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08. 義渠王國의 滅亡과 秦나라의 일어남

자연정화 2013. 8. 24. 12:10

八. 義渠王國의 滅亡과 秦나라의 일어남
 

옛날 중원 서북에 위치한 진나라는 주나라가 중원의 종주국으로 위세를 떨칠 적에 주를 섬겨도 오랑캐 대접을 하고 열국 모임에도 소외되었다. 周나라가 쇠하고 열국이 쟁패하는 속에서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그러나 진과 인접한 조선제국의 열후인 담임 누번 의거 三국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조선제국이 쇠퇴하여 열후가 분리하니 각자 자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중 義渠王國은 심히 强盛하여 중원열국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국으로 大兵을 보유하고 궁궐은 그 규모가 주나라에 비등하였다. 진은 항상 의거王국과의 선린에 힘써 왔다. 선왕은 여러 비빈과의 사이에 남자 아이만도 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선태후의 아들 太子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이 죽고 그 아우가 병권을 잡고 太子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하여 成王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태후가 의거왕과 사통하여 의거왕이 애호하니 성왕은 義渠王이 두려워 태후를 홀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태후는 내심 자기 아들의 실각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우 成王이 王位를 잇고 先王妃는 太后에 봉하여 선태후라 하였던 것이다. 선태후는 여전히 정사에 관여하였다. 선태후는 의거王과의 외교에도 직접 참견하여 의거王과 눈이 맞았다. 의거王은 전부터 선태후의 뛰어난 미색에 황홀하였으나 청춘 과부가 된 선태후와 서슴없이 사랑에 빠졌다. 선태후와 成王은 의거王이 진나라를 침략할까 두려워 정략적으로 유인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의거王은 선태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얻어 더욱 사랑에 침적하였다. 선태후는 서읍(西읍)족 특유의 눈이 깊고 크고 백옥 같이 희고 맑은 얼굴에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성왕은 형수를 의거王에게 바치고 진나라를 보전코자 한 것인데 형수가 두 아이를 낳고 의거王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 장차 의거왕과 합작하여 진나라를 동이족에 넘겨주고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공산이 커졌다.

 

성왕은 비밀히 심복 臣僚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였다. 성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었다. 과인이 兄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정무를 전담하지 못하고 있음은 제공이 아는 바와 같거니와 지금 태후가 의거王의 총애를 받아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음으로 국가의 안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자칫 태후의 뜻을 거스르면 의거왕의 노여움을 살 것인바 우리가 비록 강력하나 의거왕의 동이국에 미치지 못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지 의견들 듣고자 하노라 하였다. 장사가 말하였다 " 소신이 오래 전부터 이 일을 걱정하고 궁리하여 왔습니다. 이제 大王께서 이 문제를 물으시니 때가 왔습이옵니다. 지금 태후께서 국사에 집념 한다 하여도 國事에 도움이 되지 아니 하옵니다. 마땅히 제거하고 의거왕국을 멸하여 후환을 일거에 해결함이 옳을 것이오니 여차 여차 하오면 기필코 성공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의논을 정하고 태후의 생일을 맞아 대연을 배설하고 의거王을 청하였다. 의거王은 태후와 함께 대취하여 침실에 들고 수행 종자 호위병사도 별도히 주연을 배설하고 취하여 잠이 든 후 成王은 命을 내렸다. 수문장은 굳게 지키고 절대로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양국 국경을 굳게 경계하여 왕래를 끊은 후 의거왕의 침실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경호병을 남김없이 처치하였다. 의거왕은 당초에는 비상시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대비를 하였으나 왕래가 거듭되고 아무런 적대 감정이 없음으로 안심하고 경계를 늦추었다가 해를 입었다. 사자를 의거王宮에 보내어 방심케 한 후 一지군을 이끌고 왕궁을 급습하여 점령한 후 왕의 一族과 백관을 진살하였다. 선태후는 비록 의거왕과 사랑에 빠졌으나 역시 진족의 망국을 그대로 볼 수는 없었다. 의거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죽이면서 진이 의거 왕국을 병탐하는 계략에 협조하였다. 시동생 成王으로부터 다음 세대 王位를 자기 아들에게 돌려준다는 약속은 물론 실천되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진태조 비자(非子)이래 十二代에 이르러 진나라는 중원 西北지역에서 동이족을 누르고 강력한 민족으로 부상하여 후세에 진시왕의 天下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하고 주나라 말기에 힘으로써 중원 열후에 끼여드는 원동력이 생겼다.절세미인은 나라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묘미를 가짐으로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영웅은 미색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현사는 책을 멀리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의거왕은 결국 진왕의 계교에 말려 패망하였다.

