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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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라’의 세계-3

자연정화 2016. 3. 10. 01:59

10. ‘라’의 세계-3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3.13  22:10:37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0>

 

3. ‘라’의 세계-3

우리는 앞장에서 파라婆羅 또는 서파라西婆羅란 우리 지명이 지금의 보르네오 서부의 폰티아낙(중국 기록은 쿤티안坤甸) 일대와 팔라완 섬, 또 파라셀 군도와 스프라틀리 군도임을 살펴보았다.

이 중의 팔라완 섬을 포함하여 필리핀 남부 섬들과 보르네오 북부 일대는 사마족族이라 불리는 종족의 생활 터전이다. 이 장은 사마족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일본의 각 TV방송이 앞 다투어 사마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여러 채널의 민영방송이 한 종족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표한 것은 필자에겐 좀 유별나게 다가왔다. 필자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로 정리된다.

하나는 종족 이름이 ‘사마’라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팔라완 섬 일대에 대량 분포하는 독무덤(옹관묘)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고대 일본 및 백제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먼저 ‘사마’에 대해 살펴보자.
‘사마’는 섬을 뜻하는 것으로 오늘날 한국어의 ‘섬’ 및 일본어의 ‘시마’의 원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501년) 대목을 보면 왕의 휘諱(생전의 이름)가 사마斯摩라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남으로 인해 ‘사마’라 이름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란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생전엔 사마왕으로 불리다, 사후에 무령武寧이란 존호가 붙여진 것이다.

이번엔 독무덤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자들은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군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아파트식 고분으로 유명한 나주 일대의 독무덤은 지금까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떤 사서의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나주 고분군은 규모면에서나, 출토품에서나 경주의 신라 왕릉급 고분에 필적하여, 고분 조성의 추정시기인 4~5C 무렵에 영산강 일대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무덤 묘제는 일본에도 존재한다. 일본 규슈의 야요이 시대(BC 5C~AD 4C)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엔 약 3천기의 독무덤군이 발굴되었는데 한일 학계에선 그동안 영산강 유역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쟁을 벌여왔다. 즉 한국 학계에선 영산강 유역이 규슈에 영향을, 일본학계에선 그 반대로 규슈의 요시노가리 문화가 영산강 일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이 내세우고 있는 임나일본부나, 삼한정벌론의 고고학적 증거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독무덤 묘제가 영산강 유역과 일본 규슈 일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무덤은 해양 문화의 묘제로서 아시아 해양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분포한다.

한반도에선 영산강 일대 및 해남, 강진을 비롯하여 가야와 신라 영역이던 경상도 각지에서도 발굴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경부고속철도 경주 구간 공사 중에 발굴된 초기 신라(사로신라) 시대 유적(경주시 내남면 덕천리)에선 무려 65기의 독무덤이 출토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아시아 해역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앞장에서 다룬 인도 남부의 촐라국 영역이던 타밀나두주州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와 태국은 물론, 나아가 란방공화국의 영토이던 보르네오 일대, 또 팔라완 섬을 비롯한 필리핀 각지와 인도네시아 열도의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로는 한일 학계의 위 논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아시아 해양의 독무덤 자체가 한국과 일본에 존재하는 독무덤의 공통 기원이란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한반도 독무덤이 시기적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후기 유형이랄 수 있는 영산강 일대의 왕릉급 고분들엔 독무덤의 크기가 시신을 담은만큼 크며, 주로 두 개의 항아리(독)를 이어 사용한데 비해, 남해안 일대의 초기 독무덤은 시신을 담을 수 없는 작은 항아리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양식이 시신을 담은 것이 아니라, 1차 장례를 마친 후 뼈만을 추려 항아리에 안치한 2차 장례의 흔적이란 것이다. 흔히 세골장洗骨葬이라 하는 초기 양식은 앞서 말한 필리핀,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해역의 독무덤의 일반적 형태이다. 세골장의 기원은 시신을 새에게 내맡기는 조장鳥葬 관습이 남아있는 히말라야와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독무덤은 서남아시아의 묘제인 세골장이 해양을 통해 한반도까지 전파된 후 토속묘제인 토광묘나, 목관묘, 또 목곽묘와 결합하여 영산강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시신을 직접 담는 대형 독무덤으로 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사마족과 팔라완 섬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가 인터넷의 영문사이트를 통해 검색해본 ‘사마족’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간략히 이렇다.

