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3]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②

자연정화 2018. 7. 11. 12:38

[3]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②

 

2. 고구려 중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형성과 천하관(天下觀)

 

2.1. 4세기 이후 고구려의 대외적 진출

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는 격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국의 진(晉)제국이 무너지고 주변의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전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고전 문명의 중심지였던 북중국 지역이 혼돈에 빠졌다. 많은 북중국의 주민들이 장강(長江) 이남으로 이주하였고, 북중국에선 흉노(匈奴)·선비(鮮卑)·저(氐)·갈(羯)·강(羌) 등의 유목 종족이 이주하여 왕조를 세우며 그들 간에 엎치락뒤치락 흥망을 거듭하는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심축이 붕괴되고 국제적인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그간 중국왕조의 압박을 받아왔던 중국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에게 변화와 발전의 호기를 제공하였다.

 

고구려는 (서)진제국의 몰락에 따라 지원 세력이 없어진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313년과 314년에 각각 이를 병탄하였다. 서로는 요동평야로 진출하여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모용선비(慕容鮮卑) 등의 유목민 집단들 및 한(漢)인 잔여세력 등과 벌였다. 북으로는 부여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나갔다. 당시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 일대에 중심지를 두고 있었는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왕이 자살하고 부여인들이 대거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곧 이어 진나라의 지원을 받아 국가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옛 터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지역에 머물다가 점차 자립하였으니, 이것이 동부여이다. 복국(復國)한 뒤, 부여는 북진하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에 길림 지역을 포기하고, 서쪽 농안 방면으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한편 서북 방면으로 뻗어나가던 고구려의 기세는 모용선비의 공세로 벽에 부딪쳤다. 342년무순의 현토성(玄菟城) 방면에서 국내성으로 나아가는 교통로 중 비교적 험준한 남로(南路)주 10)를 통해 진군해온 모용황(慕容皝)의 침공군에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북로(北路)주 11)를 택해 침공하였던 모용선비군이 고구려 주력군에게 격파되었기 때문에 모용황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버지인 미천왕(美川王)의 시신를 발굴해 가져가고 왕의 모후(母后)와 왕비를 인질로 사로잡아 급히 귀환하였다. 고국원왕이 곧 수도를 회복하였으나, 모용연(慕容燕)과의 관계에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졌다. 고구려에게 타격을 가한 뒤, 모용연은 346년농안 방면에 있던 부여국을 공략하여 그 왕과 5만여 명의 주민을 사로잡아갔다. 크게 약해진 부여는 이후 고구려에 의지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렇듯 4세기 중반 요동평원의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고구려는 모용연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여, 그 세력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에서부터 백제의 세력이 북진해와 낙랑·대방 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쟁투를 벌리었다. 양군은 371년평양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

 

2.2. 고구려 소수림왕대의 개혁

고구려는 서와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수도가 불타고 그 국왕이 전사하는 등 타격을 입어, 위기에 빠졌다. 모두루(牟頭婁)와 고자(高慈)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자기 집안의 시조가 주몽의 건국에 기여하였음과 중시조가 모용황의 침공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모용황의 침공에 따른 위기가 당시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되고 기억되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는 몇몇 개혁이 추진되었다. 먼저 약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적 결속을 도모키 위해, 건국 설화와 시조 이래의 왕실 계보를 확립하였다. 고구려 건국 신화는 하백(河伯) 즉 강의 신의 딸인 유화(柳花)가 햇빛을 받아 임신하여 낳았던 주몽이 부여에서 박해를 받아 남하하여 고구려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그 아들인 유리(琉璃)가 뒤에 아버지를 찾아 부여에서부터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손자인 대무신왕(大武神王)대에 부여를 공격해 격파하여 그 압박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고구려 초기사에 관한 이러 저러한 설화가 여러 갈래로 전해져 왔는데,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부여의 동명설화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수식하기도 하여, 왕실의 공식적인 전승(傳承)으로 확립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건국설화의 정립은 곧 고구려 건국사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라고 하겠다.

 

이와 함께 왕실의 계보를 정립하여 공인하였다. 시조 주몽의 직계 후예로 이어져오던 계루부 왕실은 앞서 말했듯이 1세기 후반 이후 상당 기간의 정치적 혼란을 거친 뒤 태조왕이 재차 통합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태조왕 직계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은 사실상 태조왕을 시조로 하는 계보의식을 지녔다. 그에 따라 태조왕 이전 시기 재위하였던 왕들과 그들의 계보에 관한 전승이 일정치 않았다. 그런 면은 현전하는 문헌의 단편에서도 확인된다. 이제 왕실이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주몽왕계(朱蒙王系) 태조왕계(太祖王系)를 결합한 단일 왕계를 공인하였다.

