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5] 고구려의 문화

자연정화 2018. 7. 11. 12:51

[5] 고구려의 문화

 

1. 고구려의 문학과 예술

 

1.1. 고구려의 한문학

고구려에서 이른 시기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2세기 중반 고구려의 관인으로 주부(主簿)가 보이는데, 주부는 원래 현(縣)의 속리(屬吏)의 직명이었다. 현토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이 속리의 명칭을 습용하여 고구려왕 휘하의 실무행정을 주관하는 관인의 직명으로 삼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각 시기 문서행정의 보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국가의 성장에 따라 점차 그 보급이 확대되었을 것이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웠는데, 이는 문서 행정의 보급을 전제로 한 조처였다. 그런 만큼 한자와 한문 보급이 상당히 진전되어진 상태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율령의 반포와 지방제도의 확충에 따라 한문은 관리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불교의 공인과 함께 한역(漢譯) 불경(佛經)의 보급 또한 한문 보급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문 사용이 널리 행해지면 질수록, 구어와 문어 사이의 불일치에 따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한자의 음과 훈(訓)주 20)을 빌어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차자표기법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지명·인명·관명 등의 표기에 쓰였다. 이어 이두(吏讀)와 같은 표기법이 고구려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더 진전된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편으로 한문학(漢文學)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한문학 작품으로는 한시(漢詩)와 비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시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원용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는 남녀간의 애틋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고구려의 비문으로서는 광개토왕능비(廣開土王陵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있고, 묘지(墓誌)로서 중급 귀족인 모두루(牟頭婁)의 묘지 등이 전해진다. 장중한 예서체(隸書體)의 광개토왕능비는 이 시기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광개토왕의 훈적을 간결하게 압축해서 표현한 부분은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은 역사서이다. 고구려에서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의 사서가 편찬되었으나, 그 실체가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 내용은 몇 차례의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윤색되어져, 그 일부가 중세사서인 현전하는『삼국사기』에 반영되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1.2.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의 고분은 그 나름으로 종합예술의 결정체였다. 특히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그러하다. 적석총의 경우, 소박한 무기단 적석총에서 장군총(將軍塚)과 같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시기의 축조양식을 보여준다. 적석총에 이어 고분의 주된 양식이 된 것은 석실봉토분이다. 석실봉토분 중에는 무덤 안길과 무덤방의 사방 벽과 천정에 벽화를 그렸던 것들이 있다. 대부분 평양과 집안 일대 지역에 밀집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숫자는 90여 기(基)에 달한다. 고분벽화는 그 소재에 따라 생활풍속도, 장식문양도, 사신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강서대묘 사신도 중 현무

 

강서대묘 청룡도 - 강서대묘 널방의 네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동벽에 그려진 청룡의 모습이다. 음양오행사상에서 청룡은 동쪽 방위를 맡은 신으로 백호, 주작, 현무와 더불어 사신으로 불린다.

 

초기 고분벽화의 주된 화제(畵題)는 생활풍속도였다. 이어 장식문양도, 사신도 순으로 주된 화제가 변천해갔다. 생활풍속도에서는 묘주의 가정생활 모습, 그의 막료·하인 등의 인물도, 외출 때의 행렬도, 사냥하는 모습, 전투도, 묘주 인물상, 성곽도, 가옥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 생활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들 초기 고분벽화는 막돌을 쌓아올린 무덤 벽면에 두텁게 회를 바른 뒤 회가 채 마르기 전에 그려졌다. 안악3호분, 춤무덤, 씨름무덤 등이 대표적인 초기 벽화고분이다.

