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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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전여총도는 고려인의 세계지도 ①

자연정화 2016. 3. 10. 02:57

천하전여총도는 고려인의 세계지도 ①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13.05.22  09:28:50 서현우의 '세계사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1)

 

들어가며

돌아보면 지난 연재 <서현우와 함께 하는 바다의 한국사>에서 오류들이 있었음을 밝힌다. 본 글에선 그것과 연결되는 내용에선 지적할 것이지만, 혹 그렇지 못한 부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정하여 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 글의 개요와 맥락은 변함이 없음을 전하고자 한다.
지난 연재 글에서 동서양의 여러 미스터리 지도들에 대해 소개하면서, 나는 줄곧 독자들에게 그 지도들이 동아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과 함께 그에 대한 역사적 가설을 제시했다. 천하전여총도를 그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천하전여총도가 실제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의 모사본이란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나 한갓 가설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선 천하전여총도가 결코 위작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반영한(실제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한) 진본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이번 글에서도 동서양의 여러 관련 지도들이 동원될 것인바, 모든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나의 확신으론 독자들에게 새롭고도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다.
참고로 이번 연재는 준비 중인 단행본의 내용을 연재 형식으로 편집해 일부 공개하는 것이며, 단행본 전체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주요 내용>

1. 2006년 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한 장의 지도가 공개되어 현재까지 세계적인 논쟁을 낳고 있다. ‘천하전여총도’란 이름의 이 지도는 2001년 중국의 변호사 류강이란 인물이 상하이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1763년 모이동이란 인물이 제작한 세계지도로서 지도상의 여백에 이 지도가 실상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지도상의 묘사된 세계의 형상은 1418년 당시의 중국의 세계정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 지도상의 세계의 형상엔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남북아메리카 대륙이나 호주대륙, 심지어 남극대륙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상의 여러 오류들 또한 담겨 있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위작의 시각이 제기되고 있으나, 자연과학적 분석결과, 실제 지도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지도가 스스로 알리는바 18세기 무렵의 것이라 밝혀졌다. 더불어 위작 제기자들은 현재까지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정설에 어긋난다는 이유 외에 위작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 천하전여총도가 출현하기 이전인 2001년 영국의 잠수함 함장을 지낸 특이한 경력의 게빈 멘지스란 인물이 ‘1421년,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란 저서를 출간하여, 명나라 초기 남해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 제독이 이끈 명나라 선단이 기존에 알려진 인도양 해역을 넘어서 대서양과 태평양 등 오늘날에 알고 있는 세계 곳곳을 주항했다고 주장하여 전 세계적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멘지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하는 근거는 주로 중세 유럽의 지도상의 미스터리, 또 동식물의 분포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난파선의 흔적들이다. 멘지스의 주장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주로 심정적 추정에 근거한 주장일 뿐,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필자의 시각으론 멘지스의 저서가 분명히 매우 뛰어나고 훌륭한 역작임에도 불구하고, 선구적 작업이 필히 그렇듯이 중국과 아시아를 구별하지 못했다는 점, 즉 아시아의 성과는 죄다 중국의 성과라는 서구 일반의 인식적 한계와, 또 오로지 명나라 초기의 정화 선단의 남해대원정에만 고정된 시각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연구결과 명나라 정화 선단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주항에 나선 것이 아니라, 그 항해는 일찍이 원나라 선단의 세계주항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임과, 아울러 원나라 선단의 항해기반이 동아시아 해상집단, 특히 고려의 해상력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3. 필자는 천하전여총도에 대해 7년간의 연구 끝에 이 지도가 실상 1418년의 동아시아의 지리지식을 담은 진품이자 원나라 항해의 결과라는 사실을 여러 중세 유럽의 지도 및 우리의 고지도를 통해 고증하면서, 아울러 지도의 제작자가 다름 아닌 재당신라인-재송고려인-재원고려인의 정체성을 이어온 고려인이라는 점을 지도상의 기준자오선과 중세 유럽 지도상의 기준자오선을 통해 추론해 낸다. 한마디로 서구의 세계 지배의 발단이 된 콜럼버스와 다가마, 마젤란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대항해는 동아시아 지리지식의 결과이자, 수천 년간 이어온 우리 민족의 해상활동의 산물이란 것이다.

