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장보고와 장지신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6.16 12:17:32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3>
3. 장보고와 장지신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위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평가받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의 동방의 등불에서 첫 문단을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아시아의 황금시대는 언제일까?
바로 장보고의 시대에서 수 세기에 걸쳐 아시아 바다에서 전개된 항해의 시대라 보아진다.
이즈음 고려 선단이 동아지중해와 인도양의 해상 실크로드를 수놓을 때, 멀리 아라비아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고려의 벽란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항구들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더불어 아시아 내륙, 사막의 곳곳에선 오아시스 문명이 만개했다.
고려의 개성은 중국의 광주, 항주, 장안이 그렇듯이 국제문화로 넘쳐났고, 인도의 캘리컷과 스리랑카 연안의 포구에선 고려의 무신정변과 십자군 전쟁의 전황들이 함께 화제로 오르내렸다.
이 시기 아시아는 일찍이 없었던 번영을 구가했다. 이 기간 아시아에서 전개된 교역량은 동 기간 세계 총 교역량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견인차라는 아시아 경제도 세계 총 교역량과의 대비에서 아직 이 시대를 뛰어넘지 못한다.
필자는 이 시대를 아시아의 황금시대라 일컫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장보고는 천재다.’
이는 9~10C 동서교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어시누스 대학의 휴 클라크 교수가 1992년 전라남도 완도 일대의 장보고 유적지를 직접 둘러보고 한 말이다. 클라크 교수의 이러한 평가엔 바로 9C의 시대상황이 배경으로 자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클라크 교수의 평가는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만약 클라크 교수가 장보고를 9C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상징으로 간주했다면 합당한 평가가 되겠지만, 전적으로 장보고란 한 인격체에 대한 평가라면 역사적 평가로선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시대상황과 유리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후자의 평가야말로 전형적인 영웅주의 사관의 반영일 뿐인 것이다. 즉 장보고의 활동과 그의 청해진 설치는 시대상황과 시대적 요구, 그에 따른 시대정신의 차원에서 바라봐야만 응당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9C는 이미 오랜 해양활동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던 데다, 동아시아 정치정세의 안정에 따라 그 활동영역의 확장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달리 말하면 장보고의 천재성은 시대를 뛰어넘은 독창성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동력으로 하여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장보고는 한 사람의 재당在唐신라인이자, 그 일원일 뿐, 재당신라인 자체는 아니었다. 더구나 신라방, 신라촌, 신라원 등은 장보고의 휘하에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상호 수평적 협력관계의 재당신라인 네트웍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진정한 해상왕은 장보고가 아니라, 재당신라인 전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장보고에게 붙여진 ‘해신海神’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시각일 뿐, 결코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 역사엔 신神이 개입할 틈이 없지 않은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필자는 앞서, 오늘날의 장보고가 있기까지 미국의 고故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가 몸담았던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연구소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 라이샤워 센터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장보고에 대해 라이샤워 교수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장보고와 동시대의 인물이자, 9C 일본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진 일본천태종 승려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이다.
엔닌은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자각대사慈覺大師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이른바 엔닌일기圓仁日記 덕분이다. 이 엔닌일기는 문자 그대로 불법을 얻기 위해 당나라를 순례한 여행기인데, 10여 년간(838.6~847.12)에 걸친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라이샤워 교수는 엔닌일기에 대해 ‘극동역사에서의 가장 위대한 여행기’라 평가했고, 일본의 두 학자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당나라 승려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의 하나로 간주했다.
어쨌든 실로 이 엔닌일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장보고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연히 라이샤워 교수가 장보고를 처음 접한 것도 바로 이 엔닌일기에서이다.
그런데 이 엔닌일기를 들여다보면 무대만 당나라였지, 마치 신라를 여행한 듯, 기록된 인물의 대부분이 재당신라인이다. 그만큼 당대 재당신라인의 활동상과 진면목을 오늘에 전하여 우리에게 재당신라인의 역사적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 일기 형식이라 나날의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하여 당시 동북아의 정치, 교통, 문화 및 생활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기까지 한다.