 

후기에는 묘실 벽면의 고르게 다듬은 판석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식이 유행이었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강서대묘 등은 웅혼한 화필과 빼어난 색감의 벽화로 유명하다. 이들 고분벽화를 통해 볼 때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닌 활력이 여전하였다. 곧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이미 기력이 쇠잔해져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니라, 목 잘린 해바리기처럼 외부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분을 크게 축조하는 것은 내세를 현세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지는 세계로 보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에 따라 죽은 자가 내세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물자와 사람 등을 넣고 시체를 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불교나 도교 등이 퍼지면서 이런 계세적 내세관을 떨치고, 내세는 현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불교적인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나 도교사상에 따른 승선적(昇仙的) 내세관이 퍼져나갔고, 그런 면은 벽화 내용에도 반영되어 연화전생도(蓮花轉生圖)나 승선도(昇仙圖) 등이 그려졌다. 사신도는 중국에서 한대 이래로 유행하던 바로서, 도가적(道家的) 세계관의 영향을 나타낸다.

 

1.3. 고구려의 음악과 춤, 놀이문화

고분벽화에는 음악·춤·교예 등에 관한 내용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고려악, 백희).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의 무덤 안길에 꼬는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그드인 무용수가 그려져 있고, 장천 1호분 현실 북벽 상단에 채찍을 든 사람이 가면을 쓴 사람을 따라가는 소그드 대면극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각저총, 무용총, 안악3호분 등 비교적 이른 시기의 생활풍속도 벽화에서 씨름과 수박(手搏)이 주요 부분을 차치하고, 이어 장천1호분, 수산리, 약수리, 팔청리 벽화 등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것들에선 다양한 재주와 곡예를 주 내용으로 하는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가 그려져 있다.

 

씨름과 수박이 주요 구성요소였던 잡희(雜戱)에, 서역(西域)주 21)으로부터 전해진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더욱 다양해져 이를 통칭해 백희라고 불렀다. 교예를 하는 서역인들이 실제 고구려에 왕래하였던 것 같고, 서역의 음악과 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고구려의 백희가 신라에 영향을 주고 고려로 이어졌던 것 같다.

 

2. 고구려의 건축성

고구려인들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축조물은 성곽(城郭)이다. 성은 평지성(平地城)·산성(山城)·평산성(平山城) 등으로 나눠지는데, 고구려 성의 대부분이 산성으로서, 산의 능선을 활용해 성벽을 쌓았다. 고구려 산성의 다수가 고로봉식(栲栳峰式) 또는 포곡식(包谷式)이라 불리는 형태를 지녔다. 즉 뒤에 높은 주봉우리를 배경으로 해서 계곡을 끼고 좌우 능선을 따라 내려와 평지에 닺게 하는 성벽을 축조하여, 성내에 일정한 공간과 수원(水源)을 확보하는 형태이다. 모양이 안락의자처럼 보인다.

 

성벽 축조 재료에 따라 석성(石城), 토성(土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성은 둘레가 1∼2백 미터에 불과한 보루성(堡壘城)에서부터 10㎞가 넘는 대형 산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대형 산성들은 적지 않은 경우 지방 행정단위의 치소(治所)였던 것 같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으며, 치(雉)와 옹성(甕城)이 있는 예도 있다. 평지성인 요동성의 경우, 요동성총(遼東城塚) 벽화에 그 평면도가 전해져, 전모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평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형태로서 전자의 편이성과 후자의 방어에 용이함을 결합한 독특한 면모를 지녔다. 평양성(장안성)의 경우가 그 전형이다. 장안성은 그 내부가 북성(北城)·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성과 외성에는 정연한 구획이 지워져 계획도시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3. 고구려의 민속

고구려의 민속으로서 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솔서혼(率壻婚)적인 혼속(婚俗)과 희생물로 돼지를 쓰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돼지를 인간계와 영계(靈界)를 이어주는 신성 동물로 여겨, 이를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서 희생물로 썼다. 이런 민속은 오늘날에도 무속 제사와 각종 공사 관련 제사 등에 돼지머리를 제상에 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 전반까지도 간간히 행해지던 솔서혼은 결혼 후 사위를 데리고 사는 혼속이다. 이 혼속은『삼국지』동이전에서 전하는 고구려 혼속인 서옥제(婿屋制)와 연결된다. 즉 결혼식 후 신부 댁에서는 새로이 작은 집[婿屋]을 지어놓고, 사위가 저녁이 되어 신부 부모에게 서옥에 들어가 잘 수 있게 허락해줄 것을 청하기를 몇 차례 하면 이를 허락하였다.

