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2]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①

자연정화 2018. 7. 11. 12:33

[2]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①

 

1.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1.1. 고구려 5부체제의 성립

현토군이 퇴축된 뒤,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소노(消奴)집단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집단(那)주 02)들을 규합한 완만한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나(那)’는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를 흐르는 하천 변에 형성된 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시원적인 소국(小國)주 03)이었다. 퇴축된 후 현토군은 고구려 연맹체 내의 각각의 나와 외교·무역 관계를 가져 이를 개별적으로 조종하여 고구려사회 내에서 강력한 통합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런 현토군의 간접지배 정책이 상당 기간 효과를 발휘해, 고구려 사회 내에서 혼돈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부여 방면에서 남하해온 계루(桂樓) 집단이 두각을 나타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주몽이 신통술 대결을 통해 송양왕(松壤王)을 눌렀다는 설화는 소노집단에서 계루집단으로 연맹체 장이 교체된 사실을 전하는 바이다.『후한서(後漢書)』고구려전에서 전하는 고구려후 ‘추(騶)’는 추모(鄒牟) 즉 주몽(朱蒙)으로서, 기원 전후 무렵 고구려의 군장인 추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설화는 그 구성이 부여의 동명설화(東明說話)와 흡사하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예(濊)족인 부여인의 묘제(墓制)는 석관묘(石棺墓)와 토광묘(土壙墓)였는데 비해, 맥족인 고구려인의 그것은 적석총이어서 차이가 난다. 만약 부여족의 일단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면 압록강 중류 유역에 석관묘나 토광묘 무덤 떼가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런 점을 들어, 주몽설화는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하여 후대에서 만든 것으로써 실제상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설이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계루집단은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온 주몽집단을 중심으로 여러 계통의 이들이 결합한 혼성 집단이었으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대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설화는 4세기 후반 공식적인 고구려의 건국설화로 정립되어질 때 부여의 동명설화가 이에 대폭 차용되어졌으나, 이에는 고구려 건국기의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즉 주몽설화의 사실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이해이다.

 

인근의 다른 ‘나’들을 통합하며 계루집단의 세력이 확대해나가자, 이를 억제하려는 한군현(漢郡縣) 세력이 개입하여 다른 나를 지원하거나 직접 침공하여, 고구려 내부의 분열을 유발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 집단이 한군현의 작용력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에서 이탈해 나가기도 하였고, 나들 간의 상쟁을 불러일으켜, 1세기 후반 이후 장기간에 걸친 내분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2세기 초 재차 고구려연맹체의 통합력이 형성된 것은 태조왕(太祖王)주 04) 때였다. 태조왕궁(宮)은 아마도 주몽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계루부 내의 방계 세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한군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의 여러 나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외부와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즉 각 나의 자치권의 일부를 박탈해, 무역·외교·전쟁권을 왕권에 귀속시켰다.

 

나아가 일부 나들은 계루부에 병합하였다. 압록강 중류 유역의 나들은 그간 그들 사이에서 진행되어오던 상쟁과 통합으로, 태조왕대에 이르러 다섯이 되었고, 계루부 왕권에 의해 이들 다섯 집단의 자치력 일부가 통제되었다. 이것들이 곧 5부(五部)이다. 대내적 통합력을 강화한 뒤 태조왕은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옥저와 동예의 읍락들을 공략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서남쪽으로는 현토군과 낙랑군(樂浪郡) 등과 대결을 벌려나갔다. 북으로는 부여와 상쟁을 이어갔다. 이런 형세는 그 뒤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1.2. 고구려 5부체제의 정치구조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아 대외교섭권은 상실하였지만, 각 부는 그 내부의 일에 관해서는 자치력을 지녔다. 왕족 대가(大加)들과 각 부의 장들은 휘하에 자신의 관인을 두었다. 그렇지만 동일한 관등을 지녔을지라도 각 대가들 휘하의 관인은 왕에 속한 관인과 동열에 서지 못하였다.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상하 서열이 주어졌다. 주요 국무는 왕족 대가와 각 부 대가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처결되었다.

