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발해의 천도과정

자연정화 2018. 7. 19. 09:00

발해의 천도과정

 

1장. 발해를 연 구국(舊國)시대

 

 

발해는 698년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하여 현주(顯州), 상경(上京), 동경(東京)을 거쳐, 794년 상경(上京)으로 환도하였다. 전근대 시대의 수도는 정치와 외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발해의 천도과정을 통해 고대제국의 형성과 발전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유민이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말갈족과 함께 요서지역의 영주(營州, 현재 중국 遼寧省 朝陽)에 거주하였다. 발해의 건국을 주도한 대조영 집단도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 내지로 강제이주 당한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696년 5월 영주에서 계단인 이진충(李盡忠)의 반란을 계기로 일차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 대조영 집단을 토벌하기 위해 이해고와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천문령(天門嶺, 중국 吉林省 哈達嶺)에서 대패하였다. 이 무렵 거란(契丹)과 해(奚)가 돌궐(突厥)에 복속된 탓에 당나라는 더 이상 대조영 집단을 토벌할 수 없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 집단은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목단강(牧丹江) 상류의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정착하였다(『新唐書』 권219, 列傳 144, 渤海).

 

이곳은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상산자촌(吉林省 敦化市 賢儒鄕 城山子村)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성산자산성은 산성으로서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거주공간으로서 평지성(平地城)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성산자산성과 결합된 평지성은 종래 오동성(敖東城, 산성에서 북동쪽으로 15km)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영승유적(永勝遺蹟, 산성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牧丹江 너머)이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형태는 고구려식 방어체계를 따른 것이었다.

 

발해가 이곳에서 건국하게 된 까닭은 기본적으로 과거 고구려의 주요 지역(平壤城 일대, 遼東 지방, 國內城 지역, 夫餘城 지역)이 장기간 전란과 멸망 이후의 격동으로 피폐해지고, 그 주민은 대규모로 당나라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되어 호구(戶口)가 크게 감소함으로써 이들 지역에서는 새로운 국가체가 건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이곳 구국(舊國)에 수도를 정하고 발해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닦아나갔다.

이후 발해는 이곳 구국에서 현주(顯州) → 상경(上京) → 동경(東京)을 거쳐 다시 상경(上京)으로 천도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게 된다.

 

 

2장. 구국에서 현주(顯州)로, 현주에서 다시 상경(上京)으로

 

 

698년 구국(舊國)에서 건국한 발해는 756년 무렵 상경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한차례 현주로 천도하였다.

 

중경(中京)은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吉林省 和龍市 西古城)으로 비정된다. 성의 남쪽에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서북쪽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도(頭道) 평야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두도평야는 해란강 유역의 평야 중에서 가장 크다. 주변에서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으로 유명한 용두산 고분군(龍頭山 古墳群)과 순금제 장식들이 발견된 하남둔(河南屯) 고분군, 북대(北大) 고분군들이 발견되었다.

 

성은 토성(土城)으로서 외성(外城), 내성(內城)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의 동서벽은 각각 약 729m, 남북벽은 각각 628m로 총둘레는 약 2,714m이다. 내성은 동서의 길이 약 190m, 남북의 길이 약 310m로 총둘레는 약 1,000m이다. 내성의 중․북부에서 모두 5개의 건축지가 확인되었다.

 

발해가 구국에서 현주로 천도한 시점은 무왕시대로 추정된다.

무왕대는 발해가 주변으로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신라가 당나라와 결탁하게 되었다. 특히 726년 당나라가 흑수말갈에 라마주(羈縻州)를 설치하자, 발해 내부에서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싸고 무왕 대무예(大武藝)와 그 아우 대문예(大門藝)간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결국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고, 무왕은 집요하게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732년 9월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당시 발해의 수도가 규모가 협소한 구국(舊國)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무렵을 전후한 시기에 현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무왕은 732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주로 천도하였지만, 이후 즉위한 문왕은 756년 무렵 다시 상경(上京)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인 755년 11월에 당나라에서는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하여 이후 8년간 혼란의 상황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변경에만 설치된 번진(藩鎭, 節度使)이 내지로 확산되었다. 곧 변경번진(邊境藩鎭)에서 내지번진(內地藩鎭)의 시기로 전환된 것이다. 이 때문에 무왕이 현주로부터 상경으로 천도하게 된 데에는 안사의 난에 대한 대비라는 대외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안록산(安祿山)은 일찍이 당나라의 발해 방면 책임자로서 신라와 함께 발해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발해는 안사의 난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해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이 대비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 발해의 무왕도 안록산이 동진하여 발해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발해가 건국 이래 60여년 동안 동북쪽으로 상당히 발전하였기 때문에 통치의 중심지를 동북쪽으로 옮길 필요성까지 제기되었다.