4.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원형이 중국보다 페르시아 및 그리스와 더 친연성을 갖는다고 지적한바 있다. 30여 년 전 그 대목을 접하곤 필자는 매우 의아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필자는 단재 선생의 선구안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필자의 연구결과 백제라는 국명과 박혁거세의 ‘박’, 열국시대(삼한시대)의 무수한 소국의 국명, 신라왕들의 왕명, 나아가 일본의 국명 ‘야마토’와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일컫는 구다라와 시라기 등의 어원이 실상 오늘날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고찰한다. 이는 그동안 신라고분 출토의 금제 유물과 유리제품, 고구려 문화에 나타나는 인도적 요소, 그리고 최근 유전학이 밝히고 있는 우리 민족 기원의 주요한 한 갈래로서의 남아시아 유래설을 더욱 뒷받침한다. 나아가 이 모두가 해상을 기반으로 한 것임도 밝힌다. 더불어 우리 민족이 8세기~14세기에 걸쳐 세계사를 찬란하게 주도했던 아시아의 황금 시기의 주역의 하나였음을 고찰한다.

5.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사를 탈피하여 그동안 중국문명의 산물로서 막연히 인식해온 오행사상을 비롯한 여러 관념이 실상 중국문명의 독자적 산물이 아니라 범유라시아 문명의 산물임을 지명과 어휘들 통해 고찰한다. 예를 들어 오방의 방위색은 흑해와 홍해, 청나일강과 백나일강 등 러시아 볼가강 연안에서 흑룡강, 황해, 현해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산재하고 있으며, 살수대첩의 살수가 내몽골의 시라무엔과 같이 ‘가운데 강’을 의미하는 ‘황색 강(yellow river)’임을 밝힌다. 특히 동아시아의 해상활동은 정주농경을 기반으로 한 漢族 문화 밖의 영역임을 고찰하여 당송 시대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주역이 우리민족임을 밝혀 동북공정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낸다.

6.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의 고유종 개미핥기 토우와, 2007년 알류산 열도 아막낙 섬에서 발굴된 3,000년 전의 구들(온돌) 유적, 또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승설화와 지명 등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해상로를 통한 아메리카로의 내항 가능성, 또 같은 시기 동일한 해상로를 통한 인도인의 아메리카로의 내항을 고찰한다. 나아가 고려-원나라 연합 선단의 대서양 주항의 결과,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에 정착한 고려인에 대해 천하전여총도와 중세 유럽의 지도 및 노스캐롤라이나의 원주민 Coree족과 그 이웃 종족들, 그리고 출토 유물, 동아시아 기원의 자생 품종 등을 통해 고찰한다.
7. 주리론적 성리학 이념과, ‘천하지대본야’로 상징되는 정주농경을 근간으로 한 명나라 주도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우리 역사의 대부분을 이어온 역동적인 해양활동을 상실한 결과,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의 아픔을 맞은 데에 이어 그동안 조국분단의 현실이 강요해온 고립적 세계관이야말로 오늘날 민족사의 최대의 상처이다. 문명의 중심이 이동하는 거대한 변화의 시대를 맞은 우리 민족이 당면과제인 분단의 극복과 세계사의 주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편협하고 고립된 세계관을 벗어나야 하는바 주체적 역사관의 정립이야말로 그 출발이랄 수 있는데 이 졸작이 그에 대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 필자 주

 

 

▲ 천하전여총도. 2006년 1월 세상에 공개된 1763년 중국의 세계지도. 지도의 여백엔 1418년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서양 역사에서의 지리상의 항해 시기 이전의 아시아 지도로서 오늘날의 세계 지형의 전반을 보여주고 있어 현재 지도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에 놓여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 태종2년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로서 대형의 한반도,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이 나타난다. 19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행사에 소개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현재 모사본 2장이 일본에 전해온다. [자료사진 - 서현우]

 

