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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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마우로 지도의 위대한 비밀 ②

자연정화 2016. 3. 10. 04:05

프라 마우로 지도의 위대한 비밀 ②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13.06.29  15:45:40 세계사를 뒤흔든 한 장의 사진 (6)

 

 

▲ 1450년경 제작된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가상의 해협. [자료사진 - 서현우]

 

▲ 현대지도의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 [자료사진 - 서현우]

 

중세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마우로 지도!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나타난 가상의 해협! 나는 이 해협의 실체를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이라고 확신했다. 즉 지도의 제작자 마우로 수사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묘사한 모본지도를 아프리카 대륙이라 오인한 결과라고 말이다. 그 외에 해당지역에 해협이 그려질 경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실제의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그곳은 산맥과 고원, 그리고 황량한 사막지대이기 때문이다.

마우로 지도가 위대한 중세지도로 평가받아온 이유의 핵심이 바로 ‘유럽역사에서의 희망봉 발견’ 이전 시기에 아프리카 대륙의 전모가 담겨있는 지도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마우로 지도상의 가상의 해협이 실제론 마젤란 해협이라는 나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이는 마우로 지도의 기존의 미스터리를 뛰어넘는 가히 세계사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그동안 제기되어온 중세 지리상의 항해가 남긴 온갖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결정적 단초가 될 것이었다. 마우로 지도는 최초의 유럽인에 의한 마젤란 해협 발견 70여년 이전의 지도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이러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마우로 지도상의 가상의 해협에 대해 주목하는 학계의 어떠한 견해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인터넷을 통해 마우로 지도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영문판 해설이나 논문을 접했지만, 그 어디에도 그것에 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마우로 지도를 중요하게 다룬 유명한 저서들인 게빈 멘지스의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와 류강劉鋼의 ‘고지도의 비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우로 지도에 대한 세계 학계의 연구가 아직 빈약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마우로 지도상의 가상의 해협이 대륙의 남단이라는 위치를 제외하곤, 그 해협을 마젤란 해협이라 간주하기엔 마우로 지도상의 아프리카 대륙과 실제의 남아메리카 대륙의 형상은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마우로 지도상의 아프리카 대륙에 묘사된 두 개의 만灣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어디에도 대응되지 않았다.

 

 

▲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서안(대서양 연안)에 두 개의 만이 보인다. [자료사진 - 서현우]

 

어쩌면 세계 학계와 연구자들에 있어서 이 두 개의 만灣으로 인해 대륙 남단의 해협이 마젤란 해협의 오인일 수 있다는 시각 형성을 차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두 개의 만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해당지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개의 만 중에서 아래쪽의 만은 아프리카 대륙 서안의 기니만에 억지로 대응시킨다 하더라도 위쪽의 보다 길고 넓은 만은 실제 아프리카 대륙의 해당지역과 대응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두 대륙의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상의 해협과 위쪽의 만의 실체는 무엇일까?
한동안 생각에 골몰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은 기이했다. 더불어 마우로 지도가 참조했을 모본지도의 그곳은 실상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분명 마우로 지도 남단의 해협은 마젤란 해협이다! 그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당시 내겐 없었다.

어쨌든 가상의 해협이 마젤란 해협의 오인이라면 마우로 지도가 제작된 1450년경 이전에 누군가가 마젤란 해협을 항해한 것이 된다. 역사의 연대기에 의거할 때 그 누군가는 바로 명나라 정화鄭和 선단일 것이다. 제독 정화가 이끈 총 7차례의 항해는 15세기 초반의 일이었기에 그것에 가장 부합했다. 당시까지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더하여 명나라 이전 시기, 이미 동아시아 해상력이 대양을 넘나들었다고 확신했다. 뒤에서 다룰 것이지만 바로 원나라의 해상력을 염두에 둔 확신이었다. 역사의 전개상 아무런 기반축적이나 저변확대 과정 없이 어느 시기 느닷없이 명나라의 선단이 세계주항에 나설 수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나라 정화 선단의 항해는 원나라 해상활동의 후속 판이자 동아시아 해양사의 마지막 불꽃이라 보았다. 이는 미국 신세계발견연구소 소장 군나 톰슨 박사의 견해이기도 한데, 나는 그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도 어디까지나 주장에 그칠 뿐, 그가 내세운 근거들도 증거력이 미약했다.

