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1. 추모(周夢)의 高句麗 建國

자연정화 2013. 8. 24. 12:25

十一. 추모(周夢)의 高句麗 建國 
 

일행은 지금의 국내성에 본거지를 정하고 후세에 당왕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국내성에 있는 추모의 사당을 불사르고 모든 서적과 전각을 불살랐으니 이곳이 첫 연고지로서 추모 사당이 수도에 없고 이곳에 세우고 역대 황제가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이곳이 추모 대왕의 처음 피난지로 추측되는 오열홀에 정착하였다 주위 주민들을 보살피고 차츰 힘을 키워 원근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라 형태를 갖춘 후 용맹과 무위로서 졸본왕 송양을 항복 받고 영토를 확장하여 견실한 제국을 창설하니 졸본 부여라 하였다. 중원에서 패하고 만주로 퇴각한 해모수왕국 고리국의왕 해모수는 추모의 생부였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 유화와의 사이에 태어난 추모는 그 아들이다. 사양길에 접어든 소왕국 고리국의 창업은 BC 삼백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원 하북성 고죽성에 도읍 하였다가 패망한 옛 나라 칭호이다.

 

때에 해모수는 후사가 없다고도 한다 추모는 처음 졸본국이라 하였다가 생부를 만나 고리국을 합병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원래 해모수는 고등이라 하여 성이 고씨이며 고구려의 호칭도 그 성에 따라 지은 것이다. 당시 중원의 한나라이래 고구려의 호칭을 고려 또는 고구려로 병칭한 것도 이러한 사연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국은 해모수의 건국 기년인 BC 239년으로도 될 수 있으나 광개토대왕의 후세 비문에 주몽 성왕을 창업주로 기록하였기에 이를 따른다. 추모는 백관을 거느리고 천단에 올라 구환조 면류관을 쓰고 금구옥대를 두르고 단상에 오르니 대신들은 대례복에 청라관을 쓰고 백관이 금은고의 조복을 입고 오우관을 쓰고 단하에 나열하니 대신이 책서를 받으러 낭독하고 황제위에 오름을 선포하였다. BC 190년 황제는 고천레를 올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환궁하여 서훈할새 송양을 졸본후에 봉하고 협부를 대대로에 제수하고 마리를 주도부에 오이를 태대사에 각기 제수하고 무거를 내부 대문에 제사와 무골을 좌우 대형에 각기 제수하고 부분도를 도사에 제수하여 정서장군을 임명하고 태대사오이를 정동장군을 임명하였다. 한편 천자의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궁궐을 짓고 한편으로는 동으로 각부 난립한 예맥국을 정벌코자 출사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예맥 추장들이 연이어 망풍 귀순하니 위세가 떨쳤다.

 

이 때에 졸본 서북에 대부여의 열후국으로 여왕국이 있었다 대부호로서 덕망이 높은 연타발의 외동딸로서 대부여왕의 서잔인 우대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우대는 불류 ,온조 두 아들을 얻고 소왕국을 창업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내 서소노는 과수로서 나라를 지켜 왔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위세가 떨침에 사절을 교환하고 예물을 후히 보내 친교를 맺었다 서소노는 영리한 여걸이며 추모왕은 문무 겸비한 영웅이라 두터운 교분을 가지는 동안에 의기 상통하여 서로 재혼하였다. 추모왕은 그의 아들 불류와 온조를 친자식 같이 지극히 사랑하고 인격을 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나이는 추모는 이십대일 것이고 서소노는 삼십대일 것이다. 서소노여왕이 가진 재물은 고구려를 부흥하였다. 해부루 왕후비 유화는 주몽을 떠나 보낸 후 그 아들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금와왕은 그가 부왕의 후실로서 왕을 지성으로 받들고 왕실에 공헌한 어진 덕을 기리기 위하여 태후 예로 장사하고 태후묘를 지어 배향 하였다. 유화가 해부루왕의 비가 되어 생산을 못한 것으로 보아 해부루왕이 친자식을 얻지 못한 것은 그의 비빈들의 탓이 아니고 왕이 결함이 있었든 것으로 보인다. 주워 키운 금와왕은 많은 자식들을 두었다. 유화비가 세상을 떠남에 추모의 본처 예씨는 유복자를 데리고 서로 의지가 되었던 시어머니 유화비가 없으니 외로이 지내다가 남편 추모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으나 만날 수가 없으니 하루는 아들 유리에게 물었다.

 

"지금 너의 아버지는 고구려 왕으로 있으나 동부여 와는 적대 관계에 있으니 만날 수가 없다 어찌하면 좋을까?"고 하니, 아들 유리가 말하였다.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겠습니다. 간단한 준비를 하옵시면 소자가 남모르게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르게 말을 준비해 두었다가 몰래 빠져나와 먼길을 달려 고구려 영내에 이르러 변방 장수의 안내를 받아 왕검성에 당도하였다. 일찍이 추모가 대부여를 떠날 적에 자기 처를 동행할 수 없음으로 임신 중인 아내가 장차 출산할 아이에 대한 확인 방법을 일러두었다. 그 방법은 칼 한 자루를 반으로 부러뜨러 한쪽은 자기가 가지고 또 한쪽은 대궐 주춧돌 옆에 묻어 두고 아내 예씨에게 이르기를 "내가 칼 반쪽을 어느 곳에 묻어 두었으니 그 아이가 장성하거든 그것을 찾아 가지고 나에게로 오도록 하라."고 일러 놓았다. 그리하여 예씨는 아들 유리에게 그 칼을 찾도록 일렀다 유리는 모친이 말한 육각 나무를 인근산을 몇 일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종일 찾다가 돌아와서 궁궐 대청마루를 무심코 보니 궁궐 기둥이 육각 나무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육각 나무 모양만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설마 궁궐 기둥이라 생각하고 혹시나 싶어 궁궐 대청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쇠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들으니 궁궐 기둥 있는 곳이었다. 유리는 주춧돌 옆을 파 보았다. 과연 부러진 칼이 나왔다. 유리는 그 칼을 가지고 모친과 함께 추모왕을 만났다.

 

추모왕은 그것을 보고 자기가 보관하고 있는 불어진 칼을 가지고 오게 하여 유리가 가진 것과 맞추어 보니 과연 딱 맞아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추모는 크게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봉하고 장차 후계자로 세웠다. 이어 태공 송양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게 하였다. 송양의 딸은 아름답고 현명하여 왕실의 장래 왕후감으로써 흡족한 인품으로 추모는 흡족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역사의 연기 축소로 인한 모순이 계속된다. 추모 황제의 아들은 유타이고 유리는 손자이다 다시 거기에 대한 것을 기술할 것이나 여기서 수정하면 역사를 근본적으로 대수정을 해야 하므로 간단히 확정지을 문제가 아니므로 고구려 역사 축소 문제는 광범한 자료와 구체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조속한 시정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