1.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르네상스 두 지도 

혼일강리도와 관련하여 놀라운 두 종류의 중세 유럽 지도를 통해 논의를 시작해 보자. 두 지도는 각각 1508년 프란체스코 로젤리와 1528년 베네데토 보르도느에 의해 제작된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의 지도들이다. 여기서 편의상 두 지도를 로젤리 지도와 보르도느 지도라고 칭하기로 하겠는데, 논리적 전개에 있어 시간적으로 후대의 것인 보르도느의 지도부터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 152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에서 베네데토 보르도느(Benedetto Bordone, 1460~1531)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 한반도의 크기를 혼일강리도와 거의 같은 비율로 묘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위 지도상의 동아시아 부분에 주목하면서 한반도의 크기를 중국, 그리고 여타 지역과 비교해 보길 바란다. 한반도의 크기가 실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대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 앞장에서 접한 혼일강리도의 한반도 크기와 대조해 보라. 중국과 한반도의 상대적 크기가 혼일강리도의 복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라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제주도가 나타나는 데다, 영일만 일대의 호미곶이 과대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나는 이 지도를 처음 대면했을 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도가 제작된 1528년이란 연도 때문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알려진 중세유럽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동아시아가 나타나는 거의 대부분의 지도들을 확인해 보았다.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이 지도와 뒤에서 다룰 볼로그니노 잘티에리의 1556년 지도를 제외하곤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을 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한 지도가 나오기 시작한 때는 거의 200여 년 후인 18세기에 이르러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18세기에마저 극히 일부 지도에서였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반도와 호미곶이 이와 같은 크기로 과장되어, 제주도와 함께 하나의 지도에 동시에 나타나는 지도는 현재까지 오직 이 지도뿐이다. 한마디로 이 지도는 경이적인 것이자, 역사의 이단이다. 그것은 이후 한 세기 가량의 시기동안 극히 일부 지도를 제외하곤 유럽의 아시아 지도엔 아예 한반도 - 반도로서 - 조차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그렇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중세 유럽 지도학 역사에서의 한반도의 등장 과정을 정리해 보자. 특이하게도 보르도느 지도와 로젤리 지도가 제작되던 전후 시기인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걸쳐 일부 지도에 한반도로 특정할 수 있는 지형이 등장한 뒤, 그 이후부터 일반적으로 한반도는 16세기 말경까지 공백 - 또는 한반도로 특정할 수 없는 - 으로 처리되고, 1600년을 기점으로 마치 당근이나 고추 형태의 ‘섬’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다, 17세기 중·후반엔 ‘섬’과 반도가 공존하는 과정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반도로 정착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바, ‘일부 지도’라고 한 예외적인 지도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뒤에서 확인될 것이다. 우선 아래에 소개되는 지도들을 보자.

 

▲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근대 지도학의 효시를 연 메르카토르 부자父子 사후 요도쿠스 혼디우스(Jodocus Hondius, 플랑드르/네덜란드)가 1606년 암스테르담에서 제작한 메르카토르/혼디우스 일본(IAPONIA) 지도. 한반도가 마치 당근이나 고추 모양으로 나타난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626년 조지 험블(George Humble, 영국)의 지도. 한반도가 당근 형태의 섬으로 나타나는데 이 시기 일반적 유형이다. [자료사진 - 서현우]

 

