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4]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③

자연정화 2018. 7. 11. 12:44

[4]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③

 

3.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체제로의 변화

 

3.1.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정세 변동

3.1.1. 왕위계승 분쟁과 내우외환

6세기가 진전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고,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년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되었다. 안원왕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웠다. 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추군과 세군은 서로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 우세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였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궁문 앞에서 벌어졌다. 이후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은 여파는 지방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년 당시 한강 상류의, 아마도 충주지역의 사찰에 머물고 있던 승려 혜량(惠亮)이 진격해온 신라군에 투항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고구려는 서북방면에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북제(北齊)문선제(文宣帝)가 552년과 553년에 걸쳐 요하 상류 지역의 해(奚)와 거란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창려성을 직접 순시하여 요하 선을 압박하였다. 이와 함께 552년에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 북위 말기인 520년대에 고구려로 넘어온 북위 유민(流民) 5천 호를 다시 쇄환해갔다. 거란의 일부를 휘하에 두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한편 이 시기 몽골고원에서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이 멸망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업(冶鐵業)에 종사하며 알타이 산맥 서남록 준가르 초원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년 옛 상전국인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활기찬 신흥 유목제국은 조만간 흥안령을 넘어 요하 유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기세였다. 초원에서의 세력교체에 따른 파장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년대 초에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내우외환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귀족들 간의 내홍을 중단하고 그들 간의 갈들을 수습하기 위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 간에서 선임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방어력이 크게 강화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기하였다. 기존의 궁성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터 자리에 있었고, 궁성 외곽에 시가지가 조영되어 있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평양 중심부에 위치하며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나성(羅城)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형태였다. 실제 신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뒤인 586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두 방면에서 맞이하는 외침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었다. 양국 간 화평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고구려는 이미 상실한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과 그리고 함흥평야를 포함한 동해안 일대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 같다. 신라로서도 평야지대이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 지역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이런 양국이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사실은『삼국유사(三國遺事)』와『신당서(新唐書)』신라전,『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서 전하고 있고,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인접국이 신의를 서약하고, 평화의 사절이 오고 갔다”고 하였다.

 

이어 553년백제가 점령한 한강유역을 신라가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랜 숙원인 고토회복에 성공하였지만, 곧이어 동맹국 신라의 공격으로 이를 상실하게 되니, 백제성왕(聖王)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듬해 백제군과 가야군 및 1천여 명의 왜군을 동원한 백제의 반격전이 벌어졌다. 백제군은 관산성(管山城)주 16)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 때 성왕도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다.

 

관산성전투 이후 신라와 백제 간에는 해를 이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남부 국경 일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런 뒤 고구려는 주력을 서북으로 돌려 돌궐의 침공에 대비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3.1.2. 귀족연립정권 체제 형성

양원왕 즉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귀족들 간의 분쟁은 내외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대대로 선임제를 매개로 한 귀족들 간의 절충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런데 이 타협책이 잠정적인 수습안에 불과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뒤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6세기 후반의 상황을 전하는『주서(周書)』고려전에서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상쟁을 벌여 이긴 자가 스스로 취임하며 왕이 임명치 못한다”고 하였다.『구당서』고려전과『한원』에 인용된「고려기(高麗記)」등에서도 같은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전한다.

 

즉 6세기 후반 이후 국정을 총괄하는 직임인 대대로를 3년 마다 고위 귀족들이 선임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해『위서』고구려전 등 6세기 전반 이전의 상황을 전하는 사서에서는 이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왕권이 강대하였던 6세기 이전 시기에는 대대로가 귀족들 간에서 선임되지 않았거나, 선임되었더라도 대대로의 지위가 권력의 중추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 상태에서 변화가 생겨,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규모 분쟁을 거친 후, 대대로가 귀족들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표하는 지위가 되었고, 대대로를 3년마다 선임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직임을 잘 수행하면 연임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즉 유력 귀족이 세력을 유지하면 계속 집권할 수 있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일종의 귀족연립정권체제(貴族聯立政權體制)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선임은 곧 연맹체장 선임의 유제(遺制)를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임의 주체는 중앙귀족이었다. 귀족연립정권 하에서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지방할거 상태가 아닌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귀족들이 전면에 대두하였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 집안도 6세기 후반 이후 두각을 나타낸 신흥 귀족이었다.

