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보고, 신화의 이면 -2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6.08 22:55:05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2>
2. 장보고 신화의 이면-2
필자는 앞장에서 지금까지 확인되는 사서의 기록에 의거하여 장보고의 고향과 조상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낭설이 마치 정설인양 널리 퍼지고 있어, 이 장에서 우선 그것부터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이 문제를 굳이 다뤄야할지 쉬이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미미해 보이는지라, 그냥 지나치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역사는 학계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과 함께 숨쉬는, 대중에게 있어 정신적 공기空氣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고증과 상호비판을 거쳐 객관성을 담보하여야 하고, 또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공기의 신선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제기하는 장보고에 대한 잘못된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의 일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보고의 부조父祖는 장백익張伯翼으로 중국 절강성 소주부蘇州府 용흥리龍興里에서 출생한 중국인이었으며 신라국에 여러 차례 왕래하다가 귀화하여 현재의 완도읍 장좌리에 정착하였다.’
필자가 위 내용을 처음 접한 계기는 지난해 인터넷을 통한 모 교수의 역사 강의 동영상에서였는데, 인동장씨仁同張氏 대종보大宗譜에 근거한 것으로 그 강의에서 마치 진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때에야 필자는 같은 내용이 전국문화원 연합회의 웹페이지와 고등학교역사모임, 또 완도관광정보 등에서 출처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사실로 다뤄지고, 심지어 2001년 장보고에 관한 한 저작물에서까지 인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위 내용을 접하는 순간 필자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위 내용의 소주蘇州야말로 당시 신라방이 위치한 곳이자, 재당신라인의 활동거점이었던 송강구松江口란 포구가 자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신라방과 송강구가 여러 문헌에 나타남을 필자는 알고 있었다.
필자는 관련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확인한 인동장씨대종회 사이트엔 이상하게도 장백익과 장보고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동장씨태상경공파 사이트에서 문제의 족보원문을 찾을 수 있었다. 아래는 그것을 직접 인용한 것이다. (편의상 띄어 씀)
‘張伯翼장백익, 字大號자대호, 官中郞將右僕射관중랑장우복야, 本中原浙江省蘇州龍興府人본중원절강성소주용흥부인, (장백익, 자는 대호, 벼슬은 중랑장우복야, 본래 중국 절강성 소주용흥부 사람이다.) 張保皐장보고, 字正集少字弓福자정집소자궁복, 唐祖(?-필자)右丞相來東國來淸海鎭大使당조우승상래동국래청해진대사, (장보고, 자는 정집, 어렸을 때 자는 궁복, 당나라 우승상을 지내다 청해진 대사로 왔다.)’ 〈인동장씨 대종보 권1, 구보舊譜〉
대종보는 이어 장보고의 증손인 장원張源이 당말唐末의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로 망명하고, 그의 아들 장정필張貞弼이 고려 태조 왕건에 입조하여 공을 세움으로서 그를 시조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원문을 확인하자,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절강성소주용흥부’에서 절강성浙江省의 성省은 기실 원나라에서 시작된 지방행정단위이며, 소주는 예나 지금이나 절강성이 아니라, 강소성에 속한다는 점이다.
둘째, ‘용흥부龍興府’의 부府는 당의 지방제도(주현州縣제도) 하에서 당 현종 대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곳에 설치되었으나, ‘용흥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부府는 송나라(북송) 시기부터 주州와 현縣을 거느리는 행정단위로서 일반화된 것으로, 이 경우에도 단위가 바뀐 ‘소주州용흥부府’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셋째, ‘당조우승상’에서 조祖는 조朝의 오기라 하더라도, 승상은 우리의 정승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장보고가 우승상을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점이다. 이 글의 본론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당나라의 군진절도사 하의 직급인 대사大使 직급에 그쳤을 뿐이다.
넷째, 장보고에서 장원張源에 이르기까지의 2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 마지막 문제점이 가장 결정적 결함이라 판단하고, 인동장씨대종회에 연락을 취했다. 그것은 혹시 추가내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결과를 정리하자면, 장보고의 후손이라는 위 장정필張貞弼은 인동장씨가 아니라, 안동安東장씨의 시조란 것이다. 인동장씨 측에선 여태 자신들이 안동安東장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간주해 왔으나, 근래에 이르러 분파사실에 대해 종문 내부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며, 한 마디로 장보고와의 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위 내용의 근원인 안동安東장씨 측의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아래는 안동장씨중앙대종회 사이트에 실린 내용이다.