 

특히 발해는 무왕대에서부터 북진정책을 추구하여 흑수말갈 문제로 당과 충돌하기까지 했었다. 무왕의 북진정책을 이어받은 문왕대 초반에 불열(拂涅)․월희(越喜)․철리말갈(鐵利靺鞨)을 복속한 뒤에는 흑수말갈의 복속이 최대 과제였을 것이다.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이후 10년간 대당교섭을 중단하였다. 문왕 즉위 이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흑수말갈은 다시 741~752년간에 7차례 당에 입공하였다. 발해로서는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접근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경 천도 후 문왕 말기까지 흑수말갈의 대당조공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상경 천도를 통해 흑수말갈의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상경 천도의 목적을 안사의 난에 대한 대비하려는 목적과 함께 당나라의 약화를 틈타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구국(舊國) → 현주(顯州) → 상경(上京)으로의 천도 과정에서는 발해의 영역 확장에 따른 대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3장. 상경에서 동경(東京)으로, 그리고 다시 상경으로

 

 

동경(東京)은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吉林省 琿春市 八連城)으로 비정된다. 이곳은 훈춘하(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의 서쪽 끝지점으로 훈춘시(琿春市)에서 서쪽으로 6km 떨어져 있다. 팔련성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는 두만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의 지세는 평탄하고 주위에는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동해에 연하고 있다.

 

성은 토성(土城)으로 방형(方形)에 가까우며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은 동벽 약 739m, 서벽 약 728m, 남벽 약 612m, 북벽 약 696m로 둘레는 약 2,755m정도이다. 성안은 다시 북쪽구역, 중심구역(3구역), 동쪽구역(2구역), 서쪽구역(2구역)으로 나뉜다.

 

훈춘현지(琿春縣誌)에는 성안에 북대성과 7개의 작은 성 등 모두 8개의 성이 연달아 있기 때문에 팔련성(八連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성은 북쪽구역을 말하고 나머지 7개의 작은 성은 중심구역의 3개의 소구역과 동서구역의 4개의 소구역을 의미한다. 1942년 재등심병위(齋藤甚兵衛)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중심구역의 3구역(北城, 中城, 南城)의 각각의 남문은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그 중 북성에는 궁전터로 추정되는 기단이 발견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현재의 외성 남벽 밖에 동서로 긴 또 하나의 성벽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외성은 내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동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원년간(貞元年間, 785~805)에 (수도를) 동남쪽의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흠무(欽茂)가 죽자 멋대로 문왕(文王)이라고 시호를 올렸다. (문왕의) 아들 굉임(宏臨)이 일찍 죽어 (문왕의) 족제(族弟)인 원의(元義)가 즉위하였는데, 1년만에 (성격이) 의심 많고 포악하여 국인(國人)들이 그를 죽이고 굉임(宏臨)의 아들 화여(華璵)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상경(上京)으로 환도하고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는 죽었으니 시호를 성왕(成王)이라 한다(『新唐書』 권219, 列傳 144, 渤海).

 

이 사료에서는 동경(東京) 천도(遷都)에 대해 정원년간(貞元年間, 785~805)이라고만 언급하였지만, 보통 정원 초반인 785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문왕 말기에 해당된다. 동경 천도 이후 10년도 못되어 문왕이 죽자(793) 적손(嫡孫) 대화여(大華璵) 대신 문왕의 족제(族弟)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의심많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1년만에 발해의 지배층인 국인(國人)에게 살해되었고, 대화여가 성왕(成王)으로 추대되었다.

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상경(上京)으로 환도하고 곧바로 사망하였다.

 

 

성왕 사후 즉위한 강왕(康王)은 15년간 재위하였다. 그러나 강왕(康王) 사후에 왕위는 11년간 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 3대에 걸친 형제상속을 거쳐, 왕계(王系)를 달리하는 선왕(宣王)에게 넘어갔다.

 

이처럼 문왕(文王)의 사망에서 선왕(宣王)의 즉위(818)까지 25년간은 6왕이 즉위와 사망을 되풀이하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드러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내분기라고 할만큼 중요한 정치적 격변기이다. 따라서 동경 천도와 상경 환도는 그 일차적인 원인을 정치적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된다.

 

 

4장. 발해 천도의 배경

 

발해는 무왕대에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732년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내적으로 지배체제의 미비, 대외적으로 발해의 지원세력인 돌궐의 세력 약화 및 당나라와 결탁한 신라의 위협 등의 이유 때문에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 즉위한 문왕은 대당관계의 개선을 통해 대외적 안정을 꾀함과 동시에 당나라의 율령제를 근간으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추진하였다. 756년 무렵의 상경 천도 이후부터 중앙통치기구와 지방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하였으며, 774년 대흥(大興)에서 보력(寶曆)으로의 개원(改元)은 이러한 추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대외노선의 변경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체제 정비는 지배세력의 재편을 수반하였다. 785년 무렵 동경 천도를 즈음해서 연호는 보력(寶曆)에서 다시 대흥(大興)으로 복구되었다. 그리고 문왕 사후에 족제(族弟)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는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동경 천도와 연호 복구는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 과정에서 소외된 정치세력의 반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문왕대 체제정비 과정에서 성장한 ‘국인(國人)’세력이 대원의를 살해하고, 문왕의 적손(嫡孫) 대화여(大華璵)를 성왕(成王)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네 차례의 발해의 천도과정에서 각각의 도읍 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국(698년) → ② 현주(732년 전후) → ③ 상경(756년 무렵) → ④ 동경(785년 무렵) → ⑤ 상경(794년)

 

이상과 같이 발해 전기의 도읍기간은 동경(東京)을 제외하고는 구국(舊國), 현주(顯州), 상경(上京) 모두 30년 정도라는 공통성을 보인다.

