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보고, 신화의 이면-1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07.06.01 12:16:34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1>
3장 황해-동아지중해 세계
1. 장보고, 신화의 이면
지금까지 필자는 독자들과 함께 천하전여총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학문적 파편을 따라 우리 역사에서 그동안 소홀히 취급해온 해양사의 궤적을 추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그 기원과 전개를 더듬어보면서 우리 해양사의 전모에 다가가 보자.
이 장에선 우선 우리 해양사의 상징적 인물인 장보고를 통해 필자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해상왕 장보고. 9C 동아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세계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오늘날 한국사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사의 영웅으로 등장한 시기는 극히 최근인 20C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필자와 같은 40대 중반의 세대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에서야 장보고는 국사 교과서에서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1910~1990) 교수의 공헌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라이샤워 교수의 공헌은 1955년 자신의 논문 ‘엔닌圓仁의 당唐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서 장보고에 대해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The merchant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란 평가와 극찬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라이샤워 교수는 오늘날 미국학계에서 동아시아학의 아버지라 불리기까지 하는 인물이기에 그의 평가는 우리 한국인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 하에서 자신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던 주일대사(1961~1966) 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동아시아학과 함께 그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라이샤워 교수의 공헌이 있기까지 장보고는 우리 역사의 주변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식민지 사학의 유산과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학계의 더딘 행보에도 있었겠지만, 연구 인력과 연구비의 부족이라는 학계의 현실적 풍토도 분명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해방이후의 수십 년간의 한국사는 일제하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정립한 이른바 ‘조선사’를 가감 없이 이어받은 ‘한국사’였다는 것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하여 장보고란 역사상의 인물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총독부 어용학자들에 의해 제대로 주목받았을 리도 없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말까지에 있어서 장보고에 대한 연구는 고작 진단학회의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선생의 논문. ‘고대의 무역형태와 라말羅末의 해상발전에 취取하여(하)’(진단학보-권2, 1935년)와 위 라이샤워 교수의 논문만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위 김상기 선생의 식민지하 진단학보를 통한 연구발표와, 또 그의 장보고에 대한 ‘해상왕국의 건설자’란 평가에서 다소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랜 역사의 망각을 뒤로 하고 장보고는 이제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실체와 그가 활약했던 9C 해양사에 대한 이해는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장보고,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문제는 우리 해양사는 물론 우리 역사의 전모에 다가가는데 중요한 열쇠이자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선 9C 황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바다로 항해하여 장보고와 그를 낳은 역사적 배경인 당시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9C의 황해는 동아지중해 세계의 중심적 무대였다. 더불어 세계사적 시각에서 바라보아도 황해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의 동아지중해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로 이어지는 인도양 세계는 가히 세계사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의 서양지중해 세계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급속히 쇠퇴한 뒤, 신흥 사라센 제諸국의 영향 하에서 예전의 활력과 현저한 거리가 있었다. 또한 지중해 북쪽의 유럽 내륙의 상황은 오늘날에 중세암흑기라 평가할 만큼 오랜 정체기로서 역사적 기여가 미미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당唐 제국의 문화수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대 최고수준의 문명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시기는 사라센 세계의 동아시아 행 러시의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세계사 전개의 또 하나의 축이랄 수 있는 사라센과의 접촉은 가히 동아시아를 문명집산과 융합의 용광로로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바다와 육지에 걸쳐 넘쳐나는 활력의 9C 동아시아야말로 당대 세계사의 중심축이었다.
이 시대에 대한 라이샤워 교수의 평가를 그의 논문인 ‘엔닌의 당나라 여행’을 통해 들여다보자.
'…유럽에 있어서 경제적 성장 및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변화는 15~16C 서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재빨리 이룩된 세계의 바다에 대한 제패와, 수세기 동안 이 바다 위에 존재하였던 해상무역에 의하여 촉진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서양의 시작을 그 시기로부터 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널리 세계사적 견지에서는 "현대"를 당나라 때 세계 무역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을지 모른다.…' <라이샤워의 ‘엔닌의 당나라 여행’에서>
이 위대한 시대에 당당히 바다의 역사를 담당한 주역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장보고로 상징되는 ‘재당신라인’ 집단이었다.