 

3.1.3. 대외관계 상에서의 변화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신라의 약진이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중국왕조와의 교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남조와의 교섭에 치중하였던 종전과는 달리 북조와의 교섭도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북제(北齊)는 565년진흥왕을 “사지절도독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都督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에서 유의되는 것은 종전에 중국왕조의 고구려왕에 대한 책봉벼슬에서 관행적으로 주어지던 “동이교위(東夷校尉)”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 등 동이를 주관한다는 벼슬이 신라왕의 책봉 벼슬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중국왕조의 책봉호가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벼슬은 아니었지만, 동이 문제는 고구려에 일임한다는 자세에서 이제 고구려만이 교섭의 대상이지는 않다는 식의 변모를 나타내었다. 당시 백제도 북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남조의 진(陳)과의 교섭을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교섭이 없던 왜국과 공식적으로 통교(通交)하여 570년에서 574년 사이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역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지녔다. 한편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돌궐를 격파하여 그 동진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전제적으로 볼 때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대외관계의 상황은 종전과 다른 면이 많아졌다. 삼국간의 관계는 종전의 고구려에 대항해 신라·백제·가야가 연합하던 형태에서 삼국이 각개 약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간의 상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고구려 남부 국경 일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졌다. 북제와의 관계도 북제 자체가 돌궐의 압력을 방어하는데 주력해야 했던 만큼, 고구려와의 갈등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돌궐의 팽창세력 또한 동으로는 고구려에 의해 저지되었고, 남으로는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선에서 머물렀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은 기존의 국제관계의 틀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581년 수(隋)제국의 등장은 기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상황 변화를 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격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3.2. 고구려와 수(隋)의 전쟁

581년수(隋)가 건국되었고, 이어 동돌궐(東突闕)을 격파, 복속시켰다. 나아가 589년 남중국의 진(陳)을 통합하였다. 삼백여 년 만에 강대한 통일중국왕조가 등장하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인접한 나라들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고구려는 진의 멸망 소식에 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은 그런 위기의식에서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기존의 국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재편을 요하였다. 즉 5∼6세기 대에 유지되었던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타파하고, 중국왕조 중심의 일원적인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간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지탱하던 주요 세력들인 몽골초원의 유목민 국가, 남중국의 왕조, 북중국의 왕조, 티베트 고원 동북 사면의 토욕혼(吐谷渾), 한반도와 만주의 고구려 중에서 고구려를 제외하고 모두 수제국에 통합되거나 격파·복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수의 압박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과의 협력을 통해 수제국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의 세력 하에 굴복한 돌궐이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수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수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었다. 고구려와 수의 대결은 후자의 네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진행되었다.

 

수나라는 수륙 양 방면으로 대병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일거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에 대응해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면으로는 적의 최대 약점인 긴 보급선을 교란, 차단하면서 가을이 되어 추위와 보급 부족에 시달리게 되기를 기다리는 장기 지구전을 펼쳤다. 이에 조급해진 적군이 별동대(別動隊)로 무리한 침투 기습전을 벌리면, 이를 내륙 깊숙이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는 방책을 취하였다. 이런 고구려의 작전에 말려 수군은 번번이 패배하였다.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마라(無向遼東浪死歌)”가 수나라 말기 민중 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음에서 보듯, 고구려 침공에서의 거듭된 패배와 전쟁에 따른 고통과 재정파탄이 주요 원인이 되어 수제국은 멸망하였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서 유의되는 점은 양국 간의 전쟁이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제와 신라는 수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수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이에 부응해 고구려 남부 국경을 공격하는 형태의 공동 작전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정작 전쟁이 벌어졌을 때 백제와 신라는 모두 한 걸음 물러서 정세를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아무튼 수제국의 등장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고구려에 의한 수군 격퇴에 의해 저지되었고, 요하 이동으로 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3.3. 고구려 연개소문의 집권