‘자字는 정집正集이요, 어릴 때 이름은 궁복弓福인데 또 다른 이름은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관官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이시고, 장군의 아버지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사람이신데 당나라에서 중랑장우복야中郞將右僕射를 지냈으나 750년경(경덕왕) 신라로 귀화하였고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 〈안동장씨중앙대종회 사이트〉
먼저 위 내용 중에 (자는 정집 제외) 전반부와,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고 한 후반부는 삼국사기를 인용하고 유추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원문에 있을 우승상이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운데에 보이는, 장군의 아버지가 ‘절강성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안동장씨의 다른 기록에서도 일관적으로 확인되는데, 앞서 본 인동仁同장씨의 소주용흥부蘇州龍興府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절강성엔 소흥부蘇興府는 물론이고 소흥蘇興이란 지명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글자가 다른 소흥紹興이 존재하는데, 소흥紹興은 현재 항주 만灣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재당신라인의 거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소흥紹興은 당시 월주越州로 불리웠으며, 앞서의 소주蘇州완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서 8~9C 당시 부府를 설치하기엔 변두리 성읍城邑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안동安東장씨대종보의 기록 역시 장보고와 시조인 장정필을 잇는 중간의 2대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대先代의 자세함에 비해 후대後代의 휘諱(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소주용흥부’든 ‘소흥부용흥’이든 장보고의 원적지로서의 지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보고의 부조父祖로 기록된 장백익張伯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그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강단에서, 또 저서에서 진실인양 오도되어온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벌어졌다. 필자가 이 장의 서두에서 타 종문宗門에 대해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이 글을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거저 두 종문에 양해를 구할 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이다.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가 입신하게 된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 직위를 두고 무령군이 실상 백제계의 규합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더불어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의 말을 근거로 장보고가 기실 신라가 아닌 당나라 사회에 근거를 둔 인물일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제 여기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들을 통해 논의를 이어가자.
우선 장보고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알다시피 장보고는 평로치청이 멸망한 지 9년 만인 828년 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에서 각각 ‘귀국歸國'과 ’환국還國‘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시각은 당唐에서 성공한 장보고가 금의환향한 후 신라조정을 설득하여 당시 황해에서 발흥하던 해적소탕을 위해 청해진 설치와 함께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되고 군사 1만 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엔 중대한 결함이 존재한다. 더불어 이러한 해석은 그동안 장보고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장벽이 되어 왔다.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가?
우리는 앞장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신라본기 문성왕 조)와 삼국유사(신무대왕, 염장, 궁파 편)로부터 신라조정의 장보고에 대한 시각의 일단을 확인한 바 있다. 바로 ‘해도인海島人’과 ‘파측미巴側微’가 그것이다. 이는 일개 ‘섬사람’과 매우 ‘미천한’이란 뜻으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결정적 명분이었다.
이를 근거로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의 신분이 신라 주류사회는 고사하고 골품제도의 바깥에 위치했음을 논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기존 해석에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한다.
즉 신라조정은 어떻게 이런 미천한 신분의 인물에게 청해진을 맡기고 대사大使라는 관직에다, 1만의 병권을 맡겼는가?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신분적 배타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장보고는 어디까지나 당唐에서 공을 세웠을 뿐, 자신들과는 생면부지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인물이기에 신라조정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大使라는 칭호이다. 대사大使는 신라의 관등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17관등 중의 12관등에 대사大舍가 있긴 하나, 문자도 다를뿐더러 하위직이라 장보고의 직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계 일각에선 대사大使 직위가 장보고에만 한시적으로 수여된 신라의 특수직위라 보아 왔다. 그 어떤 근거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다. 대사大使란 직위가 당唐의 관등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대체로 군진의 대사大使와 부사는 모두 겸인을 거느린다. (범제군진대사부사개유겸인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傔人)’ 〈대당육전大唐六典, 권5 병부조兵部條〉
여기서 우리는 대사大使가 당의 절도사 휘하의 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는 기존에 알려져 온 신라의 특수 직위가 아니라, 당唐 조정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제수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당에서부터 대사 직위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판단으론, 치청 토벌 후 장보고가 당 조정으로부터 치청이 지배하던 문등현(오늘날의 산동성 내)의 땅을 하사받아, 적산포와 법화원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당에서 이미 대사大使 급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보고가 신무왕을 옹립한 공으로 신무왕과 문성왕에 의해 각각 봉해진 감의군사感義軍使나, 진해장군鎭海將軍 직함에 대해 건국대 김광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에서 ‘당나라 풍의 관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필자의 판단으로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전이나 이후의 중국의 역대조정이 삼국이나 고려의 국왕에게 내린 칭호에서 숱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한다면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신라조정이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장보고에게 당의 관작을 수여하거나, 계승토록 한 것이 되기에 말이다. 이에 우리는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한 중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주장의 내용은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관할영역이 아니며, 청해진대사의 직위는 당의 치청절도사 휘하의 관직이란 것이다.
