➊ 상경 용천부 [上京 龍泉府]
1. 상경 용천부 [上京 龍泉府]
발해 행정구역인 5경 중 하나로 발해 멸망 전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755년 무렵부터 수도였다가 785년에 다시 동경용원부로 천도하였다. 794년에 다시 이곳으로 천도하여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지금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忽汗東) 일대이다. 속주로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3주가 있었다. 926년 요(遼)나라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의 옛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정하여 천복성(天福城)으로 고치기도 하였다. 그뒤 동단국의 수도가 랴오양[遼陽]으로 바뀌면서 폐허가 되고, 지금은 성터·왕궁터가 남아 있다.
성터는 무단강[牧丹江] 이북쪽과 서쪽을 에워싸고, 외성(外城:羅城)은 동서 4,650m, 남북 3,530m의 네모꼴로서 높이 4m의 토성으로 두르고, 중앙 북방에 다시 황성(皇城:內城)을 쌓았다. 또한 황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연(連)한 일직선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좌경(左京)·우경(右京)으로 갈리고, 이것을 다시 여러 조방(條坊)으로 나누었다. 황성 안에는 궁전터가 여섯이 남아 있고, 그 가운데 하나에는 오늘날의 온돌시설을 하였음이 발견되었다. 석사자(石獅子), 보상화무늬[寶相華文]의 장전(長塼), 유리·기와·석등(石燈) 등은 발해의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보여준다.
2. 상경 용천부 [上京 龍泉府] 3주
용주[龍州]
발해는 전국을 5경(京) 15부 62주(州)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용주는 62주의 하나이며,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수주(首州)였으므로 용주의 수현(首縣)인 영녕현(永寧縣)과 함께 수도의 중심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속현(屬縣)으로는 영녕현을 비롯하여 풍수(豊水) ·부라(扶羅) ·장평(長平) ·부리(富利) ·좌모(左某) ·숙신(肅愼) ·영평현(永平縣) 등 8개의 현이 있었다. - doopedia -
발해시대의 지방행정구역. ≪신당서≫ 발해전에 열거되어 있는 62주 중의 하나이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部)에 속하며, 또한 상경용천부의 수주(首州)이기도 하다. 따라서, 치소는 동경성(東京城) 안에 두어졌을 것이다.
영녕(永寧)·풍수(豐水)·부라(扶羅)·장평(長平)·부리(富利)·좌모(左慕)·숙신(肅愼)·영평(永平)의 8개 속현이 있었다. 이 중 영녕현은 수현(首縣)으로서 동경성 안에 있었을 것이며, 숙신현은 현재의 경박호(鏡泊湖), 즉 홀한해반(忽汗海畔)의 북호두(北湖頭) 부근에 두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 주의 특산물로는 명주가 유명하였다. - 민족문화대백과 -
호주[湖洲]
상경용천부의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 지방이었으며, 호주는 상경용천부의 속주였다. 호주란 당시의 흘한해, 후세의 징보호[鏡泊湖]와 관련되어 이름지어진 것이 명백하며, 이 명칭으로 보아 호주의 위치는 지금의 징보호 부근으로 추정된다. 속현(屬縣)에 관한 기록은 문헌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요사》 지리지에는 호주의 속현은 하나인데 이름은 장경현(長慶縣)이라고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장경현은 요(遼)나라가 새로 창설한 것인지 발해 이래의 것인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발해의 속현으로 본다. - doopedia -
용주 이북, 구국 이남지역 즉 당시의 忽汗海(홀한해:오늘의 경박호) 연안지대로 추정된다. 속현은 미상 - 해동성국 발해 -
발주 [渤州]
『신당서』발해전에 열거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속하며 그 위치는 호주(湖州)와의 배치상으로 보아 현재의 영안(寧安)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주 아래에 공진현(貢珍縣)이 있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
발해는 전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속하며, 《동국통감》에는 ‘발주는 숙신(肅愼)의 고지(故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기록에 숙신의 위치에 대해 여러 설(說)이 있으나, 지금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doopedia -
발주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삼도통고성설, 해랑하고성설, 남성자고성설등이 있다. 대체로 목단강시 부근의 남성자 옛 성터가 발주의 소재지라고 추단한다. 속현은 미상. - 해동성국 발해 -
➋ 중경 현덕부 [中京 顯德府]
시행일시 747∼751년 사이
발해국 제3대 문왕(文王)대흠무(大欽茂)가 747(문왕 11)∼751년 사이에 국초 이래 수도였던 돈화분지(敦化盆地)에서 이곳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해, 775년까지 발해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 북고성촌(北古城村) 남동쪽으로 보고 있다.