▲ 해적으로도 유명한 항해가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 영국)의 1699년 항해를 보여주는 ‘댐피어 항해도’ 동아시아 부분. 댐피어 사후 1729년에 출간된 서적 ‘1699년, 뉴홀랜드로의 항해’(3판)에 실린 지도로서 한반도를 특정하기조차 어렵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768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초판본의 ‘아시아 지도’상의 한반도와 그 주변. 단순한 지형으로 제주도마저 보이지 않는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지도는 1606년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메르카토르/혼디우스 지도와 1626년 영국에서 제작된 조지 험블의 지도인데, 한반도를 17세기 초반의 일반적 유형인 ‘섬’으로 나타내고 있다. 세 번째 지도는 1729년 런던에서 출판된 유명한 해적이자 항해가였던 윌리엄 댐피어의 항해에 대한 서적 ‘1699년, 뉴 홀랜드로의 항해’(3판)에 실린 항해도의 동아시아 부분인데 18세기의 지도임에도 한반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네 번째 지도는 1768년에 간행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초판본에 실린 아시아 지도의 한반도 부분이다. 이 지도는 보르도느 지도가 제작된 이후 무려 240년이 지난 시기의 것임에도, 단순한 지형의 한반도 외엔 제주도마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위 지도들을 통해 내가 보르도느의 지도에 대해 왜 그렇게 경이적이고 이단적이라 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르도느 지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자는 이 지도가 근세에 제작된 지도인데, 보르도느 지도라고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뒤에서 다룰 이 시기의 또 다른 지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지도의 제작자인 보르도느가 동아시아에서 기원하는 어떤 지도 - 또는 지도들 - 에 근거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르도느의 ‘어떤 지도’에 대해서, 또 그것이 어느 시기에 베네치아로 건너간 것인지에 대해서 모두 유추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어떤 지도’란 우리의 고지도인 혼일강리도류나, 또는 그와 친연관계에 있는 지도들이란 것이고, ‘어느 시기’란 13~14세기 무렵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뒤에서 다룰 지도들을 통해 저절로 확인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다시 혼일강리도를 만나게 되고, 왜 혼일강리도가 19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 소개되고 주목받았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지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보르도느의 지도를 두고 경이적이라 한 이유는 비단 이것 때문만이 아니다. 정작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에 대해선 뒤에서 다룰 것인바, 이제 여기서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또 다른 지도인 1518년 제작의 잉골슈타트/노르덴스쾰드 지도를 살펴본 뒤 로젤리 지도를 만나보자.

 

 

▲ 1518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잉골슈타트/노르덴스쾰드 지도(Ingolstadt/Nordenskiold Gores). 대형의 한반도와 함께 호미곶이 나타나 동 시대 보르도느 지도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기원 ‘어떤 지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캘리포니아 섬’과 ‘중앙아메리카 해협’이란 지도학 역사상의 미스터리가 담겨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일반적으로 잉골슈타트/노르덴스쾰드 지도로 알려진 위 지도는 1518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지도로서 대형의 한반도와 호미곶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는 현재까지 알려진 중세 유럽의 지도들 중에서 보르도느 지도, 그리고 이어서 다룰 로젤리 지도와 더불어 혼일강리도와 같은 비율의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세 지도 중의 하나이다. 주목할 부분은 지도상에 지도학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캘리포니아 섬’과 ‘중앙아메리카 해협’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선 다른 장에서 다룰 것인바, 여기선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지도에 이들 미스터리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만 확인하고, 이제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마지막 지도인 로젤리 지도를 만나보자. 로젤리 지도 역시 나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경이적인 지도이다. 

 

▲ 1508년 피렌체 출신으로 베네치아에서 활동(1505~1508)한 프란체스코 로젤리(Francesco Rosselli, 1445~1513)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의 채색판. 보르도느 지도와 같이 한반도가 실제보다 과대하게 나타나고, 최초로 남극대륙이 지도상에 나타난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로젤리 지도 또한 혼일강리도와 같은 대형의 한반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한반도의 위치를 지도의 동북쪽 끝부분에 두는 바람에 한반도 동부 해안선의 지형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어쨌든 로젤리 지도와 보르도느 지도는 불과 20년이란 제작 시차와 베네치아라는 공동의 제작 장소를 배경으로 탄생한 중세 유럽의 지도로서, 혼일강리도를 연상시키는 대형의 한반도란 동일한 특징을 지닌 것으로 볼 때 두 지도는 가히 형제적 관계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두 지도상엔 여러 차이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선 로젤리 지도엔 보르도느 지도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인 제주도가 보이지 않는다. 더하여 로젤리 지도상의 한반도 남쪽의 섬 - 혼일강리도에 의할 때 일본에 해당 - 의 형상이 보르도느 지도의 그것과 완연히 다르다는 점과, 또 그 섬 아래에 보르도느 지도에서 볼 수 없는 대륙의 일부로 보이는 미상의 지형이 나타난다는 점 등의 두 지도상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는 로젤리 지도와 보르도느 지도가 각기 참조한 해당부분에 대한 동아시아 기원 모본지도가 서로 다른 종류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어쨌든 우리는 1508년 프란체스코 로젤리에 의해 제작된 이 지도와 1518년경 작자미상의 잉골슈타트/노르덴스쾰드 지도를 통해 보르도느 지도의 탄생 시기, 즉 1528년에 대한 의심을 떨치게 되었다. 아울러 한반도의 크기가 혼일강리도의 비율로 나타나는 현존하는 유럽의 세 지도가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로젤리 지도, 잉골슈타트/노르덴스쾰드 지도, 보르도느 지도의 순서로 출현한 것으로 볼 때, 로젤리 지도는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최초의 유럽 지도가 되는 셈이다.