 

즉 공식적인 건국 전승과 왕계를 정립하고,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여,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결속을 도모하였다. 곧 왕실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건국설화를 확정하고, 왕실의 계보를 정립함을 통해, 패전과 왕의 전사 등에 따른 충격을 계기로 일어날 수 있는 국내 여타 정파의 이탈이나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누르고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아울러 현 상황이 요구하는 위대한 군주의 모습을 건국설화를 통해 표현하려 하였다. 3대 대무신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강력한 정복군주로 형상화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이 때 제정된 율령이 중국 어느 왕조의 율령을 모법(母法)으로 한 것이며, 그 구체적인 편목이 무엇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추정이 제기될 뿐이다. 그렇지만 굳이『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이 기사의 사실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율령은 나라의 제도와 형벌에 관한 규정을 담은 중국왕조의 법률체계이다.

 

다른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지닌 나라에서 율령을 수용할 때 모법이 그대로 이식될 수는 없고, 받아들이는 나라의 상황에 맟게 변용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율령의 반포가 곧 전체 법률체계를 중국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나라의 체제를 율령에 입각한 체제로 전반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3년에 중국적인 법률체계인 율령을 반포한 후 고구려의 법에는 율령적 요소와 함께 고유법적인 요소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은 율령이 지향하는 체제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령은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차를 넘어서 보편적인 성격을 띈 제도와 형벌체계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직접적으로는 군현제에 입각한 제민(齊民)지배를 지향하였다.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구려에서는 군현제를 지향하는 지방제도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율령이 반포되었고, 그것은 곧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겠다는 개혁 방향의 제시였다.

 

그런 의지는 율령반포 한 해 전인 소수림왕 2년(372) 태학(太學)을 설립한 데서 이에 표명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에 필수적인 요소가 문서행정에 밝은 인력이다. 태학의 설립은 새로운 관료조직의 확대에 대비한 인재의 양성 조처였다.

 

소수림왕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개혁 조치는 불교의 공인이다. 이때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북중국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였다. 북방불교에선 ‘왕이 곧 부처임(王卽佛)’을 표방하였다. 이는 5호16국의 혼란한 시기에 호(胡)족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북방불교는 호족 취향에 맞게 주술적(呪術的)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요소를 다분히 많이 띄었다. 불교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구려에 수용되었으며, 왕실이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왕즉불의 사상은 왕실의 천손의식(天孫意識)과도 부합할 수 있는 바였다. 아무튼 불교는 고구려 영내에 포괄된 종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신앙을 보다 보편성을 지닌 종교의 세계로 귀합시켜 나가, 고구려 영내 주민들의 융합을 촉진하였다. 아울러 인도-서역-중국으로 이어지는 전파 경로를 거치면서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져 있는, 당시 최고의 국제문화인 불교를 통해 고구려는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2.3. 5세기∼6세기 전반 고구려 중앙집권화의 진전

 

2.3.1. 광개토왕·장수왕대의 대외적 팽창

4세기 후반 개혁을 통해 내적 체제 정비에 주력하였던 고구려는 391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즉위와 함께 급격한 대외적 팽창을 해나갔다. 고국양왕(故國壤王) 대에 고구려의 북변을 침량하였던 거란을 원정하여 일부 부족을 공략하고 피랍된 고구려인을 귀환시키었다. 서로는 요동평야를 둘러싼 쟁패전에서 모용씨의 후연(後燕)을 격퇴하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이어 남으로 세력을 뻗쳐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하류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한강 상류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었다. 한편 신라가 백제와 왜(倭)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의 지원을 요청하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 수도를 거쳐 낙동강 하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백제군과 왜군 및 가야군의 연합세력을 격파하였다. 이번 원정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 주민에 대한 고구려 조정의 이해가 깊어졌으며, 신라에 깊이 고구려 세력을 부식하였다.

 

 

아울러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은 한반도 남부 지역 여러 나라들의 전력 정비와 군사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동북방으로도 진출하여 동부여를 병합하였다. 동부여는 앞서 말했듯이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망명하여 자립한 나라이다. 고구려군이 수도로 밀려오자 동부여 왕실은 저항치 못하고 항복하였다. 412년 왕이 죽자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즉 ‘국강상(國原)에 능이 있는, 크게 땅을 넓히고 세상을 평안하게 한 좋은 태왕(太王)’이란 의미를 지닌 시호이다.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427년평양으로 천도하였다. 평양천도는 국가의 중심지를 옮긴 것인 만큼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이 이후 고구려의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조처로서 의의를 지녔다. 전략상으로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혼강 상류로 나가 소자하(蘇子河) 유역을 거쳐 무순·심양 방면으로 진출하여 요동 평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뒤 요서(遼西) 지역을 차지하고 내몽고 초원 지대로 나아가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계의 제압을 도모하는 진출방향이 상정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요서에서 서남방의 북중국 방면으로 나가 중국 천하를 놓고 쟁패전을 벌리는 방략이 상정될 수 있다. 청나라의 팽창 과정이 그것을 잘 말해주며, 여진족의 금나라도 크게 보면 이런 경로를 취해 팽창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함으로써, 요하 서쪽으로의 팽창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실제 그 이후 고구려 조정의 대외정책도 그러하였다. 그 대신 한반도로의 남진책(南進策)을 강화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신라·가야 간의 화전(和戰) 양면에 걸친 교류가 증진되었다.