중경현덕부의 위치 비정은 정약용(丁若鏞)의 후르하(虎里河) 서북인 액돈산(額敦山)을 비롯해, 나단포러(那丹佛勤), 화전현(華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이 중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장한 길림성(吉林省)돈화(敦化)로 비정하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발굴해 발해의 도성 규모가 밝혀짐에 따라 중경현덕부의 돈화설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돈화분지의 여러 산성이나 소밀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 발해왕국의 수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1937년, 1943년, 1945년에 각각 발굴되었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은 발해의 중경현덕부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으며,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0년대 말 화룡현 서고성자 부근에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완전한 석각 묘지(墓誌)가 출토되어 이 서고성자가 발해의 중경현덕부였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었다. 또한 이 성의 평면구조가 발해 도성이었던 상경성(上京城)이나 팔련성(八連城)과 거의 같다는 점과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도 고고학적으로 이 성이 서경성(西京城)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서고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장방형이며 동서 길이가 600m, 남북 길이가 720m이다. 내성은 외성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길이는 310m, 동서는 190m이다. 내성에는 5개의 궁지(宮址)가 있고 3개의 궁지는 남북 중추선에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최근에는 사이토가 1942년 무렵 입수했던 항공사진이 확인됨으로써 서고성지 및 그 주변의 하남둔 고성(河南屯 古城)과 인근 고분군들의 당시 모습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경현덕부의 소속 주(州)로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주가 있었으며, 현주의 포(布), 노주의 도(稻), 그리고 철주의 속현(屬縣)인 위성의 철(鐵)은 발해의 기간산업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의의와 평가]
문왕이 발해의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로 천도한 것은 이 지역의 철을 비롯한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경현덕부는 무도평원과 연길의 조양천평원 모두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발전에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보완이 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입지와 위상 때문에 중경현덕부는 상경용천부와 더불어 발해의 중심 수도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신당서(新唐書)』
「발해 5경의 성격과 기능」(한규철, 『발해5경과 영역 변천』,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渤海)의 강역과 오경(五京)의 위치」(정영진, 『한국사론』34, 국사편찬위원회, 2002)
「만주의 발해·부여 유적 답사 보고」(송기호,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발해연구(渤海硏究)의 회고(回顧)와 국사(國史)」(이룡범, 『한국사상(韓國思想)』7, 1964)
「渤海貞孝公主墓發掘淸理簡報」(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社會科學戰線』1982年 第1期)
「唐代渤海貞惠公主墓志和貞孝公主墓志的比較硏究」(王承禮, 『社會科學戰線』1982年 第1期)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齋藤優, 『考古學雜誌』40-1, 1954)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洋學報』36-4, 1954)
「渤海中京考」(鳥山喜一, 『考古學雜誌』24-1, 1934)
「渤海考」(津田左右吉,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渤海國의 疆域」(松井等, 『滿洲歷史地理』1, 1913)
노주[盧州]
집필자 송기호
발해의 5경 15부 62주 가운데 하나이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며, ‘삼로군(杉盧郡)’이라고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 중국 길림성(吉林省)화전현(樺田縣) 경내로 보거나, 또는 길림성 연길현(延吉縣)용정(龍井)으로 보고 있다.
한편, 노주를 중경현덕부의 수주(首州)로 봄으로써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에 비정하기도 한다. 산양(山陽)·삼로(杉盧)·한양(漢陽)·백암(白巖)·상암(霜巖)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삼로현이 수현(首縣)이다.
이 곳의 특산물로 쌀이 유명했는데, 이는 해란강(海蘭江)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경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쌀이 수도(水稻)인지 한도(旱稻)인지에 대하여는 정설이 없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고대(古代)의 만주관계(滿洲關係)』(이용범, 춘추문고 20, 1976)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1955)
현주 [顯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였다. 한편,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천보(天寶, 742∼755)중에 이곳으로 도읍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다음의 두가지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첫째, 현주가 중경현덕부의 수주(首州)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는 노주(盧州)를 현주의 앞에 두었으나 가탐의 『도리기(道里記)』를 살펴보면 현주가 수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일부에서는 현주는 수주가 아니며, 따라서 그 위치도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로부터 약 7㎞ 서쪽에 있는 안도현(安圖縣) 대전자토성(大甸子土城)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현주를 수주로 인정하는 경우, 즉 중경현덕부가 발해의 첫 도읍지였던 ‘구국(舊國)’이었느냐의 여부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혜공주묘비(貞惠公主墓碑)의 발견을 계기로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오동성(敖東城)을 주장하는 설과 중경현덕부가 첫 도읍지였음을 주장하는 설이 대립되어 있다.
