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발해의 강역

자연정화 2018. 7. 19. 08:52

발해의 강역

 

727년 발해가 일본에 수교를 청하면서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씌어 있다. 이 구절만 보면 발해가 처음부터 광대한 고구려 영토를 되찾은 것으로 보기 쉬우나 발해사를 상세히 검토하면 그렇지 않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발해의 영토를 '방 2천리'라 하였고, 또 일본의 승려로서 당나라에 유학하여 견문을 적어 남긴 영충(永忠)도 발해를 '광무 2천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강역이 크게 확장되는 제3대 문왕시대까지는 그들의 구국(舊國)인 돈화와 목단강 유역에서 두만강 하류일대까지, 그리고 서로는 휘발하와 혼하의 분수령까지의 소국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발해 전성기였던 제10대 왕인 대인수 시대 이후 ‘사방 5천리’에 달하는 ‘5경, 12부, 62주’의 영토로 넓어졌다. 전성기의 강역은 ≪신당서≫ 발해전에 대체적인 방향과 주의 이름 등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록에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아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성기의 강역은 대체로 만주의 동부 지역에 중심을 두면서 서쪽으로 압록강 하구에 이르는 만주 중부 지역, 남쪽으로 대동강과 용흥강(龍興江)을 잇는 선, 동쪽으로 연해주 남부 일대, 북쪽으로 송화강(松花江)까지 포괄하였다.

 

 

(1) 남쪽 국경선

≪신당서≫ 지리지에 실려있는 가탐의 ≪도리기≫에 압록강의 하구에서 약 130리의 상류에 있는 박삭성은 발해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다. 이 ≪도리기≫는 801년에 찬술한 것이기에 이 발해와의 경계선은 제5대 강왕시대의 상태이다. 이 박삭성은 지금의 구련성(九連城) 동북 약 20리에 있는, 압록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대포석하(大蒲石河)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이 박삭구를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혼하의 상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청천강 상류의 이남지방이 명의상에 지나지 않지만 당나라의 영토에 속하고 있었다.

 

즉 당은 736년에 정식으로 청천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양도함으로써 관념상으로는 청천강 이북까지 당나라의 영토로 확장된 것이 된다. 그러나 요동까지도 주권이 철저하지 못하였던 당나라의 통치력으로 미루어보아 박삭성까지 확보될 리가 없으며, 동북에서는 발해국, 남쪽으로부터는 신라의 세력이 북상하여 이 지방에 있어서는 발해와 당나라는 직접 경계를 접하는 일이 없었으며 압록강과 청천강을 갈라놓은 산맥이 이 양국의 경계선이 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발해국의 동은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함경남도 덕원 근처의 용흥강(龍興江)으로 믿어지는 이하(泥河)가 신라와의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대문예 사건으로 당이 원병을 요청하자, 733년 신라가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제2대 무왕 시대에 양국이 국경을 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서쪽 국경선

≪도리기≫에는 영주에서 안동도호부가 있던 오늘날의 요양(遼陽)까지의 통로에 이어, 다시 발해의 상경용천부까지 가는 교통로가 설명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거쳐 휘발하 유역에 있던 발해의 장령부(長嶺府)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요양은 물론이거니와 고구려 때에 건립된 심양조차 발해 영토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가탐의 시대에는 오늘날의 심양 이남의 요하 유역은 당나라 영토였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요하 하류 평원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던 오늘날의 개원(開原)도 당나라 영토였을 것이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거란이 요동으로 진출할 무렵에 요양이 발해 땅이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그 이후에 요동반도까지 발해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신당서≫ 발해전에는 15부 가운데 하나인 오늘날의 농안(農安)에 있었던 부여부(扶餘府)를 들어 “부여는 거란으로 가는 길이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 지방이 발해 서쪽 변경의 요충지로서 거란과 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킬 때 먼저 공격해서 탈취한 것이 이 부여부였던 것도 그 까닭이다. 따라서 발해의 전성기에 서쪽 국경선은 대체로 요동반도를 거쳐 농안(農安)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3) 북쪽 국경선

건국 초에는 흑룡강(黑龍江) 유역에 거주하던 흑수말갈에까지 세력이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크게 영토를 개척한 제10대 선왕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지만 세력을 제압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발해의 북방경계선은 대체로 송화강 하류까지이며, 여기서 흑룡강 이남 지역을 거쳐 동해까지 국경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림 1.> 발해강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