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靖康之變)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1126년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고, 중국 사상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을 잃어버리고,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사로잡힌 사건을 말한다. 정강(靖康)은 당시 북송의 연호이다.
배경
송나라는 국내의 무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문치정책을 썼는데, 이것 때문에 요나라와 서하의 침입에 대항하지 못해 조공이나 다름없는 은이나 비단을 매년 수차례 보내 침입을 방어하였다. 그 때문에 송의 재정은 나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그 타개책으로 왕안석의 개혁을 통해 수많은 개혁정치를 실행하였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투쟁이 격화되고, 피폐한 농민들에 의해 방랍의 난 같은 농민의 반란이 잇달았다.
휘종의 실정
특히, 제8대 황제 휘종은 정치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서화나 골동품에 심취하였고, 미녀에 빠지는 등 "풍류천자"라고 불리는 생활을 하여 국력을 탕진하였다. 정치를 맡게 된 신하 채경은 권력을 휘둘러 당시 권력층과 흠종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힘을 쏟아 당시 정치와 경제 재정상태는 빈사 직전이 되었다.
방랍의 난
휘종은 쑤저우의 태호석등을 개봉까지 운반하는 데 수십만 백성을 동원하였고, 너무 가혹하고 피폐해진 백성들은 이를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났는데 이것이 방랍의 난이다. 송나라는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엄청난 소모를 보였고, 군사력과 국력을 탕진하였다. 당시 방랍의 반란군 10만을 제압하기 위해 요나라 군대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하였던 15만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진압과정에서 죽인 백성도 300만에 달하였을 정도였다.
금나라의 성립
오늘날 만주 동부에 있는 퉁구스 계로 반농반엽 생활을 하던 여진족은 처음에 요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에 의해 독립을 하면서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안 휘종은 종래 요나라에게 주고 있던 세금을 금나라에게 보내고,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한다. 금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고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송군의 전과는 미미하였다. 워낙 평화에 젖은 군대는 약체였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가 이에 격분하여 항의를 하자 송은 공물을 대폭 인상하여 바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무마를 시키는 데 성공한다. 1125년 금나라는 마침내 송나라와 동맹을 맺어 요나라를 없애게 된다.
금나라 송을 치다
그 후 요나라와의 전쟁 상황만 주시하던 송은 약속된 공물을 지급조차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금의 정치 내분을 조장하여 견제를 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금나라는 군대를 남하하여 수도 카이펑을 공격한다. 이에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흠종에게 떠넘긴다. 휘종은 수도를 포위한 금군과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한세충을 비롯한 주전파는 그 강화에 반발하였고, 끝내 강화맺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금나라는 다시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1126년 11월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만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었다.
결과
금나라는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명을 포로로 잡아 만주로 연행했다.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들은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했고, 대부분이 그곳에서 남게 되고 남은 생을 거기서 마치게 된다.
이후 남송의 재상이 된 진회도 이때 같이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게 되는데, 외교의 중요성과 대책없는 주전론을 경계하는 평생의 계기가 된다.
이렇게 송은 멸망했지만, 당시 수도인 카이펑에 있지 않던 휘종의 아홉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강남의 임안(현재의 항저우)으로 가서 남송을 세우고 고종으로 즉위한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 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올라있던 터라 고종의 형인 흠종은 포로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만주 땅에서 죽어간다.
남송은 풍부한 강남의 경제력에 의해 1세기를 더 생명을 연장하지만, 결국 금나라나 송나라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북송을 멸망에 이르게 한
정강의 변(靖康의 變 : 1126∼1127)
출처 : 이영민
송나라와 금나라가 '해상의 맹약'에 따라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실상 송나라로써는 이렇다 할 전공이 없었다. 때문에 금나라는 만리장성을 국경으로 정한다는 당초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담판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금의 태조 아골타는 맹약을 지키기로 하고 연경을 반환하게 된다. 대신 비어있는 성으로 인도할 것과 매년 은 20만냥, 비단 20만필 외에 연경 특별세 1백만 관전을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1123년 4월 금나라 군사는 연경에서 완전 철수하며 성내의 모든 재화와 주민들까지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송나라에게 돌아온 연경은 그야말로 폐허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송나라 조야에서는 200여년 만에 연운 16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연경과 그 주변의 6주를 반환받은데 대한 기쁨으로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금나라의 연경 철병 직후 금의 태조가 죽고 그의 동생이 뒤를 이으니 바로 금의 태종이다. 금의 태조는 맹약에 충실했으나 송나라의 도의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는 휘종과 같은 정치에 무관심한 황제 밑에 채경, 동관 등의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금나라와 약속한 세공과 특별세의 제공도 원활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라 천조제는 음산에 숨어 서하와의 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연운 16주의 나머지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극비리에 천조제와 연락하여 요나라와 동맹을 맺어 금나라로부터 서경을 탈환하고자 획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의 선화7년(1125년) 천조제가 금나라 군사에게 체포되고 그때 송나라에서 보낸 극비 문서가 발견되면서 송나라의 배신 행위에 대한 금나라의 노여움은 마침내 송나라를 유린하는 도화선이 된다.