3.3.1. 정변

수를 이어 등장한 당(唐)은 혼란에 빠진 중국을 재차 통합하고, 이어 수나라 말기 이후 강성해진 돌궐을 격파하여 몽골 초원의 유목민 사회를 제압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당과 고구려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고, 당고조(高祖)이연(李淵)은 “당과 고구려가 각기 자기의 영토를 지키며 평화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은 굳이 고구려를 신속(臣屬)시키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화공존론은 곧 당의 신료들의 이념적인 반대에 봉착하였으며, 이어 당이 국내를 통일하고 주변의 인접국들을 정복해나가자 고구려 정벌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런 흐름의 중심에는 당태종(太宗)이세민(李世民)이 있었다. 그는 돌궐의 힐리가한을 격파한 뒤, 몽골 고원 유목민집단의 수장들로부터 630년 유목세계의 패자라는 의미를 지닌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었다. 이제 그는 농경세계와 유목세계를 아우른 ‘황제-천가한’이 되었다. 이에 팽창해오는 당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구려 조정은 631년 2월 북으로 부여성(夫餘城)에서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해 7월당 조정은 요서지역에 고구려가 만든 경관(景觀)을 파괴하였다. 이 경관은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전사한 수군(隋軍)의 시체를 모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써 고구려에게는 일종의 전승기념탑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시점에 경관을 파괴하는 당의 조처는 명백히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고 도발이었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대륙 정세의 추이와 당의 정책을 더 예의 주시하였다.

 

이어 당은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나아가 640년에는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있는 고창국(高昌國)을 병탄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제 사실상 당의 서부와 북부 방면에 있던 주요 나라들을 대부분 병탄한 셈이 되었다. 당의 다음 예봉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세민은 다음해 641년 5월고구려에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였다. 직방낭중은 병부 소속으로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고구려에 입경한 뒤, 산천 지리와 군사시설 주민동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가 보고하였다. 그 때 당태종은 곧 고구려에 대한 정벌전을 감행하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개진하였다. 한편 진대덕이 평양성을 방문하였을 무렵 고창국 멸망 소식을 접한 고구려의 상하는 크게 당황하였다. 다가올 국가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귀족들 간의 내홍을 촉발하였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연개소문의 거취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앞서 연개소문이 그의 부친의 직임인 동부대인(東部大人)주 17) 직을 계승하려 했는데, 강대한 연개소문 집안의 세력과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다른 귀족들이 거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무리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계승할 수 있었다. 그 뒤 그의 세력이 강화되어가자 위협을 느낀 왕과 다른 귀족들이 모의를 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를 천리장성 감역(監役)으로 임명하여 일단 중앙정계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자신을 향한 압박이 가중되어지자, 642년 10월연개소문은 사열을 한다면서 귀족들을 초치한 뒤 부병(部兵)을 동원해 귀족들을 대거 살육한 뒤, 궁성을 침범하여 영류왕(營留王)을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하였다. 그는 막리지(莫離支)주 18)로서 대모달(大模達)주 19)에 취임하여 군권을 쥐었으며, 대대로와 귀족회의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중리제(中裏制)를 시행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중리제는 조정의 공식적인 관서조직(外朝)과는 별도로 궁중에 설치하여 내조(內朝)라 할 수 있는 왕 직속 행정조직이라고 여겨진다.

 

중앙에서의 정변에 성공하였지만, 지방 각지에 있는 그의 반대세력에 대한 토벌이 필요하였다. 유명한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승리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양자는 타협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연개소문은 그를 안시성주로 인정하고, 그는 연개소문이 새로운 집권자임을 승복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3.3.2.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평양성 회담

그 무렵 남으로부터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평양성을 찾아왔다. 642년 8월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그 성주가 죽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어, 신라의 낙동강 서편 지배권이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평양성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그를 환대하였고, 모처럼 양국의 정치 실세들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김춘추는 고구려가 상쟁을 중지하고 화평관계를 맺으며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한강 유역을 신라가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응수하였다. 김춘추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모처럼의 담판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와 협력하여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립된 신라가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당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제 당이 개입함에 따라, 더 이상 신라와 고구려 간에 타협이 진전될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의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는 고구려로 하여금 남북에서 적을 맞이하게 하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안위에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유혈 정변을 거처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강경책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3.4. 고구려와 당의 전쟁

3.4.1. 645년의 전쟁

고구려의 정변과 뒤이은 신라의 당에 대한 구원 요청은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노리던 당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은 수차례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고구려가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거쳐 명분을 쌓은 뒤, 마침내 644년 7월고구려 원정을 선포하고 물자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대략 20여 만에 달하는 당군(唐軍)은 수륙 양면으로 침공을 기도하였다.