필자가 위에서 ‘신라인’이 아니라, 굳이 ‘재당신라인’이라 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장보고가 신라 출신인지, 아닌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 없기 때문이며, 또 과연 9C의 신라가 해운정책을 주도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보고로 상징되는 재당신라인의 근원에 대한 문제이자, 장보고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적 의문이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의문은 장보고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사료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필자는 사료의 어디에도 장보고가 신라 출신이란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장보고는 신라출신’이란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다. 그것은 왜일까?
다음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두 인용문을 살펴보자.
'장보고張保皐(신라기엔 궁복弓福)와 정연鄭年(연은 連이라고도 함)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皆新羅人) 다만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但不知鄕邑父祖)… 두 사람이 당에 참가하여(二人如唐)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달리고 창을 쓰자 능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보고가 환국하여(後保皐還國) 대왕(흥덕왕)에게 말하기를…,'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연 편>
'여름 4월에 청해대사 궁복, 성은 장씨(일명 보고)가 당의 서주로 들어가(入唐徐州) 군중의 소장이 되었다가(爲軍中小將) 귀국하여 왕을 뵙고(後歸國謁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條>
위의 내용이 한.중.일 삼국의 사서 중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언급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장보고가 신라출신이란 지금까지의 정설은 그에 대한 기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관련 내용에 등장하는데다, 위 삼국사기의 ‘여당如唐’이나 ‘입당入唐’, 그리고 ‘환국還國’이나 ‘귀국歸國’ 등의 구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갖는 의문은 다음의 이유들에서이다. 독자들과 함께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열전의 ‘신라인’이란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과 부조父祖를 알 수 없다는 대목이다.
그런데 장보고가 누구인가?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을 세운 1등 공신이 아닌가? 이 공로로 장보고는 신무왕으로부터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해지고 식읍食邑 2천 호戶를 하사받는다. 또한 신무왕이 죽자 그 아들인 문성왕으로부터 진해장군鎭海將軍에 봉해지고 장복章服을 받기도 한다. 비록 장보고가 이후 신라왕실과 척을 지고 역사의 죄인으로 전락했다손 치더라도 고향과 가계(부조父祖)조차 알 수 없다는 사서의 기록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위 인용문 열전의 ‘당에 참가하여(여당如唐)’란 대목이 신라본기의 ‘입당入唐’과는 어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다. 즉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갔다’라는 직접적 표현이 아닌 것이다. 더하여 ‘신라인’이란 구절도 신라출신이라고만 단정할 수도 없다고 보아진다. 한마디로 ‘당에서 출생한 신라인(반도인 또는 삼한인)’이라고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셈이다.
셋째, 위 인용문 신라본기의 ‘입당서주入唐徐州’란 대목이다. 여기서 ‘입入’의 직접적 대응이 ‘당唐’이 될 수도 있지만 ‘당서주唐徐州’가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해석의 차이가 있는데, 즉 ‘(신라에서) 당에 들어간 뒤 서주로 향했을 경우’와 ‘(신라나 당의 다른 곳에서) 당의 서주에 들어갔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국還國‘과 ’귀국歸國‘은 삼국사기 편찬 시 신라출신임을 전제로 한 착오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장보고에 대한 삼국사기의 열전의 내용은 신당서新唐書 및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장보고를 신라출신이 아니라, ‘재당신라인’ 출신이라 보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더불어 앞서의 ‘신라인’과 ‘재당신라인’을 구별한 이유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9C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 일대는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였다. 이에 당시 중국대륙의 동안에 삶의 터전을 영위해 오던 옛 백제 및 신라의 후예들은 당연히 신라인으로 불려졌다. 비견한 예로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들이 오늘날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인(혹은 한국계)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더구나 백제를 멸망시킨 당唐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영토내의 백제의 후예들을 백제인이라 칭하는 것은 만부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 정도로 장보고가 신라출신이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고작 그 정도로 필자가 장보고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질 리가 있겠는가?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7년 봄 3월에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맞이하여 차비(次妃)를 삼고자 하니 조신(朝臣)이 간하기를, “부부의 도는 사람의 대룬大倫입니다. 그러므로 … 지금 궁복은 섬사람인데(今弓福海島人也) 그 딸이 어찌하여 왕실의 배필이 되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조條>
‘… 궁파(弓巴)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매우 미천한 사람이오니(巴側微)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과 염장, 궁파 편>
이 두 인용문이 앞서의 것과 함께 장보고의 출신, 또 그와 관련된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의 전부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여타 사료들은 장보고의 활약상이나 인물됨을 전할 뿐 출신에 대해선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위 내용의 해도인海島人과 파측미巴側微에서 독자들은 장보고가 원래 신라 주류사회와는 관련이 없던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장보고가 신라 신분제도의 골간인 골품제骨品制의 골제(성골과 진골로 나뉨)는 차치하고, 6두품제의 가장 하층(1두품)에도 끼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장보고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이다.