 

각 시기의 대내외적인 정세에 따라 발해가 천도했으리라는 해석과 함께 도읍 기간이 모두 30년간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발해 지배층이 특정한 의도하에 정기적으로 천도를 행하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발해는 무왕대와 문왕 전반기에 주로 동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발해의 영역은 크게 보면 평양(平壤) 일대와 요동 지역을 제외한 고구려 영역과, 북류(北流) 송화강(松花江) 이동(以東)과 동류(東流) 송화강(松花江) 및 흑룡강(黑龍江) 이남(以南) 지역이다. 즉 과거 고구려보다 동북방으로 영역이 치우쳤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이래로 반농반렵(半農半獵)을 중심으로 하는 말갈족(靺鞨族)의 거주지였다. 그런데 발해의 지배층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자생적으로 발전해 온 것도 아니고, 또 사회경제적으로 반농반렵적 특성을 가진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 전기의 빈번한 천도는 지배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자체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파악된다. 선왕(宣王)․대이진대(大彛震代)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된 발해의 지방통치제도에서 핵심이 되는 5경 가운데 3경이 발해 전기의 수도였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상경으로 환도한 이후 다시는 천도가 없었던 사실은 문왕대부터 추진된 체제정비가 내분기를 거치면서 선왕대 이후로 확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5장. 발해 천도의 종착지 상경성

 

1절. 상경성의 성립 - 규모의 확대와 구조의 변화

 

상경성(上京城)은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에서 서남쪽으로 약 35km, 동경성진(東京城鎭)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목단강(牧丹江) 중류의 동경성(東京城) 분지의 충적평원에 있다. 상경성의 서남쪽에 경박호(鏡泊湖)가 있으며 여기서 흘러오는 목단강이 성의 서벽 밖으로 약 1km 정도 흐르다가 동쪽으로 꺾이는데, 성의 북벽에서 3km도 안된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에 편리하며 주위가 산으로 둘러 막혀 자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상경성 위성사진(IKONOS 2003년 10월 촬영). 사진제공 동북아역사재단, ㈜위아

 

상경성은 외성(外城), 궁성(宮城), 황성(皇城)으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그 규모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외성(外城)은 동서로 긴 장방형인데, 동벽은 3,358.5m, 서벽은 3,406m, 남벽은 4,586m, 북벽(凸형)은 4,946m로 성벽은 속에 돌을 쌓고 겉에 흙으로 덮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다. 성의 총둘레는 162,965m이다.

 

궁성(宮城)은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900m, 서벽 940m, 남벽 1,050m, 북벽 1,906m의 장방형이며, 성벽은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른 돌로 쌓았다. 궁성은 중심구역과 북쪽구역, 동쪽구역 및 서쪽구역 등 4개 구역으로 나뉜다. 이중 가장 중요한 곳은 중심구역으로, 그 크기는 동서벽은 720m, 남북벽은 620m이다. 중심구역은 다시 중구, 동구, 서구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중구에 7개의 궁전터가 있다.

 

황성(皇城)은 큰 길(제5호 도로;너비 92m)을 사이에 두고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447m(제5호 도로 포함), 서벽 454m, 남벽 1,045m, 북벽 1,050m로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성벽은 현재 북벽만 남아 있는데, 돌로 쌓은 것이 궁성의 벽과 같다. 황성은 동서로 3개의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동서 두 구역은 동서 413m, 남북 355m로 서로 크기가 같다.

 

그런데 이러한 규모의 상경성은 언제 완성된 것일까. 발해 전기에 30년마다 천도가 행해졌던 점을 고려하면, 처음 천도한 756년 무렵에 이러한 규모가 곧바로 조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발해는 794년 상경 환도 이후 내분기를 극복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을 구가하였기 때문에,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존 상경성의 규모가 756년 천도 당시의 실제 규모라고 한다면, 이는 동 시기의 中京이나 東京에 비해 너무 크다. 오히려 중경(中京)의 외성(동서벽 729m, 남북벽 628m)의 경우 상경성 궁성의 중심구역(동서벽 720m, 남북벽 620m)과 규모가 비슷하고, 동경의 외성(동서벽 약 740m, 남북벽 약 706m)은 이보다 조금 크다. 또한 중경과 동경의 경우 내성에 세로 선상으로 궁전터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배치된 구조는 상경성 궁성 내부에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볼 때 756년 무렵의 상경성은 그 규모가 현존 상경성의 궁성 내 중심구역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중경과 동경의 내성 내부에 궁전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에서 볼 때, 당시 상경성의 내성은 중심구역 내부에 7개의 궁전터가 있는 중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현존 상경성 궁성 안에 있는 7개의 궁전터 가운데 제1․2궁전터에 해당되는 것을 중경과 동경의 내성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1․2궁전은 처음 천도하였을 당시에 조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756년 무렵의 상경성의 규모가 중경이나 동경과 같았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규모가 확대되고 구조에 변화가 생겨났을까. 그 실마리는 아무래도 상경 환도 이전의 수도였던 동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동경 팔련성 바깥에 다시 외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팔련성 남벽의 바깥에서 발견된 3개의 절터의 위치가 상경성 황성 밖 외성 안의 절터 위치와 비슷한 점에서 추정된다. 즉 팔련성의 1호․2호․3호 절터는 상경성의 4호․2호․6호 절터와 위치가 비슷하다. 이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동경과 상경이 대체로 동일한 도시계획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즉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현존 팔련성 바깥에 다시 이방제(里坊制)를 갖추고 외성으로 둘러쌓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문왕 말기에 현존 상경성의 규모의 도성 계획이 수립되었음을 의미한다.