송의 선화7년(1125) 11월 금나라는 군사를 몰아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다. 금나라 군사의 선봉 부대가 지척에 다달았다는 보고를 들은 송나라의 휘종은 황태자에게 제위를 선양하고 수도를 떠나 박주로 갔다가 다시 건강으로 탈출한다. 이렇게 해서 황태자 조항이 흠종으로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강으로 고친다.
수도 개봉에서는 휘종과 그의 총신 채경, 동관 등이 탈출했다는 소문을 듣자 백성들은 그들의 폭정을 규탄하였으며 태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대표인 진동 등도 채경, 동관 등 6명에 대한 처형을 요구하는 상주문을 발표함으로서 수도는 백성들의 분노로 가득하게 된다. 이에 흠종은 조서를 내려 채경 등의 처벌을 약속한다. 백성들은 멸망 직전의 송나라를 구출할 결의를 다졌으나 겁이 많은 흠종은 수도에서 도망칠 생각만 하였다. 흠종이 수레를 타고 도망치려 하는 순간 대신 이강이 달려와 수레를 호위하는 친위군들을 선동하여 도성을 사수하게끔 만든다. 이로 인해 흠종은 도성에 남게 된다.
이 때 금나라 군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송군 결사대의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이강은 금군의 재공격에 대비해 성의 수비를 철저히 하였으나 이러는 동안 흠종을 비롯한 강화파들은 금나라 진지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다. 금나라는 황금 5백만냥, 백은 5천만냥, 비단 1백만필, 우마 1만마리, 그리고 태원, 중산, 하간의 3진을 금나라에 바칠 것과 송나라 황제는 금나라 황제를 백부로 받든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내세웠으나 이런 조건들을 모두 수락하기로 한다.
이렇게 강화가 진행되는 동안 송나라의 노장 종사도가 하북, 하동의 원군을 거느리고 달려왔는데 자칭 1백만이라 하였으나 실상은 20여만이었다. 하지만 금나라의 6만 군사와 비교하면 훨씬 많은 병력이었다. 금나라 진영에서는 이강과 종사도의 존재를 두려워하여 위축되었으나 송의 흠종은 금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이강을 해직시킨다.
강화파의 이같은 행동은 조야의 거센 반발을 몰고 왔으며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사태의 확대를 두려워한 흠종은 이강을 다시 기용하게 된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간파한 금나라는 슬슬 꽁무니를 빼고 철병하게 된다. 평온을 되찾자 이강 등 주전파의 대신과 장군들은 쫓겨나고 대신 강화파들이 득세하여 천하태평으로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흠종은 강남으로 탈출해 있던 휘종을 도성으로 모셔온다. 이는 휘종이 강남에서 왕조를 세우고 복위한다는 소문 때문에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개월후 진용을 정비한 금나라는 다시 송나라 수도 개봉을 향해 진격해 왔고 전혀 대비책이 없었던 흠종은 곽경이 신병(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병사)에게 맡기어 금나라를 물리치겠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성을 지키고 있던 장병들을 모두 철수시킨 후 성문을 활짝 열어놓도록 명령한다. 결국 금나라 군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개봉에 입성한다.
흠종과 태상항 휘종은 친히 금나라 진영에 나아가 포로가 되었으며 송나라가 160년에 걸쳐 모은 금은보화, 옥새, 도서, 진귀품, 의장 등을 비롯하여 황족, 고급관료, 그들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기술자, 예술가 등 수천 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다. 연행되어 간 휘종과 흠종은 금의 태종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 흠종에게 중혼후의 칭호를 내린다. 칭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두 황제가 얼마나 혼미한 황제였는지를 알 수 있다.
▲ 금나라에게 치욕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이런 치욕적인 수모는 역사상 길이 씻을 수 없는 송나라의 모욕이었다. 하지만 사태의 진상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조정의 관리들은 황제가 북쪽으로 사냥을 나간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사실은 송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것 이지만 이를 '정강의 난'이라는 허황된 말로 얼버무렸다. 이렇게 해서 요나라와 송나라는 잇달아 멸망하고 흠종의 동생 강왕 조구가 강남의 임안을 수도로 정하고 송나라를 이으니 이를 남송이라 하고 남송 이전의 송나라를 북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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