이제 보르도느 지도의 제작 시기에 대한 의문은 사라졌다. 나아가 주지하는바, 이러한 지도들의 제작은 유럽인에 의한 탐험의 성과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우선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포르투갈인이 남중국해 연안의 광동廣東에 처음으로 내항한 시점이 1513년이므로, 1508년에 제작된 로젤리 지도상의 한반도와 산동 반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528년 제작의 보르도느 지도의 경우 또한 최초의 포르투갈인이 동중국해를 거쳐 한반도 인근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가 1540년대에 접어들어서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당시 항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대 포르투갈의 동중국해와 한반도 인근으로의 북상에 대한 시기를 알아보면, 페르나웅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를 비롯한 세 명의 포르투갈인이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일본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기착한 때가 1542년이었는데, 그 항해마저 포르투갈의 선박에 의한 본격적인 항해가 아닌 중국의 정크선을 이용한 것이었다. 또 타이완 섬이 포르투갈에 의해 최초로 포르모사(Ilha Formosa: 아름다운 섬)란 이름으로 유럽의 지도상에 명명된 시점이 1544년이었다.

다음 근거는 동시대 포르투갈의 지도들에선 이들 지도상에서 확인되는 한반도 관련 특징은 고사하고 아예 한반도 - 섬의 형태를 포함하여 - 의 존재조차 찾기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로젤리 지도와 보르도느 지도가 제작된 곳이 베네치아란 점을 들 수 있는데, 16세기 당시대 베네치아의 해상활동 무대는 아시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베네치아 선단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라는 강력한 신흥 해상력에 의해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서지 못한 채 지중해 영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이들 지도상의 대형의 한반도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지도상의 대형의 한반도라는 공통적 요소는 이들 지도들이 혼일강리도와 같은 동아시아 기원의 ‘어떤 지도들’에 기초하여 상호 연동되어 출현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보르도느 지도상의 한반도 관련 특징인 제주도와 호미곶이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해 준다. 여기서 제주도와 호미곶은 다음 장에서 다룰 볼로그니노 잘티에리의 1556년 지도를 제외하곤 유럽의 지도에서 다시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각기 200여년과 25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일단 지적해 둔다. 이는 한반도가 한동안 사라진 것과 같은 경우이다.

어쨌든 이제 독자들은 강력한 확신에 이를 것이다. 즉 대형의 한반도, 그리고 제주도와 호미곶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말해주는바, 이들 지도의 제작에 있어 혼일강리도와 같은 동아시아 기원 - 어쩌면 한반도 기원 - 의 ‘어떤 지도’ 즉 모종의 모본지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한편으론 한 가지 의문도 느낄 것이다. 왜 이런 지리정보가 당시 유럽사회 전체에 공유되어 지속되지 않았느냐는 데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주지하는바, 당시대 유럽은 지리상의 대항해 시대이자, 해외 팽창의 시대로서 해외 식민지 확보에 국가의 존망을 걸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지리정보는 당연히 국가의 최고 기밀로 취급되었고, 소수 지배층의 독점적 영역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유럽 지도학 역사의 커다란 비밀과 관련되는 것인데 이는 한반도가 한동안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진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뒤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선 이들 지도가 동아시아 기원의 모본지도들에 근거했다는 인식 하에 다시 로젤리 지도로 돌아가자. 유럽의 지도로서 최초로 대형의 한반도가 나타나는 것만이 로젤리 지도의 전부가 아니기에 말이다. 주인공은 항상 나중에 등장하듯이 진짜 가치는 따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 눈길을 로젤리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아래쪽 대양 한가운데로 향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