이에 비해 중국 측의 기록인 (구)당서나, 신당서, 자치통감 등은 동시대의 기록인 엔닌일기에 비해 1~2백년 후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재당신라인사회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구당서엔 장보고에 대한 기록조차 전무). 동시대의 기록으로 장보고에 대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두목杜牧(803~853)의 번천문집樊川文潗이 있으나, 이 역시 재당신라인사회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장보고에 대한 신당서의 기록(권220, 동이전, 신라전)과 삼국사기 열전의 그것은 모두 번천문집의 기록(권6, 장보고․정년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시 재당신라인에 대한 최고수준의 기록을 남긴 엔닌일기는 우리 해양사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 있어서 가히 보물과 같은 1급 사료인 셈이다.
이제 엔닌일기를 통해 당시의 재당신라인사회를 들여다보자.
당시 재당신라인사회는 오늘날의 산동에서 하남, 강소, 안휘, 절강에 이르기까지,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양자강揚子江, 전당강錢唐江과 그 지류를 잇는 대운하 교통로의 요지마다 신라방이나, 신라촌을 형성하여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 유명한 문등현 적산포(현재의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를 비롯하여 유산포, 묵주, 숙성촌, 연수현, 초주, 양주, 소주, 항주, 월주, 명주 등이 모두 재당신라인들의 거점지역이었다.
재당신라인들은 단순히 운송교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숯이나, 소금과 같은 당시 부가가치가 높은 황금산업을 직접 생산하는 등 생산과 물류의 전반에 걸쳐 독자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 비교하면 종합상사의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으로 재당신라인 거주지로서 도시지역엔 신라방坊이, 시골교외엔 신라촌村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자치기구로서 신라소所가 설치되어 책임자로 대사大使가 있었다.
독자들은 앞서 대당육전을 근거로 대사大使 직위가 당나라의 관직임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방과 신라촌의 행정책임자인 신라소대사를 통해 대사란 직위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어쨌든 이처럼 재당신라인이 당나라사회에서 독자적인 자치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으로 당나라의 전통적인 정책인 기미羈糜정책을 들 수 있다. 기미정책은 이민족에 대한 간접통제정책으로서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 초기 당 태종의 화이관華夷觀에서 유래하는데, 당 태종 자신이 수隋황실과 더불어 선비족의 척발拓拔씨에서 유래한 만큼 화이華夷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측천무후를 거치며 이민족에 대한 정책의 폭은 더욱 확대되었는데, 고구려의 멸망 후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遼東主都督朝鮮王에 봉하거나, 또 그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요동도독에 봉하여 고구려유민을 통제하게 한 것이 그 예이다. 더하여 유명한 고선지와 흑치상지 장군, 또 앞에서 언급한 난원경과, 최근에 묘지석 발견사실이 국내로 전해진 또 한 명의 백제유민출신의 무장 예식진 등도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령군의 설치나, 신라소 설치 등이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다 재당신라인사회에 대해 외면한 중국의 사서가 굳이 장보고와 정연을 따로 기록한 이유를 엿 보게 된다. 바로 장보고와 정연 두 사람은 무령군의 장수로 활약한 데다, 나란히 청해진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당서는 번천문집을 인용하여, 장보고가 신무왕을 세운 뒤 신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정연이 청해진을 맡았다고 기록함) 즉 당唐조정의 시각에서 두 사람은 당나라의 관리로 당나라에 공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볼 때 당나라는 중국의 역대통일왕조 중에 가장 개방적인 왕조였다. 그러한 요인이야말로 9C 동아지중해 바다를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당나라의 몰락 후, 열국 시대를 거치며 등장한 조광윤趙匡胤의 송宋나라 한족정권에 의해 중화주의가 급격히 강화되고, 이를 계승하여 강고한 중화사상을 체계화한 명나라는 급기야 바다와 단절을 선언한다.
또한 명나라에 뒤이어 탄생한 신생국 조선은 고려의 중상주의를 포기하고, 스스로 명나라 주도의 중화질서에 몸 담으로서, (비록 시간적 간격을 두지만) 사실상의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장보고와 청해진, 그리고 당시의 해상활동을 들여다보자.