 

왕은 고구려 전체의 왕인 동시에 계루부의 장이었다. 그는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대가들의 대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곧 ‘primus inter pares’(동료들 중의 최상위자)라 할 수 있다. ‘사연나(四椽那)’ 즉 연나부(椽那部) 내의 4개의 집단과 같이, 각 부에는 그 안에 부내부(部內部)라고 불릴 수 있는 하위의 자치체들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5부에 의해 정복된 집단들에 대해선, 그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에 맡기고 수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식으로 간접 지배하였다.

 

동예와 옥저의 읍락 등이 그러하였다. 양맥(梁貊)의 읍락들도 그러하였다. 초기 고구려국은 이런 각 급 자치체의 연합체였다. 여러 자치체 중 5부는 지배종족으로서 고구려국 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옥저와 동예양맥의 읍락들은 피정복민으로서, 일종의 집단예민적(集團隸民的)인 성격을 지녔다. 당시 ‘고구려’라 하였을 때,『삼국지』동이전에서처럼 이를 5부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달리 5부와 함께 옥저·동예·양맥의 읍락 등 5부에 정복된 예민 집단들을 포괄하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5부와 여타 피복속집단들은 실제상 고구려 국가 구조 내에서 그 정치적 위상이 엄연히 구분되어졌다.

 

각종 자치체들을 상하 위계에 따라 누층적으로 쌍아올린 형태가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였다. 주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국가구조를 형성케 된 것은 각급 자치체들을 해체하고 관료조직을 통한 일원적인 지배방식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근본적으로는 당시까지 읍락에 공동체적 관계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조직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적 통합력과 동원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제가(諸加)회의와 같은 기구를 통한 정책결정 방식과 함께, 전통적인 제의(祭儀)가 주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전국적인 규모로 동맹제(東盟制)라는 축제가 열렸다. 동맹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지녔다. 동맹제의 구체적인 진행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일신(日神)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어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불러내어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神像)에 접신케 한 뒤, 천으로 신상을 덮고 배에 태워 압록강을 통해 국내성의 제사 장소로 옮겼다. 수신이 도착하여 수신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리며 신상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면, 햇빛이 신상에 가득 비치어 제의가 절정을 맞는다.

 

즉 수신(隧神)은 수신(水神)으로서 여신인데, 이에 남신인 햇빛(日神)이 비쳐, 양신(兩神)이 교접하는 형상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곧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준 일신과 수신에게 감사를 드린 후 두 신을 교접케 함으로써, 새 생명을 잉태하여 내년에도 풍성한 수확을 약속받는다는 것을 제의를 통해 나타내었다. 이런 제의의 진행과정을 주관하는 최고 사제가 곧 고구려왕이다. 왕은 인간들의 감사와 바람을 신들에게 전하고 신들의 약속을 인간들에 전하는 신성사제였던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왕 자신이 신성왕(神聖王)으로 형상화되었다.

 

동맹제 때, 5부의 유력자들은 왕이 집전하는 제의에 참여하였다. 만약 이 제의에 참석치 않는다면 이는 곧 반의(反意)가 있다고 간주되어진다. 왕이 집전하는 신께 올리는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왕은 이런 제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고, 지배층의 결속을 도모하였던 바이다.

 

아울러 동맹제가 수도에서 행해질 때 각 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와 함께 물자교류가 행해지며 기예를 다투는 각 종 놀이가 행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역시 각 부와 부내부의 주민들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한 정서적 결속 도모에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1.3. 고구려 정치정세의 변화

5부체제 하에서 고구려 내부의 정치정세는 서로 길항(拮抗) 관계에 있던 계루부 왕실의 통제력과 각 부의 자치력 간의 관계의 진전에 따라, 그리고 왕과 왕족, 대가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점차 왕실의 집권력이 각 부의 분권력을, 그리고 왕권이 왕족대가들의 권력을 압도해가는 상황으로 진전되어갔다. 그와 함께 왕위계승 관행도 바뀌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는 사회분화의 진전에 따른 친족관계와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에서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었다. 사회분화에 따라 발생하는 빈농(貧農)을 구제하기 위한 조처인 진대법(賑貸法)이 고국천왕(故國川王)대에 시행된 사실은 이런 추세를 말해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고구려 초의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확립되지 못한 형태였다. 다분히 형제계승의 모습을 띄었다. 그러다가 2세기 후반 신대왕(新大王) 사후 그 아들인 고국천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왕비 우씨(于氏)가 시동생인 발기(拔奇)주 05)와 이이모(伊夷模)주 06) 중 나이가 적은 이이모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추대하고 신왕과 결혼한 일이 일어났다. 이에 발기가 반발하여, 요동의 공손씨(公孫氏)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는 왕위계승분쟁이 발발하였다. 이를 고비로 이후에는 부자계승이 정착되었다. 즉 이이모(산상왕)의 사후 그 아들 동천왕(東川王)이 왕위를 이었고 그 뒤로 왕위의 부자계승이 확립되었다.