 

물론 이후 고구려가 요서 지역의 정치 정세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430년대에 들어 선비족의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北魏)가 세력을 동으로 확장해와 북연(北燕)을 압박하니, 북연 황제 풍발(馮跋)이 동으로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436년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주 12)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고구려군이 먼저 성에 들어가 성내를 석권하고 북연 황제와 그 주민을 몰아 동으로 귀환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직접 무력 충돌을 하진 않았지만, 양측은 이후 상당기간 동안 첨예한 대립상을 보였다. 520년대에도 북위의 내분에 따른 혼란한 상황에서 고구려군이 용성 지역에 진주하여 많은 수의 그 지역민을 고구려로 이주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요하 상류 방면의 거란 부족들 중 일부를 고구려 세력 하에 귀속시켰다.

 

470년대에는 고구려가 유연(柔然)과 모의하여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동록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을 분할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자 그 남쪽의 해(奚)족과 거란족이 동요하여 이동하는 등의 분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고구려가 요서지역과 그리고 요하 상류나 흥안령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른 일들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북중국 방면으로의 진출이나 몽골 초원의 제패를 도모하였던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몽골고원이나 북중국 방면으로 뻗어나가려 하였다기보다는 그 방면으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고구려 세력권을 공고히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광개토왕대 이래로 신라에 미친 고구려의 영향은 장수왕대에도 이어졌다. 경주평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그런 면을 증언해준다. 호우총(壺杅塚)의 청동 호우(壺杅), 금관총(金冠塚)의 네 귀 달린 청동제 항아리, 서봉총(瑞鳳塚)의 연수명(延壽銘) 은그릇(合杅) 등은 그런 예이다.

 

한편 475년장수왕은 3만군을 파견하여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략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참살하였다. 이후 한강유역의 상태에 대해서는, 고구려군이 귀환한 뒤 한강 하류 지역은 사실상 방기되었다는 견해도 있었고,『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사에 따라 백제군이 북진하여 한강 하류를 회복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전자는 한강 하류 지역에 고구려 관계 유적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였다.

 

그런데 근래 이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다수 발견되어 더 이상 이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551년 백제군이 다시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하였을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6개의 행정 단위(郡)가 설치되어 있었던 만큼, 475년 이후 얼마 안 있어 백제가 탈환하였다고 단정키 어렵다. 475년에서 551년 사이 기간 중, 지역에 따라 그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변동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강 하류 지역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다.

 

 

한강 상류 지역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세력이 뻗치고 있었다. 나아가 죽령(竹嶺)을 넘어 영주·봉화·영양·울진·영덕 등 경북 북부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고구려는 금강 상류의 청원군 방면으로도 세력을 부식하여 남성골에 산성을 축조하니, 그에 대응해 맞은 편 보은지역에 신라가 486년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였다.

 

이렇듯 5세기 종반 고구려가 남으로 한반도의 중부 지역을 석권하고 계속 남진세를 보이자 이에 대응해 백제·신라·가야가 연합하여 대응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한편 고구려는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부 부족을 그 영향력 하에 두었으며, 중·동부 만주의 말갈 부족들 다수를 복속시켰다. 그와 함께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런 형세는 5세기 말 6세기 초 물길(勿吉)의 성장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6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2.3.2. 지방제도의 정비

4세기대 이래로 지속되었던 대외적 팽창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조정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주력하였다. 중앙 관서조직의 확충과 함께 확대된 영역을 지방제도로 편제하여 통치해나갔다. 고구려 발상지였던 압록강 중류 지역은 5부의 자치력 약화와 함께 곡(谷)을 단위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4세기가 진전되면서 영토가 늘어난 일부 변경지역에 축성(築城)을 하고 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포괄하는 지방통치 단위가 설정되었다.