독자들은 또 장보고의 이름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엔 궁복弓福, 삼국유사엔 궁파弓巴라 했음을 보았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각에선 그의 원래 이름이 궁복 또는 궁파였는데 입신출세한 이후에 장보고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는 어불성설이다. 궁복 또는 궁파는 우리 사서의 기록일 뿐 중국에선 장보고張保皐라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고, 특히 일본에선 이름의 뜻을 높여 장보고張寶高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의 재당신라인에 관한 논의에서 장보고와 관련되는 또 다른 장씨張氏 성姓의 인물을 보건대 위 일각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궁복과 궁파라 한 위 두 사서의 태도는 장보고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진다. 즉 신라왕실로부터 반역자로 낙인찍힌 장보고에 대한 신라왕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은 신당서의 편찬자인 송기宋祁의 평가를 인용하여 장보고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높이고 있다.
‘송기가 말하기를(宋기曰), “원독으로도 서로 꺼리지 않고 국가의 우환을 앞세운 자를 든다면 진(晋)나라에 기해(祁奚)가 있고, 당(唐)나라에 분양(汾陽)과 보고(保皐)가 있다(원문, 唐有汾陽保皐).” 하였으니 그 누가 이(夷)에 사람이 없다 하겠는가(원문, 孰謂夷無人哉).’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연 편>
위 열전의 내용은 신라본기와 달리 당대 중국의 평가가 반영되어 있어, 일본 측 사료의 시각과 더불어 오늘의 우리에게 장보고의 진면목을 알려준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독자들은 위 인용문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길 바란다.
송기는 장보고를 일컬어 우리 민족을 뜻하는 이夷족임을 알리면서도 ‘신라나 동이東夷에 보고保皐가 있다’ 하지 않고, ‘당唐에 보고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자의 판단으론 장보고는 신라가 아니라, 오히려 당나라 사회에 기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장보고가 신라 출신이 아님을 알려주는 정황증거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 이제 위에서 제기된 의문점에 대해 한 걸음씩 다가가 보자.
독자들은 위 글의 내용에서 장보고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을 역임했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령군 군중소장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장보고의 행적 중 가장 앞선 시기의 행적이자, 그가 입신하게 된 기반이었다. 여기서 서주의 무령군이란 무엇인가?
서주徐州는 오늘날 강소성의 서주로서, 당시 동서와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교차점에 위치한 요충지이자, 초한전쟁 시기 초楚의 패왕覇王 항우項羽가 도읍했던 팽성彭城이다. 그리고 무령군은 805년 서주에 설치한 군진軍鎭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령군이 설치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의 눈을 당시의 정치정세로 돌려보자.
8C 후반 당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안록산의 난 이후, 당 조정은 급격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무령군이 설치되는 9C 초반에 이르기까지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번진발호藩鎭跋扈의 시기라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지방의 군진책임자들인 각지의 절도사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공공연히 반半독립의 태도 또는 대립을 획책해 나가던 양상이었다. 한마디로 지방군벌의 시대였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시기 가장 강성한 번진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무장, 이정기(치세 765~781)가 다스리던 평로치청平盧淄靑(이하 치청)이라는 사실이다. 치청은 오늘날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북과 하남, 안휘와 강소성의 일부를 포함하는, (전성기엔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역을 장악한 뒤 국호를 제齊라 표방하곤, 이정기에서 아들 이납李納(치세 781~792)과, 2명의 손자 이사고李師古(치세 792~806)와 이사도李師道(치세 806~819)에 이르기까지 4대 54년간 당 제국의 심장부를 거점으로 자립을 유지한 나라(당의 시각에선 번진)였다. 치청은 당 제국의 도성인 장안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를 포함한 조운선 교통로를 모조리 자신의 판도에 둠으로서 당황제 덕종德宗(재위 779~805)은 한 때 도성을 버리고 피신하는 상황까지 맞기도 했다. 그만큼 치청은 당 조정의 입장에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 과정에서 당 조정은 이정기와 그의 아들, 손자에 대한 회유책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내렸는데,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 또 요양군왕饒陽郡王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는 치청이 평정된 이후 신임 평로치청절도사가 그대로 이어받게 되는데, 장보고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 때 황해무역권을 독점했던 치청의 해운력을 이어받은 것이라 보아진다.
