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 秦始王의 횡포와 연나라의 멸망
한편 진시왕은 이미 중원열국을 정벌하였으나 한족은 깊이 진족을 멸시하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주왕이 황음무도하여 나라가 亡하였으나 유王이 진나라 사람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하여 오랑캐에게 한족의 왕이 죽었다고 천지 대변이라 하여 깊은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왕은 그 세가 강대하여 능히 백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이 백으로 헤아릴 수 있는 세력이니 당시 연이 비록 강하나 진시왕은 능히 정복할 수 있음에도 유일하게 남은 연나라 征服을 중지 한 것은 연은 다른 열국과는 달리 조선 제국의 열후이니 비록 분열 상태이기는 하나 급하면 조선 제국에 돌아가서 통합할 것이니 자칫하면 조선 제국과 충돌할 것임으로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는 아직도 강남 지역은 불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조선 제국과 충돌하여 장기전으로 陷入함은 큰 위험을 가져올 것임에 연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조선 제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조선 제국에 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浿水를 국경으로 하고 우북평에서 천진에 이르는 패수변을 공지로 비워 두어 양국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양국간 국경 충돌을 예방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제국의 황하 일대의 燕의 고지를 잃는 것은 단군의 故地를 잃는 결과이나 연이 분리하여 王을 칭하고 조선 제국과 맞서 오랜 세월 싸워 통일이 어려운 상황인데 연은 중원 고도를 이미 잃고 요동으로 후퇴하여도 항복할 뜻이 없었다. 그것은 연이 왕을 자칭하고 국토를 분열시켰으나 동족의 멸망을 보고 어찌 할 것인가 백성들의 희생을 어찌할 것인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秦이 연을 멸한 후 새로이 연후를 봉함에 있어 반드시 연인을 핍박하지 말 것을 전제로 진의 요청에 동의 한 것이라. 그리고 공지로 비워 두는 공지는 조선의 광역으로 인정하고 그 공지는 조선이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원北역과 東역의 조선 제후국들의 진나라에 대한 항거를 후원하지 아니 한다는 조건으로 상호 불가침조약을 하고 조선 황제는 진시왕을 도와 연을 공벌하였다 여기서 조선 제국은 연이라는 동족을 잃고 진시왕은 중원을 통일하였다. 조선은 열국 분립 시대여서 진시왕과의 쟁패를 피하고 산동 三十 여군을 진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여 진은 산동에 험색한 곳에 關을 수축하고 험쇠를 의지하여 갑병으로 국경을 수비하였다. (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書傳』) 서전에 의하면 이러한 국경선 너머 공지를 두어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였는데 한이 진을 멸한 후에도 그것을 유지해 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은 국경과 안쪽 河北省 南皮縣 東南八理 지점에 千龍城을 축조하고 패수 안쪽으로 공지를 따라 겹겹이 방위 진지를 구축하고 최정예 중병을 배치하여 조선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것은 진나라 주위에는 다만 강력한 동이족이 그들의 중원 동북 故土를 찾기 위해 침입할지 모를 것임으로 준비한 것이다. 秦은 二代에 자체 내분으로 亡하고 漢나라는 진나라가 처참한 싸움 끝에 이룩한 통일 중원을 그대로 넘겨받아 그 영토를 보전 확장함으로써 후세 중원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연나라등 동이족을 위시한 수十개 다수 민족으로 大변혁을 성취하였다. 진시왕이 몽활장군을 시켜 北녘의 적(조선과 흉노)을 공격하여 하남땅과 河南의 단군 제국의 四十四현을 약취하고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그 난폭한 군사 행동을 후세 사가는 비록 비난하였으나 종국에는 다행한 일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조선족은 포로가 되어 勞役에 동원되었다. 후한서에 진한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옛날 진나라에서 망한 사람들이 苦役을 피해서 조선 반도에 와서 땅을 갈라 주어 마한이라 하였는데 진나라 말과 닮아서 秦韓이라고도 하였다. (辰韓耆老自言秦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 진시황의 中原통일은 동이족에게 큰 타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후세 중국 사기는 진나라의 관계 역사를 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 왔다. 진은 한족에게 완전 동화하였음으로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中國而純乎人欲則化夷爲夷狄而知則天理則化爲中國秦本狄不得幽中國之會盟 『春秋』