‘바다의 부족, 기원후부터 시작되어 9C 경에 확대된 중국인 교역의 결과로 북부의 여러 섬(민다나오 남서부)에서 남(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해안)으로 흩어진 종족.’

필자는 위의 내용에서 당시 교역의 주체가 중국인이라 함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른 장에서 밝힐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소개한 일본방송의 사마족에 대한 관심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사마’란 어휘에다, 사마족의 거주영역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독무덤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Sama-란 접두어를 사용하는 지명이 사마족 분포지역의 여러 곳에 존재함을 확인한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의 국가기원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문화의 기원 또한 고대 한반도 문화의 아류라 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한국과 일본 학계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선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북방의 시베리아에서 기원한다고 간주해 왔는데 반해, 일본 학계는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저가 남방에서 원류한다고 보아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본 학계는 그들의 문화가 북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한국과는 그 기원을 달리 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우리의 그것과 모순되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애써 외면해 왔다. 단지 일본 학계의 근거 없는 강변이라고만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본학계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와 함께 양국 문화의 동일기원설도 사실로 인정한다.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관점에서 어떻게 동일기원설이 성립될까?

그것은 한반도 문화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남방 원류의 요소를 띄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근래에 와서 집적되고 있는 연구결과들이 알려주고 있는데 신화나, 민속, 유물, 유적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 주목되는 부분은 독무덤의 분포지에서 공히 확인되는 문화적 요소로써 고인돌과 난생설화를 들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들 요소는 앞서 말한 남부인도에서 동남아시아 해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독무덤과 함께 존재한다.

필자의 기억에, 1980년대 일본의 어느 학자가 ‘일본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비교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논문의 내용은 양 신화가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필자에게 있어서 이 주장은 단지 허무맹랑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다 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문화는 중국보다 오히려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더 가깝다’는 대목을 접하곤 그 논문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위 일본학자의 견해는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독자들이 알고 있을 삼국유사의 얘기 하나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의 제48대 경문대왕에 관한 내용이다.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幞頭匠(복두는 귀인이 머리에 쓰는 관)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다음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벌을 받아 길어진 귀를 넓은 수건을 둘러 감추었다는 미다스 왕의 얘기이다.

‘미다스 왕의 비밀은 왕실 이발사가 갈대숲에 판 구멍에 입을 대고 속삭임으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흘러나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위 두 설화의 모티브는 누가 봐도 동일한 것으로 복두장과 이발사, 대밭과 갈대숲은 단지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근동의 ‘라’와 우리의 ‘~라羅’의 상관관계를 재차 확인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선견지명, 그리고 일본학계의 앞선 학문적 시야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로만글라스가 거저 우연이 아니며 고대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 범위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태양(天)을 뜻하며 그들 스스로 천손족天孫族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가까이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천손신앙과 밀접한 것이자, 앞서 확인했듯이 멀리는 중근동의 ‘라’에 닿아 있다.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코쿠邪馬臺國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의 이름에서 이름의 의미를 확인해 보자. 卑彌呼(한국음은 비미호)란 한자漢字는 단지 일본식 한자음의 차용일 뿐, 그 뜻은 히미코란 말 자체에 있다. ‘히’는 태양을 뜻하는 ‘해’의 고대어로 오늘날 일본에선 여전히 ‘히’라고 한다. ‘미’는 ‘~의’라는 현대 일본어의 の(발음은 ‘노’)에 해당하고, ‘코’는 현대 일본어에 남아 있는 ‘코(子)’로 아들 또는 자식이란 뜻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히미코는 ‘태양의 자식’이란 뜻으로 훗날의 천황이란 용어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위 히미코에 대한 2006.9.15자 뉴스메이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사는 히미코가 가야국 김수로왕의 딸인 묘견妙見 공주란 학계의 주장과, 히미코를 나타내는 우리식 한자음 비미호卑彌呼는 기원전 6C 남부인도의 비자야(Vijaya, 재임BC543~504)란 인물이 바다를 건너가 스리랑카에 수립한 싱할리 왕국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는 것이다. 즉 비미호는 싱할리 왕국에서 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발음이 우리식 한자음(비미호-히미코는 일본식 한자음)으로 쓰인 것으로 볼 때 고대 해양문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더하여 위 기사에서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 안라, 다라, 고차, 자타, 산반하, 졸마, 걸찬, 사이기, 염례, 탁순, 탁기탄 등 12개 소국 이름이 비자야 왕과 타밀출신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자녀 이름과 일치한다는 내용이다.
12자녀의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u, Taksun, Takkitan이다.