 

발해 상경 국가고고유지공원 전경도

 

그러나 문왕 사후 대원의(大元義)의 즉위, 그리고 국인(國人)에 의한 피살과 성왕(成王)의 추대라는 정치적 갈등을 거친 후, 성왕은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따라서 동경성의 외성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동경 천도기에 계획에만 그쳤던 외성은 상경 환도 후 언제 실현되었을까. 이 점에서 문왕 사후(793)에서 선왕 즉위(818)까지의 25년간의 내분기 가운데 15년간 재위하였던 강왕(康王)대가 주목된다. 강왕대는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내분기 가운데 상대적 안정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왕 말년에 수립된 외성 설치 계획은 정국이 안정된 강왕 때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곧바로 현존 상경성의 외성 규모로까지 확대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성은 궁성, 황성, 외성 순서로 건축되었다는 감안한다면, 강왕대에는 현존 상경성의 궁성과 황성을 포함하는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초기에는 외성 없이 궁실만 존재하는 궁도(宮都)의 형태로 있다가, 율령국가(律令國家)의 등장과 함께 조방제(條坊制)를 수반하는 도성제(都城制)가 확립되었다. 당나라의 낙양성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낙양성은 처음에 주도(州都)였는데, 국도(國都)로서 완성된 것은 칙천무후(則天武后)의 영창(永昌) 원년(689)이었다. 때문에 최초의 낙양성은 이른바 황궁 부분만 있었고, 그 주위에 황성이 조영되고 다시 그 주위에 방리(坊里)가 건축됨에 따라 비로소 국도(國都)의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발해는 선왕의 즉위로 내분기를 극복하고 이후 정국은 안정되어 해동성국을 구가하게 되었다. 발해의 사방의 경계와 3성 6부등 중앙 통치기구와 5경 15부 62주 등 지방 통치제도가 대체로 선왕(宣王)․대이진대(大彛震代)에 완성되었다. 이는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의 확립을 의미한다. 상경성의 확대와 함께 외성이 설치되었다면 이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동경 시대에 계획된 외성이 이때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궁성도 확대되고 그 아래에 황성이 새로이 설치되는 등 내성의 구조도 바뀌고, 그 바깥의 시가지를 정연한 도시계획에 따라 배치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내성 구조의 변화에 상응하여 궁성내에 새로운 궁전 즉 제1․2호 궁전도 이때 세워졌을 것으로 파악된다.

 

사료에 의하면 발해가 연호를 사용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지방제도를 정비한 결과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발해의 중앙정치제도나 지방제도가 율령제(律令制)로 대표되는 당나라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따서 지은’ 궁궐의 경우도 그 모범은 당나라의 장안성임에 틀림없다. 이는 상경성의 궁성과 황성이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상경성 전체가 중앙의 대로(大路)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구획된 도시계획이 장안성과 똑같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당나라의 장안성은 통치형(統治型) 황제가 남면(南面)하는 구조로, 3성 9사 등 모든 행정기관은 모두 궁성 남쪽의 황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2절. 상경성의 구조

 

주지하듯이 발해인 자신이 남긴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발해의 문물제도는 당나라의 그것을 모방한 점이 많고, 상경성의 경우도 그 구성이나 배치가 당나라의 장안성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장안성과 비교하여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궁성

 

궁성은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900m, 서벽 940m, 남벽 1,050m, 북벽 1,906m의 장방형이다. 궁성의 남벽과 북벽의 중앙에는 문이 있는데, 『영안현지(寧安縣誌)』에서 오봉루(五鳳樓)라고 한 것은 궁성의 남문이다. 궁성은 중심구역과 북쪽구역, 동쪽구역 및 서쪽구역 등 4개 구역으로 나뉜다. 이중 가장 중요한 곳은 중심구역으로 그 크기는 동서벽은 720m, 남북벽은 620m이다. 중국학계에서는 중심구역만을 궁성으로 본다.

