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고리,조선,한국

정화선단의 남해원정

자연정화 2018. 5. 29. 15:03

정화선단의 남해원정

 

1405년 6월, 환관 정화(鄭和)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체 길이 약 150미터, 너비 약 60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 62척과 2만 7,800여 명의 군사 및 의원, 역관을 거느리고 소주의 유가항(劉家港)을 출발했다.

 

선단은 참파(지금의 베트남), 자바, 팔렘방(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라카(지금의 말레이시아), 세무데라,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의 항로를 거쳐 1407년 초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항해 도중 선단은 자바의 동왕과 서왕 간 분쟁에 휘말려 170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서왕의 사과와 황금 1만 냥을 받아 내고 조공을 약속받았다.

 

또한 팔렘방에서는 중국인 이주 집단의 분쟁에 개입하여 명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는 중국인 이주 집단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선위사사(宣慰使司)를 설치했다. 그리고 수마트라에 도착해서는 수마트라의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여 자이누르아비딘을 정통으로 인정한 뒤 조공을 얻었다. 명나라는 이 항해로 교류가 없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게 조공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화는 1433년까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명을 받아 6차례, 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 명으로 1차례, 총 7차례에 걸쳐 남해 원정을 나섰다.

 

 

남해 원정은 주로 영락제의 치세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홍무제의 국가 재정 지출 억제 및 농업 진흥 정책에 따른 생산력 증대로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락제는 정난의 변으로 황제가 된 후 빠르게 뒷수습을 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

 

또한 당시 크게 발전한 항해술과 조선술도 원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 영락제는 안정된 경제력과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명나라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더라도 복속시켜 조공을 받고자 했다. 또한 궁정에서 사용하는 외국 사치품을 수입하고, 정난의 변 때 살아남아 남경을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건문제를 수색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리하여 영락제는 원정 선단의 조직을 명했고, 환관 정화를 선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정화는 중국 남부 운남성 곤양 출신으로, 이슬람교도의 자손이었다. 1381년, 명나라가 건국된 지 4년이 지났으나 운남성은 여전히 원나라 잔존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명나라는 운남성에 토벌군을 파견했는데, 이때 마화(馬和)로 불리던 어린 정화는 토벌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당시 10살이었던 마화는 적의 아들이란 이유로 거세를 당한 뒤 연왕 주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화는 연왕 주체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려고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큰 공을 세워 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환관들을 매우 신임했는데, 특히 마화의 사람됨과 재능을 알아보고 환관 최고 지위인 태감으로 임명하고 정화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또한 영락제는 대원정을 계획하면서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까지 진출하는 데 이슬람교도의 자손인 정화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해 그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정화는 첫 번째 남해 원정을 마치고 1407년 9월에 귀국했고, 곧이어 2차 원정길에 올랐다. 제2차 원정의 항로는 제1차 때와 비슷했으나 시암, 자바를 거쳐 캘리컷, 코친(지금의 인도)까지 간 것이 달랐다. 제2차 원정을 떠난 정화의 함대는 1409년 여름에 귀국했다.

 

1409년 겨울, 정화는 제3차 원정을 명령받고 다시 유가항을 출발했다. 제3차 원정 항로도 제2차 원정과 거의 같았다. 단지 귀국하는 길에 정화의 함대는 용정향을 얻기 위해 실론에 들렀다. 그런데 실론의 왕은 명나라의 책봉을 거부한 채 정화 함대의 보물을 강탈하려고 공격했다. 하지만 실론은 명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정화는 실론의 군대를 무찌르고 왕과 그의 가족들을 생포했다. 제3차 원정을 떠난 정화의 함대는 1411년 7월에 귀국했다.

 

정화의 항해

소주의 유가항을 출발한 정화는 참파(지금의 베트남), 자바, 팔렘방(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라카(지금의 말레이시아), 세무데라,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의 항로를 거쳐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이후 제4차 원정 때 호르무즈와 아덴에 이르렀고, 5차 원정 때 모가디슈와 브라와를 거쳐 말린디까지 갔다.