기사는 덧붙여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의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다.

히미코에 대한 기사의 소개는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론을 이어가자.
앞장에서 필자는 신라 관련 지명을 논하면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의 Sila 지명을 소개한 바 있다. Sila는 수도인 수바가 위치한 비티레부 섬의 해안가에 있는 지명이다. 지명뿐만 아니라, 원주민 이름에도 Sila가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전 피지 행정청 수장이던 Kotobalavu Sila씨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피지는 아시아 해역을 넘어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섬나라이다. 그럼에도 피지의 Sila가 지금까지 보아온 ‘라’와 관련하여 우연이 아님은 피지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리족의 태양신 또한 ‘Ra’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찌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겠는가?

더하여 인근의 통가(Tonga) 왕국을 보자. 국호 통가는 통가어語의 탕가야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태양을 의미한다. 이처럼 ‘라’ 및 태양과 관련된 지명이 인도양과 태평양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이제 이 장의 중심 내용인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Siladen이란 지명을 소개하겠다. 아래 지도를 보자.

 

▲ <지도1> 술라웨시 섬의 마나도 위치.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2> 술라웨시 섬.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3> 마나도 만과 Siladen 섬.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술라웨시 섬은 보르네오 섬 동쪽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령으로 거의 한반도 면적만큼의 넓이를 가진 큰 섬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술라웨시는 셀레베스Celebes로 와전된 까닭에 현재도 셀레베스라 일컬어지기도 하나, 정식 이름은 어디까지나 술라웨시이다. 그런데 술라웨시는 ‘술라’와 ‘웨시’의 합성어이다.

이 글을 쓰기까지 필자가 국내의 인도네시아 관련 학자 몇 명에게 확인을 시도했으나,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알 수 없었지만, 필자의 판단으론 ‘술라’ 또한 분명 ‘~라’ 지명의 하나이다. 어쨌든 이 술라웨시 섬의 북부 마나도 일대는 필자가 보기엔 분명 옛 우리 해양사의 무대인데. 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확인한 근거들이다.

첫째, 위 지도에 보이는 Siladen 섬을 들 수 있다. 영어식으로 ‘실라덴’으로 읽혀지나, 이 역시 술라웨시를 셀레베스라 부른 포르투갈인에 의한 것으로 현지인들은 ‘실라단’ 또는 ‘실라당’에 가깝게 발음한다. 필자는 이 ‘실라단’이나 ‘실라당’이 ‘신라땅’으로 연상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지도3>에 보이는 사각형으로 둘러쳐진 섬이 부나켄 섬으로 위 지도 상에선 나타나지 않지만 섬의 남쪽 해안에 휴양지로 유명한 셀라셀라Selasela가 있다. 이 셀라셀라 또한 포르투갈식 표기로 필자는 원래 ‘실라실라’란 발음의 변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위 Siladen 섬은 스킨스쿠버 장소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도 상에 보이는 실라덴포인트Siladenpoint가 그 중심이다.

둘째, 마나도 일대의 주민의 인종 구성과 문화적 특성이다. 현지를 여행해 본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특이하게도 마나도 지역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외모 상으로 우리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극동계 인종이다. 당연 남아시아 인종에서 볼 수 없는 몽골반점이 나타나고, 부계로 이어지는 Y-염색체가 한반도의 우리와 친연성을 지닌다.

또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포르투갈 식민지의 영향으로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이 지역은 인구의 90%가 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유독 기독교 세력이 강해 현재 종교분쟁으로 가끔 뉴스의 국제 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술라웨시 북부 일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포르투갈 식민지에 편입된 곳인데, 그 이유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즉 이곳 자체가 향로 산지이자, 동쪽에 위치한 향로제도로 유명했던 말루쿠 제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문화적 요인으로 살펴보면 우리와 같이 매운 음식을 선호하고, 정월대보름을 기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인돌의 존재는 이곳이 보다 이른 시기에 아시아 해양사의 무대였다는 반증이다.