 

중심구역은 다시 중구, 동구, 서구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중구에 7개의 궁전터가 있다. 이중 제1∼제5궁전터는 『영안현지』에 오중전(五重殿)이라고 한 것이다. 이 다섯 궁전은 궁성남문과 북문을 잇는 동시에 외성 남북벽의 중문을 잇는 길 한복판에 놓여있다. 모두 궁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규모도 웅장하다. 특히 제1, 제2궁전터가 가장 웅장하고, 제4궁전터는 온돌시설을 갖추었으며, 모두 회랑에 의해 연결되었다. 서구는 남북으로 3개의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운데 구역에서는 온돌을 갖춘 침전터, 남쪽 구역에는 수백점의 도기 파편이 나온 도기(陶器) 퇴적장이 발견되었다.

 

상경성의 궁성은 그 위치나 기능에 있어서 장안성의 궁성 가운데 태극궁(太極宮)과 비슷하다. 장안성의 궁성은 태극궁(太極宮), 동궁(東宮), 액정궁(掖庭宮)의 총칭이다. 이 가운데 태극궁이 황제가 거처하면서 국정을 논의하는 곳이고, 동궁과 액정궁은 각각 태자와 후궁의 처소이다. 여기서 태극궁의 구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영안 상경성 항공사진(ⓒ『육정산과 발해진』

 

중국 도성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따르면 왕궁을 내조(內朝)․중조(中朝)․외조(外朝)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내조는 천자가 휴식하는 곳이며, 중조는 치조(治朝)라고도 하는데 천자가 직접 정사를 보던 곳이다. 그리고 외조는 군신이 정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태극궁의 정전(正殿)은 태극전(太極殿)으로 궁성의 정문인 승천문(承天門)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승천문이 대체로 외조에 해당된다. 즉 경일(慶日)의 의식, 죄과(罪科)의 은사(恩赦), 또 외국사절의 접견 등을 행할 때, 황제는 이 문까지 나와 의례(儀禮)를 거행한다. 그리고 승천문 밖은 궁성과 황성을 가로지르는 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황제와 신하가 대치하는 조당(朝堂)이 설치되었다.

 

승천문 북쪽에는 태극문(太極門)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 태극전(太極殿)이 있다. 이곳이 중조에 해당된다. 동서에 회랑이 있고 좌우에 연명문(延明門)을 설치하였다. 좌연명문(左延明門) 밖에는 문하성(門下省), 우연명문(右延明門)에는 중서성(中書省)을 두었다. 관서의 대부분이 황성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데 반해, 이 2성이 궁성 내에 존재한 것은 그 특수한 직장(職掌)에 의한다. 즉 2성은 황제와 밀착하여 나라의 대정(大政)을 집행하기 때문에 그 관청도 천자의 대전에 근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전 북쪽의 양의전(兩儀殿)은 내조(內朝)에 해당되며, 황제가 일상의 정무에 종사하는 장소이다. 이 궁전의 북쪽이 황제의 거주구역이 된다.

 

발해 상경성이 당나라 장안성과 유사한 구조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상경성의 궁성(宮城)의 배치도 장안성의 태극궁(太極宮)과 같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태극궁(太極宮)의 태극전(太極殿)에 해당하는 제1궁전터는 궁전의 정전(正殿)이자 발해 국왕이 중조를 거행하던 곳으로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양의전(兩儀殿)에 해당하는 제2궁전터는 내조, 承天門에 해당하는 궁성 중앙의 남문(속칭 五鳳樓)은 외조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경우 제1궁전터보다 제2궁전터가 더 규모가 크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한편 장안성의 동북쪽에는 대명궁(大明宮)이 있다. 이곳은 원래 금원(禁苑)의 일부에 설치한 피서지였다. 그러나 장안성의 궁성이 저습(低濕)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황제들의 평소 거처가 되었다. 그래서 궁성을 서내(西內)라고 부르는 데 대해 대명궁(大明宮)을 동내(東內)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명궁에서 가장 큰 궁전이 서쪽의 인덕전(麟德殿)인데, 연회(宴會)나 외국 사절의 내조(來朝)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발해의 사신이 장안성을 방문했을 때, 황제를 접견하던 곳은 주로 대명궁(大明宮)의 인덕전(麟德殿)이었다. 태극궁(太極宮)의 승천문(承天門) - 태극전(太極殿) - 양의전(兩儀殿)의 구조는 대명궁(大明宮)에서 함원전(含元殿, 外朝) - 선정전(宣政殿, 中朝) - 자신전(紫宸殿, 內朝)에 해당한다. 그런데 서내(西內)의 경우 태극전과 조당 사이에 승천문이 있지만, 대명궁의 경우에는 함원전과 조당이 구별되지 않고 밀착되었다. 발해의 사신이 주로 견문한 곳이 대명궁이라면, 상경성의 궁성의 궁궐 배치도 태극궁보다 대명궁을 모범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상경성 궁성의 제1궁전터보다 제2궁전터가 더 규모가 크고, 두 궁전 사이에 문이 설치된 점에서 제2궁전터가 정전에 해당될 가능성이 더 크다. 즉 제1궁전터가 외조(外朝)에, 제2궁전터가 중조(中朝)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1궁전터와 궁성 남문 사이의 넓은 광장에 조당(朝堂)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한편 제4궁전터의 경우 기단이 다른 궁전들에 비해 낮다. 그 궁전은 중심에 있는 본채와 좌우의 곁채 모두 3개의 집으로 이루어졌고, 이 궁전터의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집이 있다. 여기에는 모두 온돌이 설치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규모상에서 제1․2․5궁전터와 구별되므로 제4궁전터는 제3궁전터와 함께 왕이나 그 측근이 일상적으로 쉬던 침전(寢殿)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곳이 외조(外朝)에 해당된다.