 

정화의 함대는 세 차례에 걸친 남해 원정을 통해 항로를 개척하고 동남아시아 일대의 나라들과 명목상 신종 관계를 맺어 무역 거점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도자기, 비단, 찻잎 등을 팔았으며 후추, 상아, 보석, 향료, 진귀한 동물 등을 들여왔다.

 

제4차 원정은 1413년 겨울에 다시 시작되었다. 제4차 원정은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항로도 길어졌다. 함대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캘리컷의 서쪽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이었다. 호르무즈 왕은 사자, 기린, 아라비아 말, 페르시아산 진주 등을 헌상했다. 1415년 7월, 귀국한 함대로부터 헌상물을 받은 영락제는 그중 기린을 보고 유교에서 가장 이상으로 여기는 전설의 시대, 즉 요순 시대가 도래했다며 크게 기뻐했다.

 

인도네시아 스마랑 삼푸콩 사원 안에 있는 정화의 동상. 출처: 위키피디어

 

제5차 원정은 본대와 분대로 나누어져 1417년 겨울에 이루어졌다. 본대는 아덴까지 갔으며,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모가디슈와 브라와를 거쳐 말린디까지 갔다. 분대는 말린디에서 금과 은, 비단을 주고 조공을 권한 다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진귀한 동물을 가지고 1419년 8월에 귀국했다.

 

1421년 2월에 이루어진 제6차 원정은 과거의 원정 때와는 성격이 달랐다. 비록 항로는 이전과 같았으나 원정의 목적은 교역품이 아니라 조공을 바친 각국 사절의 귀환이었다. 제6차 원정은 함대가 1422년 8월에 귀국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여섯 차례에 걸친 원정은 준비 기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2년을 넘기지 않고 재출항 했다. 그러나 제7차 원정은 제6차 원정이 끝난 지 9년 만인 1431년에 재개되었다.

그 이유는 남해 원정에 적극적인 영락제가 1424년에 사망하고 홍희제(洪熙帝)가 즉위했기 때문이다. 홍희제는 영락제가 펼친 외정(外征)으로 화려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대신 막대한 국고 손실도 겪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제3차 원정 때까지 약 600만 냥의 은을 소모하자 심각한 재정 악화를 우려한 신하들이 원정을 반대했다.

 

이런 이유로 홍희제는 즉위 후 원정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이듬해, 병약했던 홍희제가 즉위 8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선덕제(宣德帝)가 황위를 이었고, 그는 할아버지 영락제의 유지를 받들어 남해 원정 재개를 명했다.

 

1431년에 제7차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때에도 함대의 총사령관은 이미 60세가 넘은 정화였다. 그는 처음에 연로함을 이유로 총사령관직을 거절했으나, 대신할 인재가 없음을 알고 다시 원정길에 올랐다.

 

제7차 원정은 본대와 분대로 나누어 이루어졌으며, 본대는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까지 갔다. 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해안의 모가디슈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나누어서 일부를 홍해 입구인 아덴으로 보냈다. 이때 최초로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제7차 원정은 함대가 1433년 7월에 귀국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남해 원정은 제7차 원정으로 막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약 30년간 총 일곱 번의 원정을 지휘한 정화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정화가 없는 명나라 함대는 더 이상 위용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약 30년 동안 축적된 항해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쇄국 정책을 폈고, 남해 원정을 다시 실시하지 않았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항해 거리, 기간, 함대 규모, 항해술 등 모든 면에서 15세기 세계 항행사의 최고 업적이었다. 단적으로 정화의 남해 원정대의 선박 규모는 바스코 다 가마보다 약 66배, 콜럼버스 함대보다 약 32배가 컸고, 시기는 각각 93년과 87년 앞섰으며, 선단의 규모도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다.

 

 

또한 정화의 함대는 나침반을 이용해 항해술을 활용하고, 별자리와 해상 구역에 따른 천체 고도의 변화를 기록하고, 항로의 지명과 항구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더불어 남해 원정으로 중국의 문화는 동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으며, 중국은 넓은 세계의 지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정화는 원정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고 우호 관계를 맺는 데 힘써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많은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퍼져 화교의 뿌리가 되었고, 이들은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정화 사후 명나라가 쇄국 정책을 펼쳐 남해 원정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명나라는 대항해시대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