현주 아래에 금덕(金德)·상락(常樂)·영풍(永豊)·계산(雞山)·장녕(長寧)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금덕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삼베[麻布]가 유명한데, 발해시대에 배구(裵璆)를 후당(後唐)에 보내어 세포(細布)를 바치게 한 적이 있고, 또 세백포(細白布)로써 거란과 교역한 적도 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철주 [鐵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된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하며, 철주라는 명칭은 수현(首縣)인 위성현(位城縣)이 철의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위치에 대해서는 철의 산지라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대체로 두만강 하류의 오늘날 함경북도 무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현인 위성현을 비롯하여 하단(河端)·창산(蒼山)·용진(龍珍)의 4개 속현이 있었다.
위성현은 철리부(鐵利府)와 더불어 발해의 주요한 철의 생산지였으며, 실제로 돈화(敦化)·화룡(和龍)·영안(寧安)·동녕(東寧) 등의 발해유적지와 고분들에서 다량의 철기가 발견되고 있어 발해에 야철(冶鐵)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탕주 [湯州]
집필자 송기호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그 위치는 현재의 천보산록(天寶山麓)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속현(屬縣)으로는 영봉(靈峰)·상풍(常豊)·백석(白石)·균곡(均谷)·가리(嘉利)의 5개현이 있었으며, 영봉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영주 [榮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된 발해의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요사(遼史)』지리지에는 숭주(崇州)로 기록되어 있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길림성(吉林省)연길(延吉)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숭산(崇山)·위수(潙水)·녹성(綠城)의 3개 속현이 있었으며, 숭산현이 수현(首縣)이었음이 고증되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흥주 [興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속한다. 위치는 미상이다. 성길(盛吉)·산산(蒜山)·철산(鐵山)의 3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성길현이 수현(首縣)이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➌ 동경 용원부 [東京 龍原府]
1. 동경 용원부 [東京 龍原府]
- 민족문화대백과 -
발해 5경 중의 하나이다.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85년 무렵 이곳으로 천도한 이후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璵)가 다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는 794년까지 약 10년간 발해의 수도였다.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며, 속주(屬州)로는 경(慶)·염(塩)·목(穆)·하(賀)의 4주가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신당서≫에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기점으로 되어 있고, 또 상경용천부에서 동남쪽의 바다에 가까운 것으로 그 방향을 밝히고 있어, 지금의 간도 혼춘(琿春)설, 간도의 국자가(局子街)설, 함경북도 온성(穩城)·종성(鍾城)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설, 니콜리스크(Nikolisk)설 등이 있다.
이처럼 혼란을 보였던 동경용원부의 정확한 위치는 1942년에 이르러 혼춘현의 반라성(半拉城) 발굴 결과 그 유지의 규모가 상경용천부나 중경현덕부와 겨룰만하다는 것이 밝혀져 동경용원부를 혼춘에 비정하는 데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반라성의 출토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불병좌상(二佛幷座像)으로 알려진 유물이 고구려계통의 영향을 가장 뚜렷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doopedia -
발해 행정구역인 5경 중 하나. 785년~794년 동안 발해의 수도였다.
5경의 하나이며 785년(문왕 49) 무렵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다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는 794년(성왕 1)까지 10년간 발해의 수도였다. 그 중심지역은 1942년의 발굴조사 결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훈춘현[琿春縣]의 반라성[半拉城]으로 밝혀졌으며, 속주(屬州) ·속현(屬縣)까지 합친 전지역은 함경북도 ·헤이룽장성 및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의 각 일부지역이 포함된다. 속주와 속현으로는 경주(慶州)에 6개현,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에 각각 4개현 등 4주 18현이 있었다. 훈춘의 반라성과 속주인 염주의 터로 밝혀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는 발해의 독창적인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염주의 항구는 일본으로 가는 해로(海路)가 시작되는 기지로 추정되어 왔다.