 

4세기 이후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군(郡)제가 고구려 영내에, 모든 지역은 아니지만, 상당히 널리 시행되었다. 이 시기 군제가 시행되었음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구체적으로 ‘군(郡)’이란 표현이 있고, 한강 유역 16개 ‘군’의 존재나 고구려 후기 무관직인 ‘말약(末若)’을 일명 ‘군두(郡頭)’라 한 것 등의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군 아래에 몇 개의 하위 성이 있었고, 그 아래 촌(村)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이 수사(守事)였던 것 같다. 군은 통상적으로는 성(城)이라 칭하고 그 지방관의 칭호를 통해 군임을 나타내었다.

 

지방제도의 시행은 피복속민을 지역단위로 편제하여 지배코자 한 조처이며, 이는 곧 피복속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함을 의미한다. 율령이 반포된 이후에는 그에 입각해 지방관이 지역민을 통치하였다. 곧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수립과 제민지배(齊民支配)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대왕국토(大王國土)’라는 표현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지방지배가 공납제적인 것에서 조세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고구려 세력 하에 있던 말갈족과 일부 거란족은 지방제도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되어 공납과 군사적 조력을 하였다.

 

군제는 6세기 중반 이후 변화가 있게 되었다. 중앙정계의 재편과 함께, 수사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고, 욕살(褥薩)주 13), 처려근지(處閭近支)주 14), 루초(婁肖)주 15) 등이 새로 지방관의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욕살과 처려근지 등은 군정권과 민정권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그 치소(治所)가 산성 안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방제도와 군사제도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군사국가적인 면모를 강하게 띄었다.

 

고구려 말기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점차 광역의 지역별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욕살’이 주재한 성을 중심으로 다수의 성들을 통괄하는 광역의 행정·군사구역이 편성되는 경향을 보였다. 667년에 작성된 일종의 전황표(戰況表)인 ‘목록’에서 보듯, 욕살의 성을 가르킨 ‘주(州)’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한 것도 이런 면을 말해준다.

 

2.3.3.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天下觀)

5세기대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포괄하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고구려 지배층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이 천하관은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객관적인 형세가 반영된 것인 동시에, 고구려 대외정책 수립에 기본 토대로 작용하였다.

 

천하관은 국내외의 현실 정치질서에 대한 인식을 담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국의 성격이 어떠하고, 국제사회에서 자국과 인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를 개진한 것이다. 5세기대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이에 관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기술되어져 있다.

 

 

먼저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천하 사방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된 논거로 만유를 주재하는 신인 천제(天帝)가 고구려 왕실의 조상신이며, 고구려왕은 천제의 신성한 핏줄을 이은 ‘천손(天孫)’임을 내세웠다. 이런 천손이 다스리는 나라는 여타 주변국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나라를 신성한 천손국으로 여김은 곧 주변의 나라나 집단들은 마땅히 고구려에 복속하여야 할 존재들로 규정하는 의식과 연결된다. 그래서 고구려 지배층은 자국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하 조공관계(朝貢關係)로 규정하였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하 조공질서를 형성한 그러한 국제정세를 유지하는 것을 ‘수천(守天)’, 즉 천제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고구려왕은 ‘수천’의 주체임을 자부하였다. 또한 중원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였음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조공국을 대비해 이를 화(華)와 이(夷)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화’와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계에 의거한 구분일 뿐이었다. ‘대왕국토’ 주민의 존재 양태가 신라·백제 주민의 그것과 사회적·문화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당시 고구려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즉 동아시아는 몇 개의 천하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겼다.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의 천하, 중국인들의 천하, 그리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천하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간의 관계에서 중국적 천하의 상대적인 우위성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 각 천하는 병존하여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실제 이 시기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및 몽골고원의 유연과 각각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세력균형 상태를 유지케 하는 방향에서 대외관계를 추진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가장 강대하고 팽창적인 북위와 밀접한 교섭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남조와 유연의 연결을 도와주는 등 북위의 팽창을 견제하여,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또한 이런 다원적 천하관(多元的 天下觀)에 의해,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천하에 속한다고 여긴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는 자연 그 바깥에 있는 집단들과 구별하여 인식되었다. 그러한 측면이 객관적인 지리적·문화적·정치적 및 종족계통적 측면 등과 결부되어, 신라·백제·동부여·북부여 등에 대해 일정한 동류(同類)의식을 형성케 해주었다.

 

아무튼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고분벽화의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집안오회분(集安五灰墳) 4호분, 강서대묘(江西大墓) 등의 벽화 구성은 황룡과 북극성으로 상징되는 오방위 우주관과 천하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중앙을 상징하는 천청에 황룡과 북두삼성(北斗三星)이, 사방의 고임돌에 사신도(四神圖)와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 왕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었던 피장자가 누워 있는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죽은 자에 대한 표현은 현세에 대한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써, 당시인들이 지닌 천하관의 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