그동안 정화 선단의 세계 주항에 대한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황증거 이상의 결정적 증거는 부족했다. 나는 마우로 지도상의 가상의 해협이 그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마우로 지도상의 그곳, 대서양 연안 위쪽과 아래쪽의 두 개의 만이 내겐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물론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나타난 가상의 해협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증거라고 간주했지만, 그것만으론 반대자들의 논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추가 증거가 필요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의 머릿속은 한동안 내내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 없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 마우로 지도 속의 그 대륙이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를 꺼내 줘! 여기 아프리카는 내 집이 아니야. … 내 집은 저기 대서양 건너에 있어. … 어휴, 여긴 숨 막혀 죽겠어.”
나는 그를 꺼내 주고 싶었지만, 해협 하나만으론 그의 신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넌 생김새가 너무 다르잖아. 아무도 너를 인정하려 하지 않을 거야. 미안해.”
“날 봐! 그건 저 유럽이란 놈이 위에서 날 깔고 앉아 있어서 그렇잖아. … 보면서도 몰라? … 너무 힘들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유럽에 의해 짓눌린 그는 반쯤 드러누운 채, 몹시 괴로운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남아메리카엔 너와 같은 그런 만을 찾을 수 없어. 더구나 너는 만을 두 개나 갖고 있잖아.”
“어휴, 바보 같으니. 내 집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아메리카란 말이야! … 저 유럽 놈만 내려오면 알 수 있을 거야.”
“뭐라고, 아메리카라고?!”

순간, 나는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위에 걸터앉은 유럽을 힘껏 밀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자 눈앞에 마치 용수철을 눌렀다 놓았을 때처럼 강한 탄성에 의해 ‘자칭 아메리카’가 일어선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자칭 아메리카’와 겹쳐 보려 애썼다. 그러자 마우로 지도의 위아래 두 개의 만이 마치 하마가 입을 벌리듯 벌어지면서 커다란 바다, 즉 대양으로 변하는 형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즉시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동시에 보여주는 지도를 펼쳐놓고 전체 아메리카 대륙을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에 대응시켜 보았다. 그러자 마우로 지도 위쪽의 만은 에콰도르에서 콜롬비아, 파나마를 거쳐 멕시코와 미국으로 이어지는 중앙아메리카 지협의 태평양 연안 바다였다. 그것은 만의 북쪽 영역이 북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의미이다. 또 마우로 지도 아래쪽의 작은 만은 페루와 칠레의 국경선이 태평양과 만나는 지역, 즉 칠레의 소읍 아리카(Arica) 앞바다에 대응되었다. 그곳의 해안선이 남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에서 가장 깊숙이 육지로 들어간 형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독자들 중 상당수는 당시 나의 이러한 추정에 대해 무리한 것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에게 있어서 추정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나는 즉시 중세 유럽의 여타 지도를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지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지도상의 모든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바로 당시대 지도들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도 상호간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그것을 확인할 때이다. 아래 두 지도는 독일의 히브리 학자 세바스티안 뮨스터에 의해 각각 1544년과 1550년에 제작된 아메리카 대륙 지도와 세계지도인데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과 비교해 보길 바란다.

 

 

▲ 1544년 독일의 히브리 학자 세바스티안 뮨스터(Sebastian Munster)의 지도로서, 태평양 상에 ‘캘리포니아 섬’이 보이고, 남아메리카 대륙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또 다른 대륙으로 이어진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550년 독일의 세바스티안 뮨스터에 제작된 세계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위 두 종류의 뮨스터 지도들과 마우로 지도의 비교를 통해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이 실상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오인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 뮨스터 지도들의 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 해안선을 보라. 중앙아메리카 지협 태평양 연안의 형상이 실제와 달리 긴 만으로 묘사되어 있는 데다, 페루와 칠레의 국경선이 태평양과 만나는 지점 또한 실제와 달리 거의 직각을 이루고 있다. 더하여 맨 아래 대륙 남단엔 해협이 나타난다. 비록 해협 아래쪽의 지형이 마우로 지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뮨스터 지도들의 아메리카 대륙과 마우로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의 관련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라 보아진다.