 

사위는 처가살이를 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 어느 정도 자라면 처와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갔다. 즉 처를 맞이하는 댓가로, 다른 말로 하면 처가의 노동력 손실을 보상하는 의미로, 처가에 수년간 노동 봉사를 하는 혼속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아이와 외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이 함을 도모한다는 기능도 있다. 이 서옥제 혼속은 이후 시기 가난한 사람의 혼속으로 행해졌던 솔서혼, 즉 처가살이 혼인 양식과 연결되는 바이다.

 

4. 고구려의 종교

4.1. 고구려의 불교

불교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다분히 기복(祈福)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391년 고국양왕의 하교(下敎)에서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음은 그런 면을 잘 말해준다. 이런 측면은 당시 가람(伽藍) 배치도를 통해서도 확인되어진다. 498년에 세워진 평양의 청암동 절터를 보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이 있고 탑과 금당의 평면적 비율이 0.7 : 1이다. 탑의 평면적 비율이 후대에 비해 매우 높고, 사원 구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런 가람 배치와 탑의 비중은 석가모니의 사리나 그와 연관된 물건을 봉안하는 곳으로 여겨진 탑이 당시인의 주요한 신앙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 당시의 신앙이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과 해탈을 위한 자신의 수행보다는, 사리의 영험에 의거하려는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면이 강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불교의 특성 중 하나는 왕실 불교 내지는 국가불교적인 면이다. ‘왕이 곧 부처’임을 표방하는 북방불교가 전해졌고, 왕실은 이의 홍포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승려들은 왕권의 존엄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함양에 적극 복무하였다. 사찰에서는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전사한 이들의 영혼이 왕생극락(往生極樂)하기를 기원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와 같은 법회들을 국가적 행사로 개최하였다.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이 동일시되었다. 이런 면들은 백제나 신라도 동일하였다.

 

불교 수용 이후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점차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이며, 독자적인 존재성(存在性)주 22)이 없다고 보아, 만유(萬有)의 실상은 공(空: sunya-ta)이라고 주장한 삼론학(三論學)이 널리 퍼져나갔다. 삼론학에 조예가 깊은 승려 혜관(慧灌)은 625년왜국에 파견되어 삼론학을 홍포하여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가 되었다. 승려 혜자(慧慈)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삼론학을 널리 펴 일본 삼론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말기에는 일체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한 『열반경(涅槃經)』이 전해졌다. 승려 보덕(普德)이 이 경전에 밝았다. 그는 7세기 중반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는데 반발하여 백제로 이거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통일기 신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확산과 함께 점차 불교적 윤리관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내세관의 변화와도 결합되었다. 불교 수용 후 종전의 지배적 내세관이었던 계세적 내세관이 점차 바뀌어졌다. 내세는 현세의 삶이 무대를 바꾸어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죽은 자는 현세에서 저지른 자신의 업(業)과 쌓은 공덕(功德)에 따라, 즉 현세에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윤리관에 의한 평가에 의해 내세의 삶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 퍼져나갔다. 자연 계율에 맞게 생활하려 하고, 그에 따라 불교적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일반인의 생활 속에 널리 자리 잡아 나가게 되었다.