 

수군(水軍)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 남단을 공격하는 길을 취하였고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평야로 나아가는 길을 취하였다. 당의 선봉장인 이적(李勣)은 평탄한 북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지금의 푸순 고이산성(高爾山城)인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이곳에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그 남쪽의 개모성(蓋牟城)을 공략하고 이어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다.

 

한편 당태종이세민의 본군은 중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바로 요동성으로 밀려들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백암성(白巖城)도 공략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시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요동벌에서 평양으로 나아갈 때 취하는 평탄한 대로의 길목에 안시성이 위치하고 있는 만큼, 이 성의 함락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 중앙군 15만이 안시성으로 접근해왔다. 안시성 교외에서 벌어진 양군의 회전에서 당군의 기동력과 포위전술에 휘말려 고구려군은 사령관 이하 3만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대패를 당하였다. 당군은 승세를 몰아 안시성 공략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완강한 안시성민들의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방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음력 9월에 접어들면서 요동 평원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재차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며 당군의 보급선을 위협하였다.

 

한편 그간 연개소문이 정성을 쏟았던 설연타(薛延陀)에 대한 공작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즉 연개소문은 몽골 고원의 터키계 유목종족인 설연타에게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면서, 당시 당군의 주력이 요동으로 나가있는 동안 방어력이 약화된 당의 관중(關中) 지역을 기습 공략할 것을 종용하여 왔다. 설연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안시성 함락을 기약할 수 없으며, 추위와 보급품 부족이 닥쳐오고 있는 상황에서 당군은 신속한 철수 외에 대안이 없었다. 철수는 막대한 피해를 동반하였다.

 

한편 요동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이 해 5월에 전쟁의 불꽃이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신라군 3만이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였다. 신라는 644년당으로부터 ‘참전하여 조병(助兵)하라’는 요구를 받아왔다. 그러나 신라 조정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고, 645년 2월에도 출병 독촉을 받았다.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선덕여왕(善德女王)으로서는 참전 여부와 그 결과가 경우에 따라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선덕여왕은 참전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신라군이 북진하자 백제군이 그 공백을 노려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백제 역시 당으로부터 조병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행동으로서 백제의 선택을 분명히 하였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5월에 전쟁의 불꽃은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 옮겨 붙었다. 나아가 6월에는 왜국에서 정변(大化改新)이 일어나 일본열도에 까지 그 파장이 뻗쳐 나갔다.

 

 

3.4.2. 고구려·백제·왜의 연대 형성

철수한 뒤에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침공을 통해 그는 고구려를 일거에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새로운 방안을 안출하였다. 그 하나는 장기소모전이다. 즉 소규모 단위의 병력을 고구려 변경 지역이나 해안지대에 투입하여 치고 빠지는 것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인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지치게 될 것이며, 그런 뒤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 남부 국경지대에 강력한 제2전선을 구축하여, 그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원정군의 최대 약점인 군수품 조달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한다는 방안이다. 그럴 때 새삼 주목되는 것이 신라와 신라군의 가치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이어 647년 왜국으로 건너가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648년당으로 건너가 이세민과 논의하여 양국 간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신라 조정은 당의 연호와 관복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였다. 신라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국은 끝내 당-신라 축에 가담치 않았으며 기존의 백제-고구려 축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런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상태는 660년 백제 멸망전을 거치면서 종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3.5. 고구려의 멸망