오늘날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장보고를 왜 해상왕이라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반응은 단지 이럴 것이다.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의 활동을 방지하고, 황해를 지배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와 중국을 잇는 삼각무역으로 부를 쌓았다’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시대를 앞서나가 바다를 통한 무역의 중요성을 몸소 구현해 보인 인물이다’ 정도일 것이다. 사실 그 외에 뚜렷하게 설명할 것이 없다. 우리 사서에 기록된 장보고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해상활동에서가 아니라, 신라의 정치적 정변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의 장보고를 이해하기 위해 청해진과 당시의 항로에 대해 알아보자.
장보고의 청해진은 그의 당나라 내 근거지인 문등현 적산포와 일본의 규슈를 잇는 교역로, 이른바 적산赤山항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청해진은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양자강 하구의 양주揚州나, 항주만의 명주明州에 이르는 사단斜斷항로 및 그에 부속되는 탐라항로와의 교차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엔닌일기를 통해 확인되는 당시 재당신라인의 해상항로는 위의 적산항로와 사단항로에다, 일본규슈에서 탐라 남단의 동중국해로를 거쳐 직접 명주로 이어지는 명주항로가 그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필경 발해만이나 유구열도, 동해 연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또 다른 항로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다 중국내륙을 사통팔달로 연결한 운하망이 더해져 가히 바다와 육지가 하나의 교통망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명주와 양주에서 동중국해 연안을 따라 산동 적산포를 잇는 동중국해 연안항로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는데, 이 항로는 암초 등으로 항해하기가 불편했고, 연안지역이 낙후되어 경제적 가치도 낮은데다, 무엇보다 내륙 운하의 개통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하여 엔닌일기엔 엔닌이 일본 규슈를 출발하여 양자강 하구의 해능현海陵縣을 통해 당나라에 불법 입국한 뒤 입국허가에서부터 적산포를 통해 귀국선에 오르기까지 여행의 전 과정에 이르는 10여 년간을 재당신라인의 도움에 의해서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엔닌일기를 통해 당시 재당신라인들이 위 항로와 당나라 내 운하물류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장보고와 그의 시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아래는 중국 항주만 초입에 위치한 주산군도舟山群島의 지도이다.
주산군도는 오늘날 중국 최대의 군도로 섬의 기준에 따라 적게는 150에서, 많게는 600여 섬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요 섬은 주산도舟山島를 비롯하여 보타도普陀島, 대산도岱山島, 주가첨도朱家尖島, 도화도桃花島, 육횡도六橫島 등이다.
그런데 이 주산군도는 인근의 명주明州(지금의 영파)와 더불어 재당신라인의 주요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빈번했던 해상반란의 근거지로서, 중국사의 전개 속에서 우리와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주목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곳은 보타도이다. 보타도엔 중국불교 4대성지의 하나이자, 관음신앙의 산실인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 자리하고 있다.
불긍거관음원은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마찬가지로 당시 재당신라인의 항해사찰이었다. 또한 적산법화원이 엔닌이 머물렀던 곳이라면 동시대 이곳의 관음사는 일본승려 에가쿠(혜악惠萼)가 머물며 그와의 인연을 남겨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오늘날 적산법화원과 이곳의 불긍거관음원엔 일본관광객의 발길이 넘쳐난다고 한다.
▲ 보타도의 불긍거관음현. [사진-서현우]
보타도는 또한 고려 시대 충숙왕(1294~1339)과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 그리고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 등 당대 고려의 엘리트지식인이 다녀간 곳으로, 당시 고려인 여행자의 순례 코스이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이곳을 거점으로 활약한 재당신라인 중에 필자가 주목하는 한 인물이 있다. 장지신張支信이란 이름의 인물인데, 필자에게 있어서 장보고보다도 더욱 크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이제부터 독자들과 함께 이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장지신은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일본기략日本紀略, 삼대실록三代實錄 등과 엔닌일기를 비롯한 안상사가람연기자재장安祥寺伽藍緣起資財帳, 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 평안유문平安遺文 등의 사찬사료에 그 이름을 전해오는데, 실로 그는 장보고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는 동안 명주항로를 한번은 3일 만에, 또 한 번은 4일 만에 주파하여 오늘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명주항로의 베테랑 또는 쾌속항해가라 불리기도 한다. 또 일본에서 선박 한 척을 건조해서 돌아갔다는 기록을 통해 그는 항해술뿐만 아니라, 조선술에서도 일가견이 있음을 말해준다.