 

이리하여 진은 동북의 동이족 내란으로 마음놓고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여 세를 확장하여 呂政(여정)시대에 이르러 六국을 정벌하고 중원을 통일한 후 북변 연나라를 순방하여 상군에 이르러 연인 여생을 시켜 바다에서 구해 온 신서도록(神書圖錄)에 장차 진나라를 망할 자는 호라고 하였으니 동북의 조선족의 내란이 그치면 진이 점령한 중원 동북 지방에서 조선 제국과의 대전을 우려하던 중이라 때를 놓칠세라 화급히 大軍을 동원하여 몽활장군으로 하여금 三十만군을 거느리고 하남땅을 공격하게 하고 중군을 친히 거느리고 병참을 관리하며 독전하니 제장이 공을 다투어 진격함에 하남의 동이국이 본국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외로이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궤(敗潰)하였다. (始皇巡北邊從上郡人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秦錄圖曰亡秦者胡也始皇乃使將軍蒙活發兵三十萬人北擊略取河南地史漢一統)

 

이와 같이 진시왕은 六國을 정복하여 한족의 주나라를 멸하고 산동,하북,하남의 동이 조선 제국의 영지까지 점령하여 산동,하북에 공지를 설정하고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안심할 수 없어 흉노와 조선을 막는 만리장성을 동서에 걸쳐 쌓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백성의 피폐로 민심을 잃고 장성 축조에 공을 세운 몽활도 몰살당하였다. 진시왕 정은 무도한 폭군으로 그의 무단(武斷)정치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이 주왕조는 중화로 진나라는 미개국으로 비유한다 하여 굴을 파서 생매장하고 서적들을 모조리 거두어 불살라 버렸다. 이것을 후세 사가는 갱유분서라고 하였다. 진왕은 중원을 통일하고 마음이 방자하여 가라대 내가 六국을 정벌하여 열국의 왕이 되었으니 마땅히 명칭이 달라야 될 것 아니냐 하였다. 좌우 아뢰기를 조선국왕이 천제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이라 칭하니 대왕께서도 이제 중원을 통일하여 전무한 대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마땅히 황제라 칭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진황제가 된 政은 그의 영화를 영구히 누리고자 일찍이 들려 온 불로초를 구하고자 동북 국경에 순행하니 제인 서시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삼신산(朝鮮半島)이 있고 이름하여 봉내방장의 영주땅이온데 선인(신선에 비할 만한 도사)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구하여 정성으로 바치면 얻을 것이옵니다 하여 때에 동남동녀 천명을 구하여 서시가 바다로 들어가 선인에게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海中有三神山名曰逢萊方丈洲遷人居之靑得齊戒童男童女數千入海求遷人弗得) 이 무렵 중원에 알려진 지금의 한반도는 해중에 있는 섬으로 산고 수려한 험지로 사람이 극히 드물고 신선이 불로초(山蔘)을 캐서 먹고사는 신선이 사는 곳인데 난리통에 燕이 망하고 거기 살던 동이족의 일부가 조선반도에 바다를 건너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전설에 진시왕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을 三신산에 보냈는데 그들은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죽을 것임으로 금강산 三신산 逢萊方丈에 불로초를 구하러 갔다가 신선을 만나지 못하고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였음에 숨어살다가 진시왕이 찾을까 두려워 왜국으로 갔다 하고 그곳은 대마도인데 조선에서 그곳으로 간 신인이 땅을 잡아 당겨 조선 반도에서 떨어져 나가서 섬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때 진시왕이 구하는 불로초는 천년 묵은 산삼으로서 산삼이 천년을 묵으면 동삼이라 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생겨 움직인다 하여 동삼이라 하였고 신선의 눈에만 띄어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 하여 불로초라 하였다. 당시 장백산, 태백산, 금강산 등지에 산삼을 캐 먹고사는 신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진시왕이 수만 금을 쏟고도 불로초 아닌 산삼도 구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포악한 진시왕이 오래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일까? 진시왕의 중원 통일은 차 시대 중원 한나라가 그대로 통일된 중원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고 동이는 중원에서 영토를 잃고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시대 진시왕의 출현은 東方제국의 수난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진나라는 극히 미개한 종족으로 진시왕정의 二十一대조이자 진나라 중흥을 이룬 목공(穆公)도 견술女(犬戌)의 자식이다라고 했으니 당시의 중원 서북은 동이, 흉노, 터키, 헝가리, 몽고, 지나 등 여러 민족이 혼거한 지역이니 이들이 장기同住함으로써 진나라 종족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사람은 용맹한 기세가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잘 선도하면 일어나기 쉬우며 인의 돈독하고 굳세고 과감한 자질이 있어 군사와 농사에 번성한 강토를 이름으로 산동제국(동이국)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秦人俗大低尙氣?先勇力忘生輕死故見於詩…善導之則易興起而篤於仁義以猛驅之則其强毅果敢之資亦足以强兵亦農而…) 주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유왕(유왕)은 그의 황음무도한 난행으로 진(秦)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열국의 구원군도 참전할 기회가 없었다. 周나라를 정복한 진은 주나라의 유王을 포로하여 여산에 수용하였다가 결국 주나라 국민 학대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였다. 그러나, 주나라 국민은 유王의 포악한 정치로 고통받고 나라가 망하였으나 비록 폭군이라도 오랑캐 나라의 손에 죽었다고 하니 온 국민이 분노하였다. 한족의 민족주의 사상은 이와 같이 철저하였다. 그리고, 천지 대변이고 중국의 수치며 주나라 신하의 큰 원수라 하였다. (王而沒於夷狄天地大變中國之大恥東周臣子之大讐也 『詩傳』)
 

훗날 진족은 완전 한족화 하였다.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것은 周나라의 부패로 중원의 열후가 모두 칭王하고 다투는 틈에 뜻밖에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