▲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룬 치청 판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오늘날의 중국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당 조정에 의한 무령군의 설치는 바로 이 평로치청 때문이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곤 그것에 주목했다. 바로 무령군의 무령武寧이 백제 무령왕武寧王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직 학계에서 제기된 바 없어 뭐라 단정할 순 없지만, 필자에겐 무령군의 군진 명칭이야말로 당시 대륙에 흩어진 백제계를 규합하는데 있어 가장 안성맞춤의 명칭으로 판단되었다. 무령왕이 누구인가? 백제의 전성기를 풍미한 왕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령군의 설치는 고구려계인 평로치청에 대한 대응에 있어 당 조정의 전통적 정책인 기미羈靡정책, 즉 이이제이의 일환이라 판단되었다.
필자의 이러한 판단의 근거로 아래의 인용문을 들어보겠다.
‘(헌덕왕憲德王) 11년 7월에 당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역하자 (당唐황제) 헌종憲宗은 쳐서 토벌하려고 양주절도사 조공趙恭을 보내어 우리 병마를 징발하니, 왕은 칙지를 받들고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갑병甲兵 3만 명을 거느리고서 돕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조條>
위의 내용은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신라군의 대륙파병에 대한 기록이다. 헌덕왕 11년은 치청이 멸망한 해인 819년이며, 이사도는 이정기의 손자이자 치청의 마지막 군왕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당 조정의 치청 토벌에 무려 3만의 신라군이 동원되었다는 것과, 치청 멸망의 해에 파병된 신라군이 치청 멸망에 큰 역할을 했으리라 어렵지 않게 추정하게 된다.
더불어 위 사실에서 우리는 당의 이이제이 정책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바, 신라군의 징발은 무령군의 설치와 동일한 의도이자, 그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의 세력구도를 놓고 보면 신라와 당의 동맹이 한 축을 이루고 발해와 제(평로치청)의 동맹이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어쨌든 당 조정이 자신의 판도 내에서 전개된 평로치청의 도전에 대해서까지 신라군대를 끌어들인 것으로 볼 때 필자는 무령군의 성격 또한 그와 같은 차원이었음을 확신한다.
무령군이 대륙의 백제 세력을 규합한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는 대륙백제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대륙백제는 요즘에 와서 국사교과서에 백제의 요서진출이란 내용으로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아직 그 전모에 대한 정립에까지 이르진 못한 상태이다.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기에 이 장에선 무령군의 성격과 관련한 필자의 판단 근거로만 삼기로 한다.
참고로 독자들이 치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치청을 멸한 후의 중국 측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산동지역의 풍속이 너무 달라 관리를 파견 예속을 교육했다.’ <신당서新唐書>
‘야만의 풍속으로 살았기 때문에 교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령華令>
위 내용들을 통해 볼 때 치청은 저들 한족漢族의 생활문화와는 상이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정기 가문만이 아니라, 치청의 지배세력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다른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치청의 중심지 산동山東은 고대 중국인에게 있어서 동이東夷로 불리어온 데다, 우리 민족과 관련된 유적, 유물, 풍습,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당시까지 산동은 한족보다 동이의 문화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정기 집단의 기반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특이한 점은 치청에 대한 중국 측의 대부분의 기록엔 치청을 일러 저들의 이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인 호인胡人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정기 집단이 가졌던 자기정체성의 강한 반영이었으리라.
아쉽지만 다음 장에서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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