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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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여명과 황혼, 그리고 두 지도 ②

자연정화 2016. 3. 10. 03:43

르네상스의 여명과 황혼, 그리고 두 지도 ②

 

자료출처 : 통일일보 2013.06.12  08:59:12 서현우의 '세계사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4)

 

이어 볼로그니노 잘티에리의 1556년 지도로 관심을 돌려보자. 아래는 각기 잘티에리 지도의 전모와, 한반도 영역 확대부분이다

 

 

▲ 볼로그니노 잘티에리(Bolognino Zaltieri)의 1556년 지도. 북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의 일부와 북대서양이 나타나고, 북태평양의 한가운데 일본(GIAPAN)이 놓여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볼로그니노 잘티에리(Bolognino Zaltieri)의 1556년 지도 한반도 영역 확대부분. 천하전여총도상의 한반도의 형상, 그리고 산동반도의 상대적 위치 및 형상과 완벽히 일치한다.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위 잘티에리 지도 한반도 영역 확대 부분을 통해 왜 이 지도가 이 장의 중심지도인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를 앞서의 천하전여총도 한반도 부분과 비교해 보라. 가히 완벽하다할 만큼 일치한다. 한반도와 산동반도의 상대적 위치는 물론이고, 산동반도의 크기와 방향, 더하여 한반도 동안東岸의 해안선 지형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이 지도를 처음 접하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잘티에리 지도는 또한 앞장에서 살펴본 보르도느 지도의 특징마저 보여주는데, 제주도가 나타난다는 점과 보르도느 지도의 호미곶에 해당되는 한반도 동남단 모서리 부분이 보르도느 지도의 그것처럼 매우 과장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이다. 이에 더하여 잘티에리 지도와 보르도느 지도의 일본을 비교해 보자. 아래는 두 지도의 일본을 확대 한 것이다.

 

 

▲ 잘티에리 지도의 일본. GIAPAN이란 표기가 보인다. [자료사진 - 서현우]

 

▲ 베네데토 보르도느 1528년 지도의 일본. 혼일강리도의 일본에 정확히 부합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두 지도의 일본의 형상은 주변 작은 섬의 개수가 다를 뿐 지형의 특징이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잘티에리 지도는 동북아시아 영역에서 보르도느 지도와 천하전여총도의 특징을 모두 담고 있는 지도라 할 수 있다. 아래의 지도는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의 벽에 그려진 태평양 지도인데 비록 천하전여총도나 잘티에리 지도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어쨌든 한반도와 산동반도의 상대적 위치에서 동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다, 한반도 동안 해안선 지형에선 천하전여총도와 잘티에리 지도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함을 볼 수 있다.

 

 

▲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벽에 그려진 지도. 한반도와 산동반도의 상대적 특징을 담고 있다. 남쪽이 지도의 위이나 이해를 위해 반대로 돌린 것임. [자료사진 - 서현우]

 

▲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지도의 한반도 영역 확대 부분. 한반도 동안 해안선의 지형이 천하전여총도와 잘티에리 지도의 그것과 유사하다. [자료사진 - 서현우]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대 집정자를 지칭하는 도제들의 거주지이자 공관으로서 도제 궁전이라고도 일컫기에 두칼레 궁전 지도는 도제 궁전 지도라고도 불린다. 1540년경에 그려진 이 지도는 보다시피 태평양 양안을 보여주는 태평양 지도로서, 지도의 위가 남쪽을 향하도록 구도를 잡은 지도인데 여기에선 이해의 편의를 위해 북쪽이 지도의 위가 되도록 방향을 돌린 것이다.

