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배달한국(BC3898)

7. 환웅 배달국 홍산문화 bc3898~bc2333

자연정화 2013. 7. 31. 16:51

환웅 배달국 홍산문화 bc3898~bc2333



환웅은 기마 목축 민족으로서 태양을 숭상하고 각종 새를 숭상하며, 또한 구려문화의 전통가치인 용과 거북 등을 숭상했다.

 

태양에 사는 새인 삼족오三足烏(태양 흑점의 형상)와 부엉이나 매 등 여러 새를 숭상했는데 새를 영혼의 전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용으로 대표되는 토착적 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었던 태양의 문화, 불의 문화가 융화되어지는 것이 환웅시대다.

 


1. 환웅시대 개설


고고학계에서는 홍산문화를 대략 bc3500년부터라고 알려져왔는데, 우리나라 고기록에의하여 단군시대와 환웅시대를 더하면 bc3898년이 된다.


안함로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웅씨는 천신의 부름을 받들어 백산, 흑수지간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여정을 뚫고 청구 땅에 궁지를 구획하였다...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고 신시에 도읍하였다.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 白山 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 於靑邱. .......立都神市 國號倍達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는 <삼성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다. 뒤에 청구국으로 수도를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倍達 桓雄定有天下之號也 其所都曰神市 後徙靑邱國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1세 환웅은 거발한居發桓,
2세 환웅은 거불리居佛理,3세 환웅은 우야고右耶古,4세 환웅은 모사라慕士羅,5세 환웅은 태우의太虞儀,6세 환웅은 다의발多儀發 ,7세 환웅은 거련居連,8세 환웅은 안부련安夫連,9세 환웅은 양운養雲,10세 환웅은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11세 환웅은 거야발居耶發,12세 환웅은 주무신州武愼,13세 환웅은 사와라斯瓦羅,14세 환웅은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청구국으로 옮겼다. 徒都靑邱國,15세 환웅은 치액특蚩額特,16세 환웅은 축다세祝多世,17세 환웅은 혁다세赫多世,18세 환웅은 거불단居弗檀 등이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신시역대기>로 보면 1세 환웅은 먼저 백산과 흑수 사이의 청구에 내려와 천평에 도읍하고, 환인국을 점령하여 신시에서 개천하고, 그후 다시 청구로 되돌아와 18세를 전하였다. 15세 치우환웅에 이르러서는 청구국이라는 이름으로 산동반도 용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따라서 환웅 18분 중에 4분은 중국에 있게 된다.

 

환웅이 3000인을 거느리고 서요하로 들어와서는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서쪽으로 나가는 난하 이외에도 대광정자산에서 북쪽으로 서요하의 가지인 백분하百汾河가 발원하여 케스케덴克什克腾旗을 지나고, 대광정자산에서 동쪽으로는 등롱하燈籠河가 발원하여 옹고트翁牛特旗를 지나고, 동남쪽으로는 음하陰河가 발원하여 적봉시 홍산紅山을 지나는데, 난하를 뺀 나머지 모두는 다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모여서 옹고트를 남과 북으로 각각 지나면 서요하로 합친다.

 

[요사지리지고遼史地理志考]에 의하면 옛 요락수饒樂水인 지금의 영금하英金河가 하북성 위장(圍場 =하북성 위장현)의 도태산都呼岱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도태산이 곧 대광정자산이고 환웅의 태백산이다. 도태산徒太山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도 하였다.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에서 태백산太白山은 비서갑斐西岬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또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인데 천왕이 순수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후 웅녀군熊女君이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대일왕大日王은 웅녀군과 대비되는데 대일왕을 지명으로 찾아보면 오늘날의 대일한산(大日罕-山, 達爾汗山)을 의미한다. 케스케덴 서부 지역 달라이누얼, 즉 달일호수達爾湖水변의 화산火山이다. dalihu라고도 한다.

 

태백산 비서갑은 대일왕의 대일한산이고, 달리호수에 의해서 비서갑의 하백여신河伯女神이 있었다.

 

 

백두산은 bc180년 전후에 폭발하여 오늘 같은 칼데라 호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 현재의 백두산 칼데라호수는 서기1000년 전후에 만들어 졌고 발해 멸망 원인과도 관련 없다. 환인, 환웅, 단군 시대 백두산은 역사의 변방이다. 2세기에 기록된 [산해경山海經]에서 대황북경大荒北經 중에 숙신국肅慎氏之國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있다고 하였다. 숙신씨는 천산에서 bc2300년경에 장춘으로 이동하였고 그때 불함산이라는 이름도 같이 옮긴 것이다.

 

환웅의 첫 수도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백산은 대광정자산이었고 흑수는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로서 마우산馬盂山(=1729m)에서 발원한다. 마우산은 옛 우이산隅夷山이면서 고대에는 흑산黑山이어서 흑수黑水라고 하였을 것이다. 흑수는 뒤에 도하都河와 토하土河를 거쳐 노로하老魯河라고 불리게 되는데 노로하는 나라하, 즉 낙랑하에서 비롯된 말이다. 환웅의 배달국은 백산의 물과 흑산의 물이 만나는 적봉시 동북에 있었던 것이다.