어쨌든 이 인물은 장보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 근거는 그의 근거지인 보타도와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과의 연관성에 있다. 아래에서 그것을 확인해 보자.
보타도 완도 석도진(산동) 제주도
상왕봉象王峯 상황봉象皇峯 적산赤山
법화동法華洞 법화사法花寺 법화원法華院 법화사法華寺
관읍사觀音寺 관음암觀音庵 관음사觀音寺
조음동潮音洞 조음도助音島
신라초新羅礁
독자들은 위의 비교를 통해 당시의 해상 네트웍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보타도와 완도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볼 수 있다. 즉 청해진이 자리했던 완도가 정작 장보고의 원근거지인 산동 석도진에 비해, 오히려 보타도와 더 많은 지명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 완도지도. 법화사와 관음사가 확인된다(가운데). [사진-서현우]
위 지명들은 오늘날에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완도의 조음도만 전해지지 않는데, 삼국사기 ‘지志, 제사祭祀’조의 ‘청해진조음도淸海鎭助音島’란 구절에서 고려시대까지 완도가 조음도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위에 보이는 제주도의 두 사찰은 조선 중․후기를 지나면서 불교의 쇠퇴와 사찰정비로 모두 사라진 뒤 20C 초에 관음사가, 중기에 법화사가 재건되어 현재까지 사맥寺脈을 잇고 있다. 이와 관련해선 다른 장에서 쿠빌라이와 백제사신을 통해 다시 언급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위 지명의 비교를 통해 보타도와 청해진의 관련성을 확인하게 된다. 한마디로 둘 관계는 형제의 관계이다. 그것은 단지 정체성의 공유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생각을 더해주는 근거가 장보고와 장지신의 공통의 성씨인 장張씨이다. 나아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에 대한 시각, 즉 ‘해도인海島人’에 이른다. 여기서 해도인은 삼국유사의 ‘파측미巴側微’와 연관해 볼 때 확실히 출신지를 뜻한다. 그렇다면 장보고의 출신지로서의 해도는 어디일까?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 어디에도 장보고가 청해진 출신이란 근거는 없다. 더구나 장보고가 신라출신이 아닐 가능성을 전제할 때 장보고와 연관되는 유일한 ‘해도’는 바로 보타도를 포함한 주산군도이다.
과연 장보고가 주산군도 출신일까? 이에 대한 정황적 뒷받침을 하나 소개한다. 산동성 적산법화원 인근의 사찰인 무염원無染院에 전해오는 무염원중수비의 내용인데, 김성호 박사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에서 인용한 것이다.
‘鷄林金淸押衙(계림김청압아) … 身來靑社(신래청사) 資誼鄞水(자의은수) ….’
위의 계림김청압아鷄林金淸押衙에서 계림鷄林은 신라를 달리 부르는 말이며, 압아押衙는 관직명인데 엔닌일기에선 주로 신라역어(통역관)를 지칭했다. 그 다음의 신래청사身來靑社는 ‘몸이 청사에서 왔다’는 뜻으로 출신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 청사靑社가 문제의 핵심인데, 다른 장에서 확인하겠지만 이 청사가 바로 주산군도이다. 마지막의 자의은수資誼鄞水의 자의에서 자資‘는 일반적인 재물 외에 ‘주다’ ‘취하다’ ‘쓰다’란 뜻을 담고 있는데다, 의誼는 ‘정情’이나 ‘의논하다’란 뜻으로서, 자의資誼는 ‘노닐다’, ‘활동하다’의 뜻이라 하며, 은수는 명주明州(현재의 영파) 남쪽의 강 이름으로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성) 봉화현 은현鄞縣을 발원으로 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뜻을 정리해보면 ‘신라인 압아 김청은 … 청사(주산군도) 출신으로 은수에서 활동했다.’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명주는 항주만에 위치해 있으므로 명주와 은수는 모두 주산군도와 지척의 거리에 있다.
무염원중수비의 위 내용은 무염원 창건(901년) 당시의 비문을 인용한 것으로, 우리는 당시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김청이 무염사 창건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보고와 적산법화원, 적산법화원과 김청, 김청과 주산군도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장보고와 주산군도 보타도와의 관계를 여기서 거듭 확인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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