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배달한국(BC3898)

8. 환웅 배달국 신시 아사달의 고증

자연정화 2013. 7. 31. 16:52

신시 아사달의 고증

 

배달국 신시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천제와 즉위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신인 왕검王儉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수도는 백주白州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했다.

극시극등기克什克腾旗(=케스케덴)의 아시하도阿斯哈图(=2029m)는 흥안령산맥의 남쪽 최고 봉우리로서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또한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동남쪽 천산진의 천산天山(=685m, )도 요나라때 목엽산이었다.

물론 단군 왕검의 수도였던 요녕성 창무彰武시 위가자 아래에도 무엽산葉茂臺의 흔적인 엽무대가 있다.

[단기고사]에서 3세 단군 가륵嘉勒이 동생 가록嘉祿을 신시 아사달에 책봉하고, 사달왕斯達王이라고 불렀다. 이후 진번후眞番候라고도 하였다.

 

왕검의 손자 가록왕으로 비롯되는 “가록산嘉鹿山”이 요나라 때 왕족 야율습열耶律習涅 묘지墓志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고증되었다.

가록산은 지금의 소한산小罕山(=1497m)인데, 파림좌기巴林左旗와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사이에 있다. 지도에 표시된 천산의 동북에 있고 지도에 표시된 신시의 서북쪽에 있다.

 

따라서 가록산의 아래인 아로과이심기의 천산진天山鎭(=지도에서 신시)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치러 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엽산木葉山이며, 이 천산진 아래는 백성자白城子가 있으니 신시라고 부르던 백악산 아사달의 흔적이고 또 사달왕과 관계될 수 있는 시달목 소목柴達木-蘇木도 있다. 만주말 시달목을 한어로 번역하면 백락白濼이라 한다. 백락은 흰 물이며 동시에 밝다는 뜻의 대웅大熊으로 보면 환웅산이 된다.

 

대웅大熊을 몽고어로 파라이巴賴라고 한다. 우리말로 빛을 낸다는 의미의 “밝”이다. 백락도 대웅도 곧 우리말 밝을 의미한다. 현재지명의 파림기도 대웅에서 유래된 것이다.

 

 

환웅의 신시 아사달 위치와 성터, 백악산 아사달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해모수 북부여 성터가 있다

 

백성자를 요나라는 영주永州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경도 영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주 목엽산에는 거란시조 기수가한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인이 백마를 타고 마우산(지도의 흑산)에서 토하를 따라 내려오고 천녀가 푸른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평지송림에서 황하潢河를 따라 내려와서 목엽산에 이르러 토하와 황하 두 강이 만나니 서로 결합하여 8명의 아들을 낳아서 8부를 두었다. 有木葉山,上建契丹始祖廟,奇首可汗在南廟,可敦在北廟 繪塑二聖並八子神像。相傳有神人乘白馬,自馬盂山浮土河而東,有天女駕青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葉山,二水合流,相遇爲配偶,生八子。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

 

마우산馬盂山은 요나라 야율종耶律琮과 진진대장공주秦晉大長公主 묘지 발굴로 인하여 확증되었는데 팔리한 고성 서남쪽의 서요하 발원지인 마우산으로서 높이는 1729m이다. 즉 신인神人은 신시를 세운 환웅인데, 토하를 따라 말을 타고 가서 천녀, 즉 웅녀를 만나서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황수는 거란 상경임황부의 물로서 상경 동쪽을 흐르는 물이다. 이는 소한산, 즉 가록산의 동쪽에서 비롯되며 지금은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淪河라고 한다. 평지송림은 상경의 동쪽 40리 지점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곳으로 호교胡嶠의 [함요기陷遼記, 946~953년]에 기록되었다.

 

거란 8부족을 만든 거란 시조로 추앙되는 기수가한奇首可汗이 언제 때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가돈, 즉 천녀의 묘가 기수가한의 묘보다 북쪽인 것으로 보아서 우하량 유적지처럼 여제사장이 있던 모계사회 시대 전설로 고려된다.

 

가한이라는 말의 최고 기록은 <번한세가>의 2대 번한 낭사가 세운 가한성可汗城이다. 여기서 가한은 단군 아래로 보이지만 처음부터 아래는 아니다.

