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배달한국(BC3898)

9. 환웅 배달국 홍산 유적지

자연정화 2013. 7. 31. 16:53

홍산 유적지

 

1) 나리사대 유적지

 

가록산(소한산)의 서쪽 한산罕山(=1936m) 또는 새한산賽罕山은 흑산이라고도 했는데, 소한산의 서쪽 골은 흑수黑水라고 했으며 이 흑수가 서요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리사대那日斯臺 유적지가 있다. 나리사대문화 유적지에서는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石刀도 등장한다.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그림 15 참조)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첨가 기법으로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나리사대 문화의 가장 주요한 발굴로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투구 재료가 청동인지 코뿔소 가죽인지 알 수 없다.)를 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 형태로 가리고 머리 위에는 3층의 족두리 장식을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石獸像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아래 그림)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 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환웅-웅녀, 곰 조각상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옥기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그림 16 참조)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2)우하량유적지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림 참조)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유적지는 유적지의 분포가 넓고 많다.우하량 유적지는 20여개 지점이며 그중에 5개 지점의 적석총군이 대표적이다.적석총 2지점은 150 x 80m 규모다. 2지점의 제단은 3층 원형의 돌제단이며,4기의 춘추시대 적석총과 여러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3지점은 2지점의 북쪽 200m 거리에 있는데 적석총 1기와 8개의 석곽묘가 있다.적석총 5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서쪽 882m 지점이고 2기의 적석총과 발굴하지 않은 석곽묘가 있다. 4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577m이다. 미발굴이다. 또한 3지점 1000m 북쪽에는 여신묘(女神墓) 건축유적이 있고 여신묘 북쪽에 규모가 작은 적석총 6지점, 7지점, 8지점, 9지점이 있다. 5지점 남쪽에는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는 직경 100m의 3층 원형 토단(土壇)이 있다.

 

우하량은 홍산문화의 보통 석곽묘(石槨墓)제에 더하여 최초로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산릉(山陵)을 쌓았다.

여신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과 여제사장으로서의 웅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신의 두상에는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그외 작은 여신상, 생육여신 (生肉女神)상도 있다.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금자탑(金子塔)은 3층의 대형토돈(大型土墩)으로서 윗층은 반경 40m이고 하층 외곽은 반경 60 - 100m에 이르는데 각층마다 8-1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중앙을 흙으로 채웠다. (약 bc. 1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자탑은 중국 동남해안, 양자강 하류와 태호(太湖) 부근의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제단 및 옥기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양저문화는 치우 청구국의 산동반도 이주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옥기가 번성한 문화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

 

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객좌현(客左縣)에서도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객좌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의 흥륭장향 장경여자촌 대릉하 서안의 동산취 후량 정상부에서 네모난 돌을 쌓아올린 돌담벽과 쌍두룡 옥황 , 녹송석 조각 새 등 장식과 형체특이적 채도기가 대량 발굴되었다.


유적지 남부에서 직경 8m의 원형제단이 발굴되었다. 제단 주변은 석판을 대고 안에는 크고 작은 돌을 덮어 쌓았다. 즉 , 북부는 네모 방형이고 남부는 원형이니 전방후원 고분에 대응된다. 탄소측정 연대는 대략 5000년전이다.


여성나체 임부조각상, 대형임신부좌성이 발굴되어 생육신상이라 한다.
그외 타격석기, 돌도끼, 세석기, 뼈화살촉 등이 나오고 홍도편, 채도편, 흑도편, 지자문 위주 질그룻이 많았다.

 

3)부하구 유적지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동이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4. 홍산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소위 빗살무늬 도자기 시대였던 선 홍산문화인 예맥시대의 단순 기하문의 질박한 회색, 혹은 황색 토기에서, 홍색 토기에 검은 무늬의 새로운 문화 세력이 이입된 것이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 네 번째 특징은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 번째 특징은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 암각화 모음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이 도래한 홍산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