오랜 당과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크게 피폐해졌다. 당의 군사적 압박을 견제할 목적으로 북아시아 초원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방안은 계속 추구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시 외곽에 있는 아프라시앞 언덕의 궁전 유지(遺址)의 벽화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은 그러한 절박한 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성과는 여의치 않았다. 특히 660년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더 악화되었다. 이어 661년 당군이 침공해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어 겨울철이 되자 당군은 고구려군에게 격파되고 역으로 고구려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식량마저 떨어져가고, 본국과의 보급선이 차단된 위기상황에 몰렸다. 그때 남으로부터 신라군이 진격해와 군수품을 보급해주니, 그것을 먹으며 점진적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새삼 신라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침공군이 동계 작전도 벌릴 수 있게 되어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크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악화되니 연개소문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일찍부터 각급 단위 기관이나 부대의 지휘관직을 역임케 하였다. 장남인 남생(男生)은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을 거쳐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고 이듬해 장군이 되었으며, 28세에 막리지(태대형)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이 되었으며, 연개소문 사망 직후인 665년 32세로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어 군국(軍國)을 총괄하였다. 차남인 남산(男産)도 비슷한 과정을 걸었다. 삼남인 남건(男建)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런 승진의 길을 세 아들에게 열어준 것은 이들이 군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남생이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된 해가 바로 백제 멸망 이듬해였다. 이 해에 남생이 삼군대장군으로서 당의 침공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하여, 군권을 실제적으로 장악케 하였다. 그러면서 연개소문은 남산과 남건에게도 군권을 이관하여, 세 아들 모두가 군국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세 아들이 군권을 나누어 장악하고 서로 협력하여 국정을 이끈다면 연씨 집안의 권력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연개소문 사후 남생이 655년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동생인 남산·남건과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성에서 반기를 들고 당에 투항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당은 666년 9월 군대를 보내어 남생을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고구려 서북부 깊숙이 당의 세력이 뻗쳐 들어온 형세가 되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천혜의 요새로서 외부에서 공략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조금 전까지 고구려 최고 권력자이던 남생이 반란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보니 진압이 어려웠다. 남생은 667년당에 입조하였다. 이후 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당에 알렸고,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남생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가 지속되자 남녘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이탈하였다. 그는 666년 12월 자신의 관할구역인 함경남도 남부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내분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조처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20여년에 걸친 연개소문의 집권과 무관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이 세습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행사는 불가피하였다. 자연히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권력 장치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집중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갈등을 조정한다든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권력의 혼돈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데에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최고 집권층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과 배신, 투항은 고구려인들의 저항력을 마비시켰으며, 오랜 동안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사회에 패배주의를 만연케 하였다. 한편 667년 2월이적이 이끈 대규모 당의 침공군이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신성은 오랜 저항 끝에 그해 9월에 내부 투항자들의 항복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군은 요동성 방면을 거쳐 압록강 하구로 진격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 이동 고구려 영역 내에 두텁고 깊게 당의 점령지가 마련되어졌다. 이어 이듬해 봄에는 북으로 북부여성 일대가 당군에 의해 공략되어졌다.

 

