이 사는 현실의 이상향으로 신라를 꼽았다. 그들에게 신라는 어떤 나라일까? 다음은 그들이 남긴 신라 지도이다.
▲ 신라군도1. [자료사진 - 서현우]
▲ 신라군도2. [KBS 자료사진 - 서현우]
놀랍게도 아랍인들은 신라를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보고 있었다. 위 지도의 신라군도가 그들이 남긴 신라지도이다. 그런데 신라군도는 비단 이 지도만이 아니다. 아래는 저명한 이슬람 학자인 정수일 박사의 논문에 소개된 14C 아랍의 문헌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동방의 맨 끝에 동쪽을 에워싼 바다가 있는데, 그 빛깔이 너무 검푸른 색이라 지프트(瀝靑력청) 해海라고 부른다. … 이 바다 속에 6개의 섬이 있는데 이곳을 신라군도라 한다.’ 〈앗 다마시키의 ‘대륙과 대양의 경이에 관한 시대적 정선精選’〉
우리는 위에서 6개의 섬으로 된 신라군도를 확인한다. 신라군도에 대한 아랍의 기록은 이미 장보고와 장지신의 시대인 9C의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슐라이만의 ‘중국과 인도 소식(851)’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10C 알 마스오디, 13C 알 까즈위니, 14C 앗 누와이리가 남긴 문헌에로 이어진다.
이들 아랍의 문헌이 말하는 신라군도가 바로 주산군도이다. 이 외의 아랍문헌들은 신라군도라고 적시하진 않았지만 신라의 위치가 주산군도임을 알리고 있다. 신라번이나, 보타도 불긍거관음원 앞바다의 신라초가 거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라군도를 중국과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군도라 기록한 최초의 시기인 9C와, 당시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삼았던 장지신이란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앗 다마시키의 문헌은 14C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에 해당되는 이 시기까지 아랍에선 여전히 신라와 신라군도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앞장의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 전혀 이상할 리가 없는 것이다.
장지신. 그는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장보고의 청해진과, 중국 대륙 내의 재당신라인 네트웍, 그리고 명주항로를 통한 일본을 배경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무역권을 지배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오늘날 세계에 산재하는 silla, sila, silah 등이 그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역사의 해석에 있어 소극적이었고 수동적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우리의 이러한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때로는 역사에 대한 적극성과 능동성이 요구될 때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현재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에서 진행된 모든 역사는 주권국 자신의 역사라 간주하는 것은 과거 그곳에서 시원하여 오늘날 그곳을 정체성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이웃 민족에 대한 난폭한 유린이다. 또한 그것은 전쟁에 비할 바 없는 정신에 대한 폭력이자, 힘의 논리이고 결과론적 논리이다.
우리는 중국당국이 티벳과 내몽골에 가한 오만함을 똑똑히 보아왔다. 동북공정은 티벳과 몽골역사에 대한 그들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동북공정은 역대 한족漢族통일정권이 반복해온 역사공정의 현대판이자, 중화주의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중화주의는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와도 전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당국이 내세우는 그들의 이념인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적대적인 논리임을 그들은 알아야할 것이다.
동북공정의 논리를 우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역사에 적용한다면 고대 시대 오늘의 중국 동북 3성省은 물론이고, 중세 어느 시기까지, 아니 어쩌면 근세에 접어들기까지 주산군도를 비롯한 중국대륙 연안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사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확실히 그렇다. 만약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최소한 한중역사가 혼재했던 무대였다.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논리이다.
이상으로 이 장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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