 

한편 발해의 상경성이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점 못지않게,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사실은 제4궁전터의 경우 온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상경성 안팎의 9개의 절터에서 사용된 기와의 모양은 궁전터의 그것과 같고, 그 대부분은 연화문(蓮華文)에 약간의 장식문을 가미하였는데, 이 또한 고구려 와당(瓦璫)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상경성 궁성의 구조는 당나라 장안성과 비교하여 유추할 수 있지만, 궁성이나 궁전의 명칭은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알 수 없다. 다만 궁전의 명칭을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발해 멸망기에 등장한다.

 

상경성 궁성

 

태조(太祖, 耶律阿保機)가 동쪽으로 (발해를) 정벌하니,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발해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공격하였다. 돌려불(突呂不)이 제일 먼저 (성에) 오르니 발해가 평정되었다. 조서를 받들어 태조의 공덕을 영흥전(永興殿) 벽에 새겼다.(『遼史』 권75, 列傳5, 耶律突呂不)

 

요(遼) 태조(太祖)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나서 돌려불(突呂不)에게 태조의 공덕을 새기게 한 영흥전(永興殿)은 발해 상경성의 다섯 궁전 가운데 하나의 명칭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여기에 정복자의 공덕을 새겼다는 점에서 영흥전은 궁성 안의 정전(正殿)의 명칭일 것이다. 그런데 장안성의 궁성의 명칭인 태극궁(太極宮)은 중조(中朝)인 태극전(太極殿)에서 유래한 점을 감안하면, 발해의 경우도 유사하였을 것이다. 즉 상경성 궁성에서 중조(中朝)가 영흥전(永興殿)이라면 궁성의 명칭도 영흥궁(永興宮)이라고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밖에 궁성 안에서 ‘보덕(保德)’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영흥전을 제외한 다른 한 궁전의 이름이 보덕전(保德殿)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영흥궁의 구체적 범위가 태국궁과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궁성의 나머지 부분 가운데 동궁(東宮)을 동쪽 구역의 금원(禁苑) 뒤쪽으로 보기도 하고, 제8호 도로에 의해 궁성과 구분되는 별궁(別宮, 離宮)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궁성의 중심부분만 궁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영흥궁(永興宮)의 동쪽은 동궁(東宮), 서쪽은 서궁(西宮)으로 보아 13∼20호 건축터와 28∼31호 건축터가 각각 이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2] 황성

 

황성은 제5호 도로를 사이에 두고 궁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크기는 동벽 447m, 서벽 454m, 남벽 1,045m, 북벽 1,050m로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황성은 동서로 3개의 소구역으로 나뉘는데, 동서 두 구역은 동서 413m, 남북 355m로 서로 크기가 같으며, 여기서 관청터로 추정되는 10개의 건축터를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그 위치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발해의 중앙정치기구인 3성 6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청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반면 중구는 지세가 평탄하고, 유물이나 유적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구는 황성남문과 궁성남문을 잇는 길이며 동시에 궁성 앞 광장이기도 하다. 광장의 동서 너비는 222m이며 남북의 길이는 황성 남북의 길이와 같다.

 

발해는 중앙통치기구로 3성(政堂省, 宣詔省, 中臺省), 6부(忠․仁․義․智․禮․信部), 1대(中正臺), 7사(殿中․宗屬․太常․司賓․大農․司藏․司膳寺), 1원(文籍院), 1감(冑子監), 1국(巷伯局) 등을 설치하였고, 군사제도로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 등 10위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관서(官署)가 황성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10위는 궁성 및 황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발해의 전성기 때의 궁성 및 황성의 모습은 다음 사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대화(大和) 6년(832) 12월 무진(戊辰)에 내양(內養) 왕종우(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발해가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과 좌우삼군(左右三軍), 그리고 120사를 설치했다고 말하고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舊唐書』 권17下, 本紀 17下, 文宗 下)

 

832년(咸和 2)에 발해에 파견되었던 당나라 사신의 보고에 의하면 발해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과 좌우삼군(左右三軍) 및 120사를 두었다. 당나라의 경우 장안성의 대명궁(大明宮)을 호위하는 군영을 좌우삼군(左右三軍)이라 하며,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은 삼군(三軍)의 하나이다. 좌우삼군은 북아삼군(北衙三軍)이라고도 부른다. 남아(南衙, 皇城)에 배치된 16위가 전국에서 번상(番上)하는 부병(府兵)에 의해 편성된 정규군인 데 반해, 이는 황제직속의 근위군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발해가 내분기를 극복한 이후 장안성을 본따 상경성을 수축하였다면, 도성의 수비나 관서의 배치도 장안성을 모범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좌우삼군(左右三軍)과 구별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성격은 당과 마찬가지로 국왕 직속의 궁성수비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그림에 포함된 120사의 경우 황성에 배치된 관서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멀리서 본 상경성 일대. 사진제공 송기호

 

[3] 외성

 

외성의 규모는 동벽 3,358.5m, 서벽 3,406m, 남벽 4,586m, 북벽(凸형) 4,946m의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총둘레는 162,965m이다. 대체로 당의 장안성(동서 약 9.7km, 남북 약 8.7km)의 1/4이며, 일본의 평성경(平城京)과 평안경(平安京, 동서 약 4.5km, 남북 약 5.3km)보다 조금 작다.