당군은 이제 평양성을 향한 총진군에 나섰다. 이런 당군의 진격에 보조를 맞추어 신라군이 남에서 북진하였고, 평양 남쪽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투항하였다. 이제 평양성을 향해 나아가는 남북 양 방면의 진격로에 방어벽이 없어졌다. 드디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평양성이 포위되었다. 이어 9월 21일평양성 방어를 총괄하던 장수가 투항함에 따라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3.6. 고구려부흥운동과 유민의 향방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2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런 뒤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국을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으로서 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한 자를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인(唐人)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도록 조처하고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케 하였다. 새로이 행정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들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키고 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 2만 8천여 호를 당의 내지에 대거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뒤흔들었고, 고구려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유민의 반발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당의 지배에 대한 무력 저항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의 지배 망에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검모잠(劍牟岑)의 봉기가 그 한 예이다. 요동지역에서도 안시성을 위시한 봉기가 있었고, 부여성 일대에서도 봉기가 잇따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부흥운동군이 상호 연대하는 조직성의 부족과 우세한 당군의 무력에 밀려 673년 무렵까지는 진압되었다. 한번 국가가 붕괴되면 그것을 대체할 조직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정복자가 자행한 억압과 약탈에 따른 고통스런 현실은 고구려인의 저항을 촉발하였으나, 70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력(民力)과 최고 지배층의 배신적 행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국가나 그에 준한 조직체에 대한 믿음과 상호 신뢰감을 회복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을 요하였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내일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구성원 개개인의 가슴 깊이 심어주는 데에는 장기간의 헌신과 승리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적군은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한편 반당(反唐) 저항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그들의 이주는 소규모 단위로 이루어졌고 상당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들의 향방은 몇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라로 합류한 이들이다. 이에는 그들의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함께 귀속케 된 이들이 있고, 668년 전후 이래로 일련의 격동에서 연정토 일파나 안승(安勝)의 무리와 같이 집단적으로 신라로 내투한 이들이 있었다. 전쟁 포로로 잡혀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였던 이들 중 상당수는 당군에 밀리자 신라로 넘어와 신라군에 합류하였다.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된 676년 이후에도 당의 지배에 저항하던 고구려 유민이 산발적으로 소규모 단위로 신라로 넘어왔다. 668년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서 신라에 합류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둘째, 발해(渤海)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이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원주지인 동부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大祚榮) 집단같이 요서지역으로 옮겨져 거주하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이들이 있었다.

 

셋째,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험한 바다를 건너간 보트피플 같은 난민이었던 이들은 일본열도 여러 곳에 정착하여 생을 이어갔다. 관동지역의 가나가와현에 있는 고려절터(高麗寺址)는 이 지역에 정착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일본조정으로부터 고려왕(高麗王)이라 성[姓: 카바네(かばね)]을 받았던 약광(若光)의 일족이 정착하였던 지역이다.

 

넷째,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된 집단이다. 이들은 크게 관내도(關內道)·농우도(隴右道) 등에 옮겨진 이들과 회하(淮河) 유역 등 강·회(江·淮)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전자를 보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부와 감숙성(甘肅省) 방면에 정착케 되었다. 이 지역은 티베트의 토번(吐蕃)과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는 긴 회랑지대이자 농경과 목축이 함께 행해지던 곳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지이다. 당은 고구려인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일종의 지역 자위를 위한 지방병인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유명한 장군인 고선지(高仙芝)는 이 지역에 정착케 된 고구려인의 후예였다. 강·회 방면으로 옮겨진 이들은 회하 유역의 황무지에 정착하여 생활을 꾸려나갔다.

 

다섯째, 몽골고원 돌궐의 지배 하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이들은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그 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가한(黙啜可汗)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 칭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고구려인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여섯째, 요동 지역에 그대로 계속 머문 이들이다. 이들은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 이주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동부 만주나 몽골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가 안동도호부 관내에는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일곱째, 고구려에 근접한 영주(營州) 방면에 옮긴 이들이다. 당 내지로 끌려갔거나 돌궐로 갔다가 당으로 흘러들어간 이들의 운명은 여러 형태를 보였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봉해 677년당 내지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에 귀환시켜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보장왕은 요동에 귀환한 뒤 얼마 안 있어 옛 복속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다시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보장왕과 함께 귀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당에 끌려간 뒤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고선지왕모중(王毛仲), 백제 유민인 흑치상지(黑齒常之), 사타(택)충 등과 같이 크게 입신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출세는 당제국의 국제성과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한결 용이하였다. 그러나 외형상의 개방적 분위기에서도 당 사회 내면에 흐르는 한족의 배타성 때문에 멸시와 모멸이 심하였으며, 대개 역모 등의 혐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변경지대에 거주하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적으로 정착하였는데, 주위에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지닌 북방 종족들이 거주하였고 한족의 문화적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하였으므로, 비교적 후대까지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주 지역에 정착하였던 대조영 집단이 그러하였다. 계속 영주지역에 머물렀던 이정기(李正己) 집안의 경우,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두각을 나타내어, 산동 지역으로 옮겨 몇 대에 걸쳐 독자적인 군벌로 군림하였다.