 

거란족은 북부여의 패망 이후 천년 이상 역사를 잃어버렸고, 신인 환웅의 사당을 다시 발견해서는 그들이 아는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신인을 기수라 하고 환웅을 가한이라고 호칭했을 수 있다. 고구려가 5부, 부여가 6가제였는데 단군시대는 [규원사화] 기록에서 호가, 마가, 우가, 웅가, 응가, 노가, 학가, 구가 등 8가제다. <신시본기>에서 8괘를 만들어 복희역을 만든 복희가 태어난 곳이 신시라고 하는데 이 천산진 북쪽 부하문화 유적지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그 복골이야말로 복희역의 출발점인 것이다.

 

요나라 때 이 목엽산에서 요나라 황제와 황후가 직접 절하고 천제天際를 지냈다. [요사-예지]에, 이 천산의 목엽산 한가운데에 왕이 되는 군왕수를 동쪽으로 향해서 중앙에 심고 그 아래에는 신하 나무를 조례 하듯이 세우고 군왕수 뒤에는 배우목으로 두 나무를 심고 이를 신문神門이라고 불렀다.

 

신문神門은 신목神木, 즉 신단수神檀樹다.

祭山儀:設天神、地祗位於木葉山,東鄉;中立君樹,前植群樹,以像朝班;又偶植二樹,以爲神門。

 

황제 황후가 이르러서 백마, 흑소, 백양을 잡는데 복신이 기를 흔들고 북을 울리며 희생을 잡고 신단수에 매어단다. 皇帝、皇后至,夷離畢具禮儀。牲用赭白馬、玄牛、赤白羊,皆牡。僕臣曰旗鼓拽刺,殺牲,體割,懸之君樹。

 

무당이 술을 붓고...황제, 황후가 와서 군왕목 앞에서 하마하고 남단에 올라 어탑좌에 앉는다. 이하 생략

太巫以酒酹牲。禮官曰敵烈麻都,奏「儀辦」。皇帝服金文金冠,白綾袍,絳帶,懸魚,三山絳垂,飾犀玉刀錯,絡縫烏靴。皇后御絳溗,絡縫紅袍,懸玉珮,雙結帕,絡縫烏靴。皇帝、皇后御鞍馬。群臣在南,命婦在北,服從各部旗幟之色以從。皇帝、皇后至君樹前下馬,升南壇御塌坐。下略


이제 1) 단군 가륵의 동생 사달왕 가록의 가록산의 고증과 가록왕의 신시 아사달,

2)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백주 목엽산,

3) 옛 백성자에 남아있는 환웅과 웅녀의 만남 전설 등과 더불어,

4)목엽산에서 행해졌던 신단수 제사법의 유일한 기록에 의해서 1세 거발한 환웅과 단군 왕검의 개천 도읍 신시는 아로과이심기 천산진남쪽 백성자로 확정된다.

 

거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로 옮겨갔다.

 

그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환웅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웅녀와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조차도 환웅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곳에 살던 기존의 예穢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3세 단군 가륵은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신시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배달유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신지 고글契의 후손은 바로 글안契丹, 즉 거란족이다. 배달국 신시가 거란족 요나라의 발생지인 것은 이런 연유다. 신시의 신단수 제례 풍습을 시행하고 또 기록하여 남겨두기도 했다. 마한 풍속에서도 대목大木에 방울을 걸어서 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며 우리말로 “밝”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대웅이 한웅桓熊(⇀桓雄)이고 훈이 밝인데 신시였던 천산의 백성자를 의미한다. 그 동남쪽 시달목 소목의 시달목柴達木은 몽고어로서 본래는 박락白濼(蒙名 柴達木)이라 하는데 파라巴賴와 같다.

 

환웅 전설속의 신단목神檀木이 시달목柴達木으로 기록된 것으로 고려되는데 시달은 마고 전설의 실달實達성과도 관련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 조선의 수도 백주 무엽산은 바로 여기 천산진이다.

 

한편 단군 이후 거란족의 역사 기록이 천년이나 끊겨서, 거란족이 다시 거란국 역사를 편찬할 때는 조상의 신성한 만남이 이름도 잘 모르는 전설이 되어, 환웅-웅녀의 기록이 빠져버렸다. 그 대신에 중국 역사를 빌려다가 [요사-영위지] 앞머리를 만드니 거란 스스로 제 조상인 치우천황을 작란作亂한 인물로 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