 

 

적봉시 홍산紅山의 동북쪽 동팔가석성東八家石城은 신석기시대에 출현한 석성石城으로서 남북이 160m, 동서가 140m인데 불규칙한 장방형 모양이다.

 

적봉시 녕성현에서는 팔가八家를 몽고말로 보리가“布日嘎”라고 이중으로 표기했다. 즉 팔가는 팔씨네 집이 아니고 보리가의 음독을 비교하여서 “발가”라는 우리말의 차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석성의 석石까지 당겨서 읽으면 발가달성이 된다. 즉 밝달성, 배달성이다.

 

주위에는 신정新井, 상정上井, 삼안정三眼井, 동삼안정東三眼井, 동신정東新井 이도정二道井 삼도정三道井 사도정四道井 등 정井자 지명이 매우 많으니, 환웅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만들어 자정子井, 여정女井 등을 획정劃井하고 3000인을 살게 한 것이다.


물이 성읍 건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확실하게 농업 위주 문명 시대인 것을 의미한다.

 

동팔가석성을 지나는 물이름은 대광정자산의 음하陰河에서 비롯되는 영금하英金河다. 음하나 영금하는 둘 다 우리말 임금과 관련되는 임금하의 차자다. 음하를 중국 발음대로 “인하”로 읽으면 인금하의 인하가 되는 것이다. 음하 상류 삼좌점三座店 부근에 청동기 시대 석성이 20여좌, 왕가점王家店 부근에 5좌, 초두랑진初頭郞鎭 부근에 12개좌 석성이 있다. 그중에 지가영자池家營子 석성이 최대의 원형석성으로서 면적이 약 10만㎡다.(지름 350m?)

 

영금하를 후대에는 요락수饒樂水라고도 하고 또 낙수樂水라고도 했다.

 

적봉시 북쪽 영금하 변에는 “지주산蜘蛛山”이라는 홍산문화 유적지도 있다. 지주산은 우리말로 거미산이고 이는 고미산, 곰의산, 즉 곰산이 어원이다. 부여어 계통인 일본말로는 신神이 “가미”라서 고미산을 신산神山으로 볼 수 있다. 곰산의 또 다른 차자는 금산金山이다. 백제 웅진성의 곰강이 금강錦江으로 쓰인 것이다. 영금산은 즉 잉곰산이었다. 영금하의 또다른 상류 가지는 고도하古都河라고 한다. 즉 영금하, 임금하와 마찬가지로 도하都河 역시 영금하가 고대 도읍지의 물인 것을 의미한다. 도하都河가 후에 토하土河로 바뀌었다.

 

고도하古都河 부근 서도촌西道村 강변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점장대点將臺 유적이 외롭게 남아있다. 그 서쪽에는 판축토성版築土城인 송주성松州城(1000m x 500m)이 남아있다. 당나라가 거란에 설치했던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도하都河는 송강松江, 또는 송산하松山河라고도 불렀다.

 

적봉 남쪽에 팔리포八里浦가 있는데, 적봉이나 홍산은 우리말로 “붉은달”이며 “밝달”이고, 팔리포는 “밝성”의 “밝”포로 고려된다. 적봉 동쪽의 우미려하 동고성에도 고구려 성의 흔적인 점장대가 남아 있다.

 

서요하의 남쪽 발원지인 흑리하黑里河(=노하老河의 최상류)가 흐르는 영성현寧城縣 팔리한진八里罕鎭의 팔리한하八里罕河를 보면 “팔리한”은 발한發桓의 차음借音이다. 간혹 파이한巴爾罕으로도 기록하니 역시 발한의 차음이다. (팔리의 리里를 앞글자의 받침으로 보는 것은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 기록에서 몽골을 몽고리蒙古里로 기록한 것이나 똑같은 경우다. 비서갑 달리한성의 리도 마찬가지다.)

 

1세 환웅의 이름이 거발한居發桓인데,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고국천에 묻힌 것처럼 거발한 환웅은 발한하發桓河, 즉 팔리한하에 묻혔을 것이다. 즉 발한성에 묻힌 것인데 이는 영성현의 남산근 유적지와 관련된다. 환웅시대 첫 도읍 청구국 천평성인 동팔가달성과 거발한 환웅이 묻힌 팔리한진 발한성의 거리는 120km내외다.

 

종합하면 환웅 세력은 천산의 신시로부터 태백산의 청구 땅 배달국으로 내려온 세력이며 예족을 구축하고웅족으로 대신하였다. 마늘과 쑥으로 은유되는 대기근이 웅족의 남진을 초래하였을 것인데, 배서갑은 해발1000m의 고지고, 적봉은 해발500m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