여기서 세바스티안 뮨스터와 그의 지도의 출현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세바스티안 뮨스터는 지도제작자임과 동시에 유명한 천지天地학자이자 히브리·성서학자로서 통일 이전 서부독일의 100마르크 지폐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리고 지도가 제작된 1544년과 1550년은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과 페루의 잉카제국이 차례로 스페인 침략자에 의해 멸망한 직후이긴 하지만, 유럽인에 의한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에 대한 탐험 이전이었다. 그러므로 뮨스터 지도들은 지도상의 태평양 연안과 해협을 통해 볼 때 마우로 지도와의 관련성, 또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지도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더하여 그 기원은 동아시아일 것인바, 바로 지도상의 ‘캘리포니아 섬’이 그것을 뒷받침 해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뮨스터 지도들과 마우로 지도는 불과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세상에 출현했지만, 이들 지도가 제작된 시기 사이에 지리학상의 혁명적 변화가 잇달았다. 바로 바르톨로뮤 디아즈의 희망봉 도착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로의 항해,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에 이어,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가 있었다. 그러므로 뮨스터의 시대는 마우로 시대와 달리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선 지형 및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뮨스터는 자신이 참조한 모본지도상의 대륙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우로 지도상의 아프리카 남단의 해협은 실상 마젤란 해협임이 이제 명확해졌다. 그것을 전제로 두 지도상의 마젤란 해협을 비교해 본다면 해협 이남에 대한 묘사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우로 지도의 그곳은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영토로 나눠진 파타고니아 지역이 분명한데 반해, 뮨스터 지도의 그곳은 또 하나의 대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두 지도제작자가 참조한 모본지도가 서로 다른 것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기적으로 앞선 마우로 지도가 보다 더 정확함을 의미한다. 이를 전제할 때 마우로 지도상의 해협과 파타고니아 지역 지형에 대한 최초의 정보제공자 (또는 지도 작성자)는 오늘날의 마젤란 해협만이 아니라, 파타고니아 남단의 남극해 연안 일대마저 항해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1520년의 마젤란 선단조차 난바다의 두려움으로 인한 선원들의 반란이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아낸 마젤란 해협과, 마젤란조차 알 수 없었던 해협 남단의 미지의 바다를 먼저 항해하여, 파타고니아 지역을 지도에 남긴 그들은 대체 누구이며, 또 그 시기는 언제인가? 게빈 멘지스의 주장대로 15세기 초의 명나라 정화 선단이 바로 그들일까? 마우로 지도의 제작 시점인 1450년경을 감안하면 정화 선단이 가장 유력해 보이긴 한다. 아마 독자들의 생각도 그러하리라.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것을 부정하는 증거가 있다. 이제 그 증거에 대해서 알아볼 것인바, 여기서 다시 베스콘테 지도로 돌아가 보자.

 

 

▲ 1321년 피에트로 베스콘테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부분. 프라 마우로 지도와 동일하게 대서양 연안 위아래에 두 개의 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도 또한 아메리카 대륙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오인했음이 분명하다. 대신에 대륙의 남단(지도상엔 우하단)엔 해협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베스콘테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대서양 연안에 나타나는 위아래 두 개의 만은 이 지도 또한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오인했음을 알려준다. 정리하자면 1321년 제작의 베스콘테 지도가 최초로 모본지도의 아메리카 대륙을 오인하여 자신의 지도에 아프리카 대륙으로 나타냈고, 그로부터 130여년 후인 1450년경 마우로 수사가 같은 오류를 더 구체적으로 재현했다. 다시 100여년 후인 1544년에 뮨스터는 ‘지리상의 대발견’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모본지도의 그 대륙을 남북아메리카로 제대로 인식하여 그의 지도에 나타냈던 것이다.

앞장에서 나는 베스콘테 지도야말로 아프리카 대륙의 전모가 나타나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지도라 지적한바 있다. 이는 형식 측면에서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이제 베스콘테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은 실상 남북아메리카 대륙임이 확인되었다. 베스콘테 지도상의 아프리카 대륙 대서양 연안의 위쪽 만 입구에 보이는 작은 섬이 그것을 더욱 또렷이 알려주고 있다. 뒤에서 다룰 것인바, 바로 이 섬이 중세 지도에 습관적으로 등장하는 태평양상의 캘리포니아 섬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미지의 해상세력이 최초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대서양과 태평양 양안을 주항한 때가 늦어도 14세기 이전이란 사실을 말이다. 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로의 항해에 비해 무려 2세기나 앞선 시기의 일로서 이제까지의 공인된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항해를 낳은 미지의 해상세력은 과연 누구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앞장에서 다룬 내용이 대신해 준다. 주지하건대 우리는 앞서 베스콘테 지도의 동아시아, 즉 산동반도의 형태 및 한반도와 산동반도의 상대적 위치를 통해 베스콘테 지도와 천하전여총도의 상호 관련성을 확인한바 있다. 이는 미지의 해상세력이 바로 동아시아 해상집단이란 결론에 이르게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현존하는 지도들을 상호 비교분석하여 14세기 이전 동아시아의 해상세력이 유럽의 지리상의 대항해 시기에 비할 바 없는 이른 시기에 이미 대양을 넘나들며 각종 지도를 남겨 유럽의 지리상의 대항해를 견인했을 가능성에 대한 증거의 일단을 들여다보았다. 이로써 그동안 서양 지도학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가 모두 해소되는 단초를 얻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는 천하전여총도가 실제 1418년 제작의 천하제번식공도를 모본으로 한 진품지도임을 입증하는데 있어 한 발 더욱 다가섰다.

“지도의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지도에 있다!”

1418년에 이미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전모를 보여주는 천하전여총도! 천하전여총도야말로 그동안 지도학 역사의 모든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는 유일한 지도이자, 모든 중세 미스터리 지도의 어머니 격의 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