2. 동경 용원부 [東京 龍原府] 4주
염주[鹽州]
용하군(龍河郡)이라고도 한다. 발해는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다. 염주는 62주의 하나이며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해 있었다. 속현(屬縣)으로는 해양현(海陽縣) ·접해현(接海縣) ·격천현(格川縣) ·용하현(龍河縣) 등 4개현이 있었으며 그 수현(首縣)은 용하현인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는 동경용원부가 있던 중국의 국경도시 훈춘[琿春]에서 동남쪽으로 40km 남짓 떨어진 크라스키노 성터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라스키노 근처에는 ‘염주’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야니치헤강(江)이 있어, 염주의 항구로부터 일본(日本)을 왕래한 해로(海路)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염주의 중심지로 지목되는 둘레 1,400m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는 1993년부터 조선일보 발해유물발굴조사단에 의해 발해 독창적인 유물이 발굴되었다.
- doopedia -
‘용하군(龍河郡)’이라고도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된 62주(州)중의 하나이다.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연해주 하산지방의 크라스키노 마을로부터 남동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크라스키노성지(城址)로 비정되고 있다.
이 곳은 야니치헤강 계곡의 우안(右岸)으로서 이 강의 하구로부터도 가까운 곳이고, 고대 문헌자료들에 의해서도 이 성지가 발해 염주의 중심유적지로 판단할 수 있으며, 또 이는 어느 정도 이곳의 지명과도 부합된다. 즉, 야니치헤강이라는 현대의 명칭은 발해의 염주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 염주의 항구로부터 일본도(日本道)가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요사(遼史)』지리지를 바탕으로 해양(海陽)ㆍ접해(接海)ㆍ격천(格川)ㆍ용하(龍河)의 4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염주의 별명이 용하군인 것으로 보아 용하현이 수현(首縣)으로 추정되나 제일 뒤쪽에 나열된 이유는 알 수 없다는 설도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 -
경주[慶州]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며, 또한 동경용원부의 수주(首州)이기도 하다. 치소(治所)는 동경용원부였던 반랍성(半拉城, 일명 八連城·八磊城·八壘城·古土城) 안에 두어졌을 것이다. 용원(龍原)·영안(永安)·오산(烏山)·벽곡(壁谷)·웅산(熊山)·백양(白楊)의 6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용원현이 수현(首縣)이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
목주[穆州]
일명 ‘회농군(會農郡)’이라 하였다. 『신당서』발해전에 열거되어 있는 62주 가운데 하나이다.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두만강 우안(右岸)이라는 설과 동경용원부의 북쪽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경계가 닿는 곳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회농·수기(水岐)·순화(順化)·미현(美縣) 등 4개 속현이 있었으며, 회농이 수현(首縣)이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
하주 [賀州]
일명 길리군(吉里郡)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한다. 위치에 대해서는 두만강 우안(右岸), 또는 함경북도의 바닷가로 추정하나 확실하지 않다. 홍하(洪賀)·송성(送誠)·길리·석산 (石山)의 4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하주의 별명이 길리군인 것으로 보아 길리현이 수현(首縣)인 듯하다. - 민족문화대백과 -
➍ 남경 남해부 [南京 南海府]
집필자 이용범
5경 중의 하나이나, 유일하게 한반도 안에 두었다. 경(京)에 들어 있으나 발해의 실제적인 수도가 된 일은 없다. ≪신당서 新唐書≫에는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적혀 있다. 속주는 옥주(沃州)·정주(睛州)·초주(椒州)의 3주가 있다.
남해부의 정확한 위치비정은 발해사에서 어려운 문제로 손꼽히고 있다. 남경남해부의 위치비정을 처음 시도한 정약용(丁若鏞)은 이를 함경남도 함흥으로 추단한 바 있다. 그 뒤 함경북도의 종성설(鐘城說)·경성설(鏡城說), 함경남도의 북청설(北靑說) 등이 거론되어 왔으나 아직 정설은 없고 함흥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지역의 특산품으로서 남해부의 곤포(昆布:다시마)와 시(豉:메주), 옥주(沃州)의 면(緜:누에에서 뽑아낸 실)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 오경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아방강역고』(정약용)
「渤海國の疆」(松井等, 『滿洲歷史地理』, 1915)
「北滿の二大古都址·東京城と白城·」(鳥山喜一, 『京城帝國大學滿蒙文化硏究會報告』, 1935)
『日本滿洲交通略說』(內藤虎次郎, 東洋文化史硏究, 1936)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洋學報』 36·4, 1954)
옥주 [沃州]
집필자 송기호
62주(州) 중의 하나이다.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하며, 수주(首州)이기도 하다. 따라서 치소(治所)는 남경남해부의 자리에 함께 두었을 것이다.