 

4.2. 고구려의 도교

중국의 잡다한 민간신앙을 신선술(神仙術)을 중심으로 체계화한 것이 도교이다. 그에 비해 도가사상은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도교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숭앙하고 도가사상을 교리정비에 많이 이용하였으나,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북위 때 정비된 종교 형태의 도교는 삼국 말기에 이 땅에 전해졌다. 한국 고대의 민간신앙에는 도교의 내용에 비길 수 있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도교는 별다른 큰 마찰 없이 수용되었고, 한국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이해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에 여러 가지 모습의 신선이 등장함을 보아 이 무렵에는 도교가 상당히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의 모산파(茅山派) 도교의 중심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신농본초(神農本草)』에서 고구려의 유명한 약재로서 인삼과 함께 금가루를 정제한 일종의 연단(煉丹)을 진약(珍藥)으로 소개하였다. 이는 연단의 복용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 신앙이 고구려에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때의 도교는 교리체계와 조직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 때에 불교 사찰을 뺏어 도관(道觀)으로 삼고, 도사(道士)를 우대하는 도교진흥책을 취함에 따라 교단 조직을 갖춘 도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교의 반발 등으로 도교가 그렇게 널리 퍼져나갔던 것 같지 않다.

 

한편 4세기 이래 노장(老莊)의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도 진전되었다. 불교의 교의를 도가사상의 개념에 의거해 풀이하기도 한 격의(格義)불교도 도가사상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튼 도가사상은 당시 귀족층의 생활과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을지문덕의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도사사상에 대한 이해는 불교·유교에 대한 그것과 함께 고구려 후기 당시 최고 지식인들의 교양을 가름하는 주요한 한 부분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사 연구 현황과 전망

 

고구려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그 단초가 열렸다. 한백겸(韓百謙)·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 주로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들이 논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학풍이 미처 만개하기도 전에, 국권 상실과 함께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 학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의 랑케사학을 이어받은 일본 근대사학은 이른바 고등문헌비판에 의거해 관계 사료를 검토하여 모순되거나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논증되는 사실들만을 취하여 고구려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자연 연구의 주된 부분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토에 모아졌다. 그 결과로 제시된 것이 산상왕 이전의 기사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별하여, 고구려는 3세기 이후에 들어 비로소 믿을 수 있는 역사의 시대로 들어선다고 보았다. 그 이전의 왕계를 위시한『삼국사기』기사는 후대인의 작위에 의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초기 고대사 관련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은 근본적으로 고대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것인데, 일인학자들의 과도한 의고주의(疑古主義)적 자세와 고대사회와 고대 사료의 성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사료비판이 사료 말살로 치달아, 초기 고구려사를 허구로 돌리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특히 그런 작업은 유사 이래로 왜소하고 허약한 나라라는 한국의 역사상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식민지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어지는 잘못을 낳게 하였다.

 

해방 후 뒤이은 분단과 전쟁에 따른 대립으로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현장을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고구려사연구는 상당 기간 큰 진전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1960년대에 들어 북한학계에서 광개토왕능비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제기되어 논란이 이어졌다. 고구려사의 전개에 대한 북한학계 나름의 이해체계가 제시되어졌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고구려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수립하였고 그 사회의 성격을 중세로 본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동명왕릉의 입구의 모습. 평양에서 가깝게 위치한 동명왕릉은 일대가 울창한 수림지대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남한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 고구려사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의 사료적 신빙성 검토에서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의 국가 구조와 정치운영 형태, 고분벽화의 검토, 대외관계, 천하관(天下觀), 영역확대와 지방제도의 정립과정 등의 주제로 그 연구 영역이 확산되어 나갔다.

 