중국의 깨끗하고 순수함이며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에 동화코자 함에 오랑캐도 중국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를 알면 중국인이 되는 것인 즉 진나라는 본시 오랑캐라 중국 열후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국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진시왕이 중원을 통일한 후 그 세가 天下에 진동하여 감히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였다. 진시왕이 韓나라를 멸한 후 韓나라에는 장자방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키에 이목이 수려한 귀공자 장량이 있었다. 그는 韓나라에 五代 공경을 지낸 가문이 멸망 당함으로서 진시왕을 죽이고자 절치 부심 하였다. 하루는 친구의 소개로 滄海 창해(요하서남)에 天下역사로 알려진 여홍성(黎洪星)을 만나기 위하여 친구와 함께 그를 창해로 찾아갔다. 韓나라는 동이족과 한족이 혼거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상호 친교도 많았다. 장량은 창해에 여홍성의 집에 가서 그를 찾아 인사를 나눈 후 진시왕을 죽일 계획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당시 조선 사람도 무도한 정벌(연나라)로 무수히 학살당하였음으로 적개심이 강함을 아는 고로 마음놓고 털어놓았다. 이르기를 진시왕이 연을 파하고 산동 하북의 동이족을 마구 학살하여 무수한 난민이 東으로 피난하였거니와 연왕으로 하여금 태자 단을 잡아 보내면 연을 멸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연을 멸하였으니 천지 원수라 진시왕을 죽이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존형을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이에 여홍성은 분연히 일어서며 말하기를 이일을 내가 해내리라 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난 후 말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나서 나라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조선족의 기상이라"하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니 그는 원래 괴력을 가진 역사라 양인은 굳게 다짐하고 날을 받아 하남성 양무현으로 향하였다. 출발에 즈음하여 요하 서안의 단군 묘를 참배하고 양무현 박랑사중에 농부를 가장하고 120斥의 철수를 습속에 숨겨 놓고 기다리던 중 진시왕의 행차가 어가를 타고 앞뒤로 무사가 삼엄하게 호위하고 지나가니 접근할 수 없어 三十보거리에서 크게 소리치며 달라붙어 철퇴를 날리니 진시왕은 혼비백산하고 시종 대신이 탄 부차가 맞아 산산조각 나고 시종이 여러명 죽었다.
이와 같이 진시왕에 대한 동이족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진시왕의 위세에 위축되어 있던 지나족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진시왕의 외모는 코가 높고 등등하며 눈이 길게 째져 매와 같이 매섭고 일에 임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품성이라고 한 통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순행이 형산남군에 이르러 대풍을 만나 행차를 중단하고 좌우가 이르기를 앞에 있는 상산 사신의 노함으로 인한 것이라 하였다. 시왕이 그 사당이 누구의 사당이뇨 하니 좌우 가로되 요 임금의 두딸이며 순인군의 왕비입니다 하였다. 진시왕은 이 말을 듣고 대노하고 즉시 죄수 三千명을 동원하여 그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벌목해 버리고 산상에 올라 그 길로 남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해석해 보자 그 사당의 신이 노하여 大풍이 일어났다면 고사를 지내고 도움을 비는 것이 진시왕의 관습으로 보아 당연한 것인데 진시왕은 틈틈이 함양에서 태산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행차하여 제사를 올리고 신을 철저히 섬겨 왔다. 그러나 여기서 이와 같이 노한 것은 사당의 주신이 지나족의 정통왕인 요순의 가통으로 그 후계국 주나라를 오랑캐의 나라 진이 멸망시킨 데 대해 노여움을 보인 것이라고 시왕이 이에 반발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것이라 시왕은 행노에 사당을 참배하고 치우사당에 매년 친히 제사를 올렸는데 여기서는 이와 같이 행동하였다. 堯임금은 그의 二女를 舜임금의 왕비로 출가시켰는 바 이러한 정략적이고 더욱이 친족간의 혼인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書傳』에 舜仁君과 堯女는 四從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어린 딸 둘을 모두 늙은 순임금에게 바치지 아니할 수 없음은 그가 순에게 대권을 양위하면서 천명이라 하여 비통한 말을 뒤풀이한 것으로 보아 일족의 안전 보장을 얻고자 한 일 것이다.
순임금의 아내가 된 堯女는 늙은 舜이 세상을 뜨자 또한 스스로 운명을 한탄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두 자매가 얼싸안고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였다고 한다. …却說… 세상이 하늘 같이 두려워하든 진시왕을 습격하여 비록 죽이지는 못하고 잡혔으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에 임하는 조선족의 태도에 크게 용기를 얻은 한족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유방과 항우가 패에서 일어났다. 한족은 주나라를 이은 정통 국가로서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되었다. 초나라의 항우는 한나라(漢)유방에게 패망함으로서 중원의 오랜 전란은 끝나고 한족(지나족)이 중원을 통일하였다. 진시왕의 연나라정벌로 많은 영토를 잃은 번조선왕 기준(기후의 손자)이 이제 漢寇를 단독 방어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임에 요서요토의 방위를 강화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때에 한나라는 진을 멸하고 이미 설치되어 있는 조선과 진과의 국경 패수(황하북로 서쪽)에 이르는 국경선을 그대로 답습하기로 약정하였다. 한나라 역사 기록에는 멀고 험한 곳으로서 지키기 어려워서 진시왕이 설정한 국경선을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하북과 산동 일대는 동이족이 개척하여 비옥하고 중원 제일의 문화적 선진 지역인데 멀고 험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일까?
(秦滅燕屬遼東爲激漢興爲其遠亂守復修遼東故塞之浿水爲界 『通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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