 

이렇듯 일부 고구려유민들은 이런 저런 자취를 조금 남겼지만, 당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대다수인 일반민은 장졸들에게 전쟁포로로 주어져 노예로 처분되기도 하였고, 변경지대나 황무지에 집단 정착케 되어 어려움과 천대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자취 없이 동화되어갔다.

 

한편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던 말갈족 사회도 고구려 멸망 후 큰 변화가 있었다. 7세기 대의 말갈 7부 중 제일 서쪽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은 그 일부가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일부는 원주지에 있으면서 고구려 부흥운동과도 관계를 지니는 등 격렬한 진통을 겪었으며, 일부는 당군에 종군하는 등 다양한 양태를 나타내어 전체적으로 분산되어졌다. 당의 영주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속말말갈인들은 7세기 말 대조영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발해를 건국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백산말갈(白山靺鞨)은 일찍부터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전쟁 피해를 심하게 받아, 고구려 멸망 후 그 무리의 다수가 당으로 끌려갔다. 안거골부(安車骨部), 호실부(號室部), 백돌부(伯咄部) 등의 말갈 부족들은 고구려에 협력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던 만큼, 668년 이후 그간 말갈 사회에 개입하여 작용해왔던 고구려의 세력과 조직이 붕괴되자 말갈족의 기존 질서도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다른 말갈족 촌락들의 이탈과 저항을 받게 되어 “분산 미약”하게 되었다. 그 대신 철리부(鐵利部)·월희부(越喜部) 등과 같은 새로운 말갈 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었고, 고구려 영향권 바깥 지역에 있던 흑수부(黑水部)가 강성해졌다.

 

그러나 가장 강성하다는 흑수말갈도 대추장이 없이 열여섯 부락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른 말갈족도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소규모 단위로 계속 동부 만주지역으로 유입하여 각지에 분산 정착하였다.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흔이 회복되면서, 이들이 지닌 높은 생산력과 문화는 이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 결과에 따라 7세기 종반 이 지역은 국제적으로 힘의 공백상태가 되었고, 각지에 산재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촌락들이 각지에 산재하여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의 형성은 요서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였다.

 

 

3.7. 고구려사의 역사적 의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평양 땅에 외국의 통치기구가 설치된 것은 B.C. 108년고조선(古朝鮮)이 망하고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이 설치된 이후 776년 만이다. 낙랑군과 안동도호부는 동일하게 평양지역에 설치한 중국왕조의 통치기구였지만, 이 지배 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은 양자가 판이한 면을 보였다. 즉 한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육군 5만과 해군 8천이 동원되어 1년여의 공방전이 소요되었다. 평양 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은 그 뒤 400여년을 지속하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에 비해 668년 평양성 함락에는 수와 당 2개 왕조에 걸쳐 70년이 소요되었다. 통일중국왕조인 수는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당은 오랜 전쟁 끝에 신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어 설치된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고구려부흥운동군과 신라에 밀려 만주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낳게 된 것은 무엇보다 B.C. 108년과 A.D. 668년 사이에서 일어났던 변화에 기인한다. 즉 고조선사회와 중국의 전국시대 사회 간에는 현격한 문화적·물질적 격차를 보였다. 진·한제국이 성립한 뒤에도 그 격차는 여전하였다. 그 결과는 고조선의 멸망과 한군현의 설치로 나타났다. 서기전 108년 이후 예·맥·한족의 여러 집단들은 한편으로 한군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군현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기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사회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선두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백제·가야 등에 전해져 그들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삼국시대의 후반에 들어서, “문자와 무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상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한국고대사회는 중국고대사회와 별다른 큰 격차 없이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70여 년에 걸친 수·당제국과의 항쟁, 이은 나당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이다.

 

서기 전후 무렵부터 668년에 이르는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점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큰 영역국가로 성장하였고, 그 영역 내의 예(濊)·맥(貊)·한(韓)계의 여러 집단들과 일부 한인(漢人)과 말갈인들을 융합하여 고구려인이라는 보다 큰 단위의 족속을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갈래 문화를 수렴하고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신라·백제·가야와 바다건너 왜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고구려 문화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곧 고구려는 고대 중국사회와 고대 한국사회 간의 발전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독자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으며, 고구려인은 한국인의 형성에 한 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