 

성문은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개, 남벽과 북벽에 각각 3개 있는데 서로 일직선상에 있다. 성안에는 이 성문들을 연결하는 길과 그밖의 길을 합쳐 모두 11개의 도로가 있다. 즉 외성벽 안을 감돌은 제11호 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도로는 모두 일직선으로 마주 향한 성문 또는 성벽 사이를 이은 까닭에 십자형(十字形)을 이루며 바둑판 모양으로 전체 성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중 너비가 110m로 가장 넓은 것은 흔히 당 장안성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연상시키는 제1호 도로(2,195m)이다. 이 도로는 외성 남벽의 가운데 문과 황성 남문을 연결하는데, 이를 통해 곧장 궁성으로 들어간다. 제1호 도로는 성을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편의상 그 동쪽을 동반성(東半城), 서쪽을 서반성(西半城)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장안성이나 일본의 평성경․평안경은 이 길을 중심으로 각각 좌경(左京)과 우경(右京)으로 불렀기 때문에 발해 상경성의 경우도 당시에는 이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도로들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진 외성의 각 구역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과 절, 시장 같은 것이 있던 里坊이 있다. 동반성 이방(里坊)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으나, 서반성 이방(里坊)의 배열상태는 잘 밝혀져 있다. 여기에는 41개의 이방(里坊)이 있는데 큰 것은 9개, 작은 것이 32개이다. 이방(里坊)의 크기는 동서 465∼530m, 남북은 큰 것이 350∼530m 작은 것이 235∼265m이다. 이방(里坊)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구획의 규모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동서 혹은 남북으로 질서정연하게 쌓은 벽에 의하여 나누어진 점에서는 모두 같다. 각각의 이방(里坊)에는 귀족, 관료, 일반 주민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외성은 좌우대칭 구조로 이루어졌으므로 동반성에도 41개의 이방(里坊)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모두 82개의 이방(里坊)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궁성의 동쪽에는 2개의 이방(里坊)이 하나의 구획(동서 500m, 남북 780m)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궁성의 동문을 거쳐 궁성의 금원(禁苑)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 구획안에 비교적 규모가 큰 집자리가 15군데나 있는 점은 궁성안의 모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곳은 별궁(別宮, 離宮)으로 보인다.

 

한편 서반성의 세로 제3열 북쪽에서 제4∼5이방(里坊) 사이에는 동서 길이 190m, 남북 너비 110m되는 장방형의 구획이 있는데, 여기서 5개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이 구획은 두 이방(里坊) 사이에 위치한 점이 다른 이방(里坊)과 다르기 때문에 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좌우대칭의 도시구획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서시(西市)에 해당되고, 동반성의 경우에는 동시(東市)가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10개의 절터가 발견되었는데, 두 곳(제8․9호 절터)은 외성 밖에 있다. 외성 안에 있는 절터 가운데 세 곳의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이 동경 팔련성 남벽 바깥에서 발견된 3개의 절터와 비슷하다.

 

이와 같은 상경성의 건설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이 적용되었다. 첫째 4각형을 기초로 하는 방안법, 둘째 왕권중심의 겹성제도[重城制], 셋째 축대칭수법, 넷째 2등분법이다. 특히 겹성제도는 도성의 대지선정에서 전반적으로 북으로 차츰 높아져 그 윗부분에 궁성과 황성이 배치하면서 도시전체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도록 하여 궁성이 도시전반, 주민 거주지 위에 ‘군림’하는 자세가 되도록 하였다. 또한 축대칭수법을 통해 외성의 남중문과 북중문을 통하는 남북중심축이 대칭의 중심으로 되고 있다. 이 중심축은 궁성의 5개 궁전과 궁성의 남북문, 황성 남문을 통과하고 있다. 겹성제도와 축대칭수법은 모두 왕권중심의 도시계획적 표현의 하나이다.