셋째,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이곳 일대 미나하사 족에 전승되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전승이다. 다소 길지만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옛날 옛적 어느 호젓한 산골짜기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달 밝은 밤이면 이 연못에 어여쁜 아홉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리고 새벽이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아름다운 선녀들이 노는 것을 근처 숲속에서 숨을 삼켜가며 황홀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인근 마을에 사는 떠꺼머리총각 나무꾼. 하룻밤은 이 나무꾼 총각이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며 노는 사이 살금살금 기어가 선녀 옷 하나를 감춘다. 목욕을 끝낸 선녀들이 옷을 찾아 입는데 한 선녀의 옷이 없다. 결국 여덟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지만 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때 나무꾼이 나타나서 혼자 남아 어찌할 바 모르는 선녀를 위로하고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아내로 삼는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나무꾼은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감추어둔 옷을 자기의 아내가 된 선녀에게 되돌려준다. 그런데 아내는 옷을 입자마자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나무꾼은 매일같이 괴로워하며 연못 주위를 배회하지만 한번 하늘로 올라가버린 자기의 아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무꾼의 아내였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자기의 남편이었던 나무꾼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동료 선녀들과 함께 그 연못으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연못 주위에 지쳐 쓰러진 나무꾼을 일으켜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위 설화는 지금은 고인이 된 태국 치앙라이 대학의 교수이자, 문화탐험가였던 김병호 선생의 탐사기 ‘우리문화 대탐험(황금가지 출판, 1997)’의 인도네시아 마나도 탐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금강산을 무대로 한 우리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넷째, 위 미나하사 족의 언어에 있다. 이 또한 김병호 선생이 채집한 것으로서 미나하사 족의 언어 중에서 발견한 기본 어휘를 살펴보자. 미나하사 족은 1인칭 대명사를 ‘냐’, 2인칭대명사를 ‘니’라 한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아시아 일대의 문화를 탐방해오던 김병호 선생은 오로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확인을 위해 마나도를 방문하느라, 짧은 일정으로 마나도 일대를 심층 취재하진 못했다. 앞으로 우리 학계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나하사 족은 또한 우리와 같은 묘비석을 갖는 무덤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지도를 통해 확인하면 술라웨시 북부 지역은 극동과 호주 대륙을 직선(가장 단거리)으로 잇는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중국 수당隋唐 시대의 사서에서 캥거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우리의 삼국시대 이전부터 극동과 호주는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술라웨시 북부는 그 교통의 거점이며, 위에서 확인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해양항해의 중심 주체는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었음이 분명하다.

근거를 더한다면 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필리핀 남부 해역에 걸쳐 있는 지명 중엔 분명한 우리의 지명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확인한 지명만으로도 다물란Damulaan과 다무로그Damurog 등 담로계 지명과, 실라브Silab, 실라고Silago, 실라그Silag 등 신라계 지명이 각기 수십 군데 존재한다. 아래는 필리핀 술루제도의 지도이다.

 

▲ <지도4> 술루제도(붉은 색 표기). [자료사진 - 서현우]

 

술루제도는 팔라완 섬에서 마나도를 잇는 바다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다. 필자는 술루Sulu란 말이 술라의 변형이라 생각하는데 어쨌든 술루제도의 홀로 섬이란 이름의 섬을 소개해 본다.

영어식 표기론 Jolo라 하고 실제 발음은 ‘홀로’이다. 홀로 섬엔 최대종족인 타우수그 족과 바자우 족, 시나마 족이 거주하는데 타우수그 족은 필리핀 무슬림의 최대 종족으로 12~13C에 민다나오 북부에서 이주해온 종족이고, 바자우 족은 사마 족 계통의 종족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사마.바자우 족의 언어의 방언인 바랑깅지어語로 ‘홀로’는 ‘심심한’, 또는 ‘외로운’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의 홀로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홀로 섬엔 Silat란 지명이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다음 장에선 무대를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 장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