일찍이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김성호 박사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에서 청해진의 성격을 당唐에 의한 조차지라 규정했다. 즉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근거로 왕위다툼에 휘말렸던 김우징金祐徵(후의 신무왕)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 도망간 곳이 청해진이란 것이다. 이에 신라조정은 일개변방의 군진인 청해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김성호 박사가 밝힌 결정적인 근거는 따로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開成三年秋七月(개성3년 추칠월) 新羅王金祐徵(신라왕김우징) 遣淄靑節都使奴婢(견치청절도사노비) 帝矜以遠人(제긍이원인) 詔令却歸本國(조령각귀본국), (838년 가을 7월 신라왕 김우징은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지만, 황제는 멀리서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조서를 내렸다)’ 〈책부원구冊府元龜 권980, 외신부통호조外臣部通好條〉
여기서 주목할 점은 838년 7월이면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기인데, 당나라에선 김우징을 신라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근거하여 김성호 박사는 김우징이 청해진 시기에 이미 당 조정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그 배경에 장보고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위 내용에 대해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인 83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달에 김우징이 죽었다는 점과, 구당서舊唐書 천문조天文條 및 일본의 엔닌圓仁일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신라본기가 장보고와 청해진의 정치사적 무게를 말살하기 위해 기년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위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지면상 다 다룰 수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엔 이 외에도 중국의 기록과 기년이 다른 경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진의 치외법권적 성격은 신라본기 문성왕(신무왕의 아들) 조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일길찬 홍필弘弼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해도로 도망갔는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해도가 바로 청해진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런 존재였을 것이다. 알다시피 김우징은 청해진에서의 신변안전은 물론이고 군사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기까지 장보고의 결정적 도움에 힘입었다. 이러한 사정이 장보고가 암살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하여 무엇보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장보고 사후(841년)에 발생한 나당간의 외교분쟁이다. 무려 5년간이나 외교가 단절된 것이다. 결국 신라사신의 당唐입조(846년)로 외교가 재개되긴 했지만, 신라는 장보고의 죽음에 대해 변명부터 늘어놓아야 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엔 장보고가 그해(846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여 장보고로 인한 외교적 교착상태를 은폐하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가 왜 ‘당에 보고가 있다’고 한 것인지 그 배경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엔 장보고의 성씨인 장張씨를 통해 장보고가 ‘백제계 재당신라인’이란 근거에 접근해 보자.
현재 우리나라의 장張씨는 위에서 언급한 인동仁同 및 안동安東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흥성興城과 목천木川 등 30여 본本이 존재한다. 이 중에 덕수德水와 절강浙江 본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안동 본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져 왔다. 덕수와 절강은 각각 고려조와 조선조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귀화한 것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인동仁同 측에선 안동安東과의 혈연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데다, 조선 중기의 백과전서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엔 인동의 유래를 따로 밝히고 있다.
어쨌든 여태까지 안동安東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짐으로서 우리나라 장張씨는 모두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되어, 흔히 장張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엔 문제가 있다. 바로 백제의 성씨姓氏에서 장張씨의 존재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1960년 중국 하남성(노산현 대왕촌)에서 발견된 백제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난원경難元慶의 묘지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연구의 결과로 위 난難씨를 포함한 장張씨와 왕王씨 화和씨 등이 백제의 성씨이며, 이들 성씨가 부여족 계통의 성씨임이 드러났다. 이로서 우리는 왕인王仁 박사의 왕씨가 백제의 일반적 성씨 중의 하나임과, 기존의 중국사서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성씨에 더하여 백제엔 실로 다양한 성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732년 발해 해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登州(산동성 북단)를 공격한 발해 장군의 이름이 장문휴張文休이다. 또 장보고와 재당신라인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기록엔, 재당신라인으로서 장영張詠, 장종언張從彦, 장지신張支信, 등의 장씨들이 보인다. 이러한 점 등으로 볼 때 본래 성이 없던 궁복弓福이 후에 입신하여 성과 이름을 얻어 장보고라 한 것이란 기존의 시각엔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장張씨 성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일반의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우리나라 성씨족보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조의 기원이 까마득한 옛날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의 신화시대의 인물인 삼황오제에까지 연결하여 기록된 것도 허다하다.
물론 한국사는 아시아동북사의 일부이며 그에 따라 씨족의 이동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족보의 기원은 중국 북송北宋 시기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때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럼에도 시조의 기원을 무조건 멀리 잡아 중국에 연결시킨 것은 필자의 판단으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기초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쫓던 조선 후기의 사대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진다. 한편으로 우리 고대사 사료가 워낙 망실된 결과가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만이 장보고가 ‘백제계 재당신라인’이란 근거의 전부는 아니다. 다음 장에선 ‘재당신라인’의 활동을 통해 우리 해양사의 전모와 기원에 다가가 보자.
'홍익인간·인류공영 > 고리,조선,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신라군도 (0) | 2016.03.10 |
---|---|
13. 장보고와 장지신 (0) | 2016.03.10 |
11. 장보고, 신화의 이면-1 (0) | 2016.03.10 |
10. ‘라’의 세계-3 (0) | 2016.03.10 |
9. ‘라’의 세계 -2 (0) | 2016.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