옥저(沃沮)·취암(鷲巖)·용산(龍山)·빈해(濱海)·승평(昇平)·영천(靈泉)의 6개의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옥저현이 수현(首縣)이었다. 한편 이곳의 특산물로는 면이 유명하였다. 이는 목면(木棉)이 아니고 뽕나무누에나 멧누에[蠶]의 고치로 만든 풀솜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顯州之布·沃州之綿辨析」(方學鳳, 『연변대학학보사회과학판』, 1984年 4期)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問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정주 [睛州]
집필자 송기호
혹은 청주(晴州)로도 표기되어 있다.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천청(天晴)·신양(神陽)·연지(蓮池)·낭산(浪山)·선암(仙巖)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천청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 1955)
초주 [椒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된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한다. 위치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초산(椒山)·초령(貂嶺)·시천(澌泉)·첨산(尖山)·암연(巖淵)의 5개 속현이 있었으며, 초산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➎ 서경 압록부 [西京 鴨淥府]
발해 5경 중의 하나이다. 발해국에서 당나라로 가는 교통로의 요지이다. 속주(屬州)로서는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가 있었으나, 이 4주는 물론 서경압록부의 위치조차 여러가지 학설이 엇갈려 아직 분명하지 않다.
정약용(丁若鏞)의 평안북도의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을 비롯하여 이와 가까운 거리인 임강설(臨江說)·통구설(通溝說)이 있으나, 임강설이 가장 유력하다.
서경에서 당으로 통하는 교통로는 압록강구를 거쳐 해로로 요동반도(遼東半島)의 해안을 따라 지금의 여순(旅順)에 이르러 거기에서 남으로 발해만구를 횡단하여 중국 산둥성(山東城)의 등주(登州)에서 상륙하는 길이었다. 5경의 하나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발해국의 수도가 된 일은 없었다.
[참고문헌]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정약용)
『新唐書渤海史考』(鳥山喜一, 東京奉公會, 1915)
「渤海國の疆域」(松井等, 『滿洲歷史地理』 1, 1913)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洋學報』 36-4, 1954)
정주 [正州]
집필자 송기호
일명 비류군(沸流郡)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기재된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하였다.
그 위치는 비류수(沸流水)가 휘발하(輝發河)의 상류임을 들어 영액변문(英額邊門)의 동쪽일 것이라는 추정과, 비류수가 혼강(渾江) 유역임을 들어 길림성(吉林省)통화(通化) 또는 환인(桓仁) 방면이라는 추정이 있으며, 또 현재의 길림성 통화시로 비정하기도 한다. 속현(屬縣)은 미상이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풍주 [豊州]
집필자 송기호
일명 반안군(盤安郡)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하였다.
위치는 송화강(松花江) 상류 또는 압록강 상류, 현재의 길림성(吉林省)장백현(長白縣)·장백진(長白鎭)으로 비정하는 등 일정하지 않다. 속현으로는 안풍(安豊)·발각(渤恪)·습양(隰壤)·협석(硤石)의 4개 현이 있었으며, 영풍현이 수현(首縣)이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 滿洲篇』, 1955)
신주 [神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열거되어 있는 62주 중의 하나로서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한다. 그 위치는 가탐(賈耽)의 ≪도리기 道里記≫에 의거하여, 현재의 길림성(吉林省) 훈강시(渾江市) 임강진(臨江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신주가 서경압록부의 수주(首州)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신주를 수주로 봄으로써 서경압록부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주장한 데 반하여, 환주(桓州)를 수주로 보고 서경압록부는 집안(集安)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록(神鹿)·신화(神化)·검문(劍門)의 3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신록현이 수현(首縣)이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簡史』(王承禮, 黑龍江人民出版社, 1984)
환주 [桓州]
집필자 송기호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 62주(州) 중의 하나로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한다. 그 위치는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과 동일한 곳으로 현재의 길림성(吉林省)집안현(集安縣)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환도성이 국내성(國內城)과 동일한 곳이었는지의 여부는 의견이 다르다. 또, 환주가 서경압록부의 수주(首州)였다는 주장도 있다.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의 3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환도현이 수현(首縣)이었다.
한편, 기수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독로강(禿魯江)으로 그 현성(縣城)은 현재의 강계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주의 특산물로서 오얏[李]이 유명하였는데, 집안 일대에는 현재도 오얏을 비롯한 여러가지 과일이 생산되고 있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渤海史上の諸問題』(鳥山喜一, 風間書房, 1968)
「渤海國地理考」(和田淸, 『東亞史論叢-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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