이 지도의 상단(남쪽)과 하단(북쪽)의 설명문엔 각기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 베네치아의 유명한 여행가들인 마르코 폴로와 니콜로 다 콘티의 여행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이 지도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도가 비록 1540년경 그려진 것이지만 실제 지도상의 정보는 콜럼버스의 항해 훨씬 이전의 것일 가능성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두칼레 궁전은 1428년에 건축이 완공되었는데 완공 당시 이미 같은 내용의 지도가 궁전 벽에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1486년 궁전의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을 당시 지도 또한 손상되었는데 1540년경에 라무시오라는 인물에 의해 다시 그려진 지도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복원 지도라는 것인데 나의 견해로는 궁전 화재 당시 원 지도의 손상 상태를 알 수 없는데다, 다시 그려질 당시 얼마나 수정 첨가된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원 지도의 완전한 재생이라 주장하기엔 명확한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두칼레 궁전 완공 이후인 1444년에야 동방 여행에서 돌아온 니콜로 다 콘티에 관한 지도 하단(북쪽 베링해 영역)의 언급으로 볼 때 원 지도의 완전한 재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주지하는바, 그렇다고 하여 이 지도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원 지도의 복원 여부와 상관없이, 즉 이 지도가 1540년경에 처음 그려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 지도는 현재까지 풀리지 않은 중대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먼저 이 지도가 잘티에리 지도와 마찬가지로 북태평양 일대, 특히 아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을 가르는 베링해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앞선 시기의 지도라는 것이다. 북태평양과 베링해협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는 이 시기 잇따라 등장하는 지도학 역사상 유명한 지도들인 메르카토르 지도들과 오르텔리우스 지도들에서 일반화된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상 최초의 유럽인에 의한 베링해 연안과 북태평양에 대한 실제 탐험은 두칼레 궁전 지도와 잘티에리 지도가 출현한 시기로부터 무려 2세기 가량 후인 18세기에 이르러서라는 것이다. 바로 비투스 베링이 그 인물인데 그가 러시아 황제 표트로 대제로부터 전설로 전해오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가르는 아나디르(Anadyr) 수로를 확인하고 오라는 명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한 때가 1725년이었고, 캄차카 반도 동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북상하여 베링해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시기는 1728~1730년이었다. 당시 베링이 훗날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된 베링해를 지날 때 짙은 안개로 인해 알래스카를 육안으로 확인하진 못했다. 단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더하여 베링의 뒤를 이은 제임스 쿡과 조지 벤쿠버의 북태평양 탐험은 그때로부터 50여년 이후인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정설에 의할 때 잘티에리 지도와 두칼레 궁전 지도, 또 메르카토르나 오르텔리우스 지도가 제작될 당시인 16세기엔 결코 북태평양 베링해 양안을 보여주는 유럽의 지도가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는 가장 앞선 시기의 두 지도인 두칼레 궁전 지도와 잘티에리 지도 모두에 한반도 영역 묘사에 있어서 한반도와 산동반도의 상대적 위치, 산동반도의 형태, 한반도 동안 해안선 지형이 천하전여총도의 그것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잘티에리 지도의 그것은 천하전여총도와 완벽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제주도와 한반도 동남단 호미곶의 묘사에선 보르도느 지도와 동일한 특징마저 보여주고 있다. 보르도느 지도는 우리의 혼일강리도와 같은 비율의 대형의 한반도가 등장하는 지도가 아닌가? 이는 한마디로 두칼레 궁전 지도와 잘티에리 지도가 동아시아 기원의 지도로부터 영향 받았다는 강력한 암시이자, 천하전여총도가 1418년의 지리 지식에 기초한 진품 지도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덧붙여 두칼레 궁전 지도의 아시아로부터의 영향에 대한 추가적 증거가 더 있으나, 이는 다른 장에서 다룰 것이다.

천하전여총도의 모본지도인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는 베스콘테 지도와 잘티에리 지도의 중간 시기에 각기 전후 100~140여년의 시차에다, 동아시아와 베네치아라는 공간차를 두고 세상에 나타났다. 이 어찌 놀랍지 않은가?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기존의 역사상식을 뛰어넘는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셈이다.

천하전여총도가 위작임을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그들의 주장은 단지 역사의 정설이란 스스로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일 뿐이다. 그것은 천하전여총도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지금까지 세계적 논쟁을 거치는 동안 정작 지도들의 상호비교를 통한 이러한 분석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명나라 초기 중국이 세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게빈 멘지스도 천하전여총도를 거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만 내세울 뿐, 지도의 진위 문제에 있어선 제대로 된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천하전여총도를 세상에 내놓은 중국의 변호사 류강이 2009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고지도의 비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지도의 비밀’은 천하전여총도를 표지로 삼아 무려 700여 쪽의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전여총도 자체의 구체적 분석보다 그저 지도의 존재를 알리며 진품임을 주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처럼 진품 주장의 목소리는 높지만 실상 내용은 빈약할 뿐이다.

어쨌든 독자들은 이제 천하전여총도가 실제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모본으로 한 1763년의 지도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진품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것이다. 어쩌면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보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이어서 놀라운 또 다른 증거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말이다.

어쨌든 나의 시각으론 베스콘테 지도와 잘티에리 지도는 그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간주한다. 더구나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도 그것을 뒷받침하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이는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