 

皇城 이남의 외성구획은 2등분법이 적용되어 제1호 도로에 의해 크게 두 부분으로 갈라진다. 동반성(東半城)과 서반성(西半城)을 동서와 남북 방향에서 다시 각각 2등분하면 4개의 정방형 구획이 얻어지는데, 이 구획들은 너비가 78m의 도로들(제2․3․4호 도로)에 의하여 갈라진다. 이 구획 하나하나는 도시계획상 구역을 이룬다. 정방형의 이 구역들을 동서방향으로만 2등분하면 동서로 긴 장방형 구획들로 나뉘어진다. 이 장방형의 두 변의 비는 약 1 : 2이다. 이 장방형 구획은 도시계획상 소구역을 이루며 소구역들 사이는 너비 28m의 도로들(제7․10호 도로)에 의하여 구분된다. 이 소구역들이 도시계획의 기본단위가 된다. 장방형 소구역들을 동서와 남북 방향에서 다시 각각 2등분하면 동서로 긴 장방형 구획이 각각 4개씩 얻어진다. 이 장방형구획의 두 변의 비는 약 1 : 2이다. 이 장방형 구획이 도시계획의 최소단위인 이방(里坊)을 이룬다. 이방(里坊)들 사이는 이방(里坊) 벽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여기에서 각 이방의 동서길이는 궁성의 절반너비와 같고 남북길이는 그 절반에 맞먹는다. 그리고 궁성과 황성 좌우구획에서도 동서방향에 대해서는 2등분법으로 하였다. 다만 남북방향에서만 한번 3등분법을 썼다.

 

상경성 위성사진

 

상경성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궁성과 황성이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그 둘레를 돌로 쌓아 일반인의 거주지인 이방(里坊)과 구별한 점이다. 또한 이방(里坊)들 사이를 경계지은 이방(里坊) 벽(담장)은 돌로 벽심을 넣고 그위에 흙은 덮은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돌심벽은 벽체부분이 너비 1.1m, 밑부분이 너비 1.8m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나라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도성의 규모가 서로 다른 만큼 설치된 이방(里坊)의 숫자가 다르다. 즉 상경성에는 82개의 이방(里坊)이,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110방, 일본의 평성경(平城京)의 경우 68방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제사와 행정의 중추기관을 궁성 및 황성 한 곳에 집중하고, 민간의 가옥과 격리한 것은 북위(北魏)의 낙양성(洛陽城)이 처음이다. 그리고 낙양성에 대규모의 이방(里坊)이 출현하는 것은 대규모의 사민(徙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주민은 성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민은 사방으로 외성에 버금가는 두꺼운 방장(坊墻)에 둘러싸인 방내(坊內)에 살면서 2개 혹은 4개의 방문(坊門)을 통해서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교역행위는 시(東市와 西市)라고 불리는 특정의 방내(坊內)에서만 정오부터 일몰 때까지만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런 도시구조의 목적은 주민통제에 있었다.

 

한편 일본의 경우 등원경(藤原京) 천도(694)에서 평안경(平安京) 천도(794)에 이르기까지 천도에 앞서 택지반급(宅地班給)이 실시되는 특징을 보인다. 택지반급(宅地班給)의 직접적인 대상은 주로 관인(官人)인데, 일본율령국가(日本律令國家)의 지배자층(支配者層)은 기내(畿內)의 유력호족(有力豪族) 출신이다. 택지반급은 이들에게 기내(畿內)의 본거지를 떠나 도성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며, 또한 호족의 지위를 벗고 도성에 생활의 기반을 갖는 귀족(貴族)으로 전신(轉身)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민(徙民)이라는 점에서는 중국에서 행해진 것과 공통성을 갖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이 관료제 형성의 일환으로서 실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도성은 권력집중(權力集中)의 장(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도성(都城)이 대규모의 사민(徙民)을 통해 이루어지고 아울러 권력집중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점은 발해의 상경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발해는 지방 통치를 위해 초기에 현지 지배자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중앙귀족으로 편입시켜 나가다가, 문왕 후기부터 선왕대까지는 지방관들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경성의 확대가 선왕(宣王)․대이진대(大彛震代)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도성의 확대 과정에서 대규모의 사민이 요구되고, 도성 내부에 관료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이방(里坊) 구조를 갖추게 된 사실 등은 지방관의 파견과 함께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의 확립에 수반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궁성, 황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규모의 현존 상경성은 발해 전기의 도성이었던 중경이나 동경과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상경성은 천도와 환도 과정에서 규모와 구조가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상경은 756년 무렵 천도하였을 때는 지금의 궁성 정도의 규모였으며, 중경이나 동경과 마찬가지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이러한 규모와 구조의 상경은 결국 문왕대부터 추진된 체제정비 과정과 맞물려 확대되어 간 것이다. 그 단서는 동경 도읍기에 외성의 설치가 계획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문왕 사후(793)에서 선왕 즉위(818)까지 내분기에 휩쓸렸기 때문에, 곧바로 상경의 규모를 확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내분기에서 상대적으로 안정기인 강왕대에 현존 상경성의 황성 규모로 확대되었고, 선왕 이후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외성을 갖춘 현존 상경성의 규모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내성이 궁성과 황성으로 구분되고 아울러 궁성 내부에도 새로운 궁궐도 조영되었다.

 

이러한 규모의 상경성은 당나라 장안성과 유사하게 궁성과 황성이 외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일반 주민의 거주지인 이방(里坊)과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도성 구조는 통치형(統治型) 황제가 남면(南面)하여 주민들을 통제하는 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발해의 지배층이 지향한 지배체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