 

또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취수혼(娶嫂婚)주 07)도 동천왕대 이후 더 이상 지배층의 혼인관행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왕위의 형제계승과 취수혼이 반드시 서로 동반하는 관행인 것은 아니지만, 상호 적합적 관계에 있다. 모두 친족의 공동체적 관계가 잘 유지되던 사회에서 흔히 행해지던 습속이다. 그런데 사회분화의 진전과 함께 친족관계도 분화되어져 감에 따라 취수혼이 더 이상 선호혼(選好婚)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각 부의 자치력도 점차 약화되고 반면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갔다. 대외전쟁은 이런 추세를 촉진하였다. 그 결과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유한 명칭을 띄었던, 자치력을 지닌 정치단위로서의 5부는 소멸되었다. 이제 부(部)는 수도의 행정구획 단위가 되었다. 방위명(方位名) 5부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시기에 형(兄) 등 새로운 관등을 핵으로 하는 관등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4. 고구려 대외관계의 확대와 관구검의 침공

고구려 건국기의 대외관계의 주된 대상은 한(漢)의 변군(邊郡)이었다. 이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으로는 한군현의 침투와 분열 책동을 막고 그들의 문물을 수용하는 교역관계를 유지하였다. 적극적으로는 요동군과 현토군·낙랑군 등 한군현 지역을 공략하여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였다.

 

한편으로는 인근의 부여를 압박하고 일부 유목민 집단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한군현은 고구려 내부의 각 자치집단과 고구려에 귀속해 있던 유목민 집단 등의 한군현으로의 이탈을 부추기거나, 산상왕 즉위 분쟁 때처럼 고구려 내부 상황을 이용해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고, 일면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던 부여를 지원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런 양자의 관계는 3세기 중반에 들어 변화하는 면을 보였다. 후한제국이 멸망하고 중국대륙에 세 나라가 대치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중국의 오(吳)가 북중국의 위(魏)를 공략하기 위해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위의 보복을 두려워한 공손씨가 오와의 동맹을 거부하자, 오는 동편의 고구려에 손을 내밀었고, 고구려도 이에 응하여 사신을 오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 위가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공략하여 멸하였다.

 

이제 고구려가 위와 직접 국경을 접하며 그 압박을 받은 상황이 되었다. 동천왕이 오와의 관계를 끊어 위에 우호적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남쪽의 오와 동북쪽의 고구려가 연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위는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244년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군(魏軍)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혼강(渾江) 유역에서 위군을 맞아 분전하였다. 근접하여 벌리는 단병접전에선 고구려군이 우세하였으나. 진을 치고 대규모 집단적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마침내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다. 동천왕은 옥저 방면으로 피난해야만 하였다.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추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위군은 회군하였다. 이 때 관구검이 환도성 인근인 소판차령에 기공비를 남겼다. 이듬해 재차 위군이 침공하여, 북옥저(北沃沮)주 08)를 거쳐 부여(길림시 일대)로 우회하여 귀환하였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수도인 환도성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전 후 동천왕은 수도를 임시로 ‘평양’에 옮기었다.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독로강(禿魯江)주 09) 유역의 강계 지역으로 보거나 집안의 평지 지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전란에 따른 피해가 컸었지만, 위군은 고구려 영토에 주둔치 못하고 곧 회군하였으며, 이후 중국 내에서의 삼국 간의 분쟁과 이은 위나라 지배층 간의 권력투쟁으로 위군의 압박은 지속적인 것이 못되었다.

 

 

고구려는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국가체제를 재정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집권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비록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이후 북중국 왕조와의 교섭하면서 별도로 남중국 왕조와도 관계를 맺는 등 그 대외교섭의 폭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복잡한 국제 관계와 각 국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새로운 경험을 쌓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다음 세기에 들어 전개된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동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데에 유효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