1990년대에 들어 한중관계(韓中關係)의 정상화에 따라 만주지역 답사가 가능해졌고, 나아가 21세기에 들어 평양 방문이 가능해짐에 따라,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지역에 대한 접근과 북한 및 중국학계와의 직·간접 교류는 연구를 촉진시켰다. 아울러 새로운 연구 인력의 확충과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대한 이해의 축적은 연구역량을 크게 강화하였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연구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중국의 국가적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따른 일련의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고구려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체계를 변개시키려는 것이었다. 고구려사의 성격을 중국사에 귀속되는 중국의 한 지방사(地方史)로 규정하고, 그에 입각해 고구려사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중국고구려사론(中國高句麗史論)’이라 할 수 있는 이 시각은 20세기 초부터 제기된 바 있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민족이론인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에 뿌리를 둔 것이다. 즉 현재 중국 영토 내에 포괄되어 있는 55개 소수민족들은 유사 이래로 중앙의 한족(漢族)과 긴밀한 교류를 하여 왔으며, 언젠가는 한족과 완전 융합하여 하나의 중화민족을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 중국 영내의 소수민족들은 과거에도 한족과 교류 융합하여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는 한족에 완전 융합 동화될 것이다는 주장이다. 자연 이에 따라 “중국 영내의 모든 지역의 주민들은 중국인이며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중국 영역 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기되었던 것이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다. 즉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고구려사의 귀속을 규정하려하니,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중국사이고 그 이후로는 한국사가 되어, 하나의 역사가 중국사도 되고 한국사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427년을 경계로 고구려사의 성격과 그 귀속을 달리 규정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의식하여 중국학계에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즉 현재의 국경이 기준이 아니라 역사상 중국왕조가 가장 멀리 팽창하였던 시기의 경계를 기준으로 한 ‘역사영역론(歷史領域論)’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 제국의 영역의 남쪽 한계인 한강유역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강 이남 지역만이 한국사의 역사영역이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고구려사의 의의는 중국의 역사영역을 한족(韓族)의 나라들의 침탈로 부터 지켰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일사양용론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팽창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 입장에 서서 중국학계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공식적인 논지를 여러 주제들을 통해 개진하였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은 실재하였으며, 위만조선은 중국인들에 의한 정복국가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군현(漢郡縣)이 설치되었고, 그 하나인 현토군에서 고구려가 발흥하였으며,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종족인 고이족(高夷族)이 세운 나라이며, 예맥족(濊貊族)은 중국의 고(古)민족이었다고 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영역에서 중국의 고대 종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고, 건국 이후 계속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중원의 왕조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왔던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의 다수가 중국의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건의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그릇된 주장에 불과하며, 그리고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10세기 이후의 중국사서의 기술은 착오였다고 풀이하였다.

 

이런 중국학계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와 비판이 행해졌다. 기자조선은 허구적인 전설에 의거한 것이며, 위만조선은 중국계 유이민과 고조선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는데 이를 중국계 주민에 의한 정복왕조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며, 고조선 지역의 주민은 종족적으로는 예족이었고 일찍부터 농경과 청동기 문화를 영위해왔던 만큼 고조선 지역의 문명의 여명이 마치 한(漢)족의 이주와 정복에 의해 열린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그리고 고구려인의 기원을 고이족으로 보는 견해는 근거가 없는 설이다.

 

즉『일주서(逸周書)』의 왕회(王會)편에서 성주지회(成周之會)에 참가한 종족 중 고이가 보이는데, 이 고이를 고구려라고 한 언급은 성주지회가 있었다고 하는 시기로부터 무려 천 육백여 년 뒤인 4세기 초 사람 공조(孔晁)의 주(注)가 유일한 것이며, 고이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이주하여 혼강 유역에 정착케 되었다는 이동경로에 대한 주장도 전혀 문헌적·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중국왕조와 고구려 간의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의례 상의 상하관계를 설정하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를 고구려가 중국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에 부합치 않는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것은 한반도 중부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고구려계승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고구려유민과 발해유민의 다수가 중국 내지로 끌려가 한족에 흡수 동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유민들은 한족들에 비해 절대 소수이며, 동화된 뒤에 이들이 고구려계승의식이나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한족 사이에 전혀 남기지 못하였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족들 사이에 고구려 계승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중국고구려사론은 정치적 주장 이상의 객관적 근거를 지닌 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중국학계에선 이런 주장이 견지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은 한국의 연구역량의 확충과 객관적 연구의 심화이다. 현지 조사와 발굴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일방적인 중국학계의 보고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구려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어지는 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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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역고(疆域考)

해동역사(海東繹史)

동사(東史)

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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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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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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