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 韓信의 죽음과 英布의 반란
한나라에서 한신은 전시에 총대장이였으나 봉토를 주지 않고 회음후에 봉하여 함양에 두었다. 그것은 하나인즉 옆에 두고 감시함이요 둘은 영포 팽월 같은 한신의 부하였던 사람보다 하위 벼슬을 주어 불평을 토로하여 반심을 나타내게 하여 除去하는 명분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이기에는 너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情分과 功績때문에 주의의 눈총이 두려웠다. 그는 모든 것을 여후에게 맡기고 전국을 순수하고 다녔다.
마침내 한신은 반심을 나타냈다. 잠복한 간자의 밀고를 받은 여후의 초청을 받고 입궐하다가 궐문 안에 매복한 무사에게 포박되어 여후앞에 꿇어 앉아 한탄하였다. "내 일찌기 괵도사가 전하기를 지금 兵權을 잡고 있으니 일어서면 항거할 능력 있는자 없고 그 명성은 만민이 따를 만하니 곧 거행치 아니하면 화가 미칠것이니 장군은 유방을 믿고 있으나 유방은 장군을 두려워하니 그 손에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제 그 꼴이 되었으니 후회 막급이라!" 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군 한신은 한여자의 명령하에 목이 떨어졌다. 이리하여 두 장군은 제거 하였으나 이제 영후 영포 한 사람이 남았다. 이에 여후는 앞서 죽인 팽월의 살을 오려내어 젖을 담아 모든 열후에게 사신을 보내 나누어주고 술안주로 먹게 한 후 황공하여 하사한 고기를 먹는 자는 의심을 아니하고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자는 반심을 품은 자니 자세히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한족은 당시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대성한 문자 혁명과 동이족의 예의지국풍속을 익혀왔고 도덕관념을 깊이 연구 체득한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왔슴으로 크게 개화하였으나 아직 그것은 유문사희 일부이고 서민 대중은 아직도 식인 풍속이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도덕관념도 형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使者가 영포에게 "여후의 하사한 팽월의 고기젖이라." 하니 영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올라 머리털이 거꾸로 섰다. 팽월은 동고동락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영포는 알겠다하고 미루어 두고 먹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내심 '이 여우 같은 呂后년을 죽여 팽월의 원수를 갚겠다.'고 부하장군들에게 외쳤다.
때에 영포의 愛姬가 병으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틈을 혁이라는 그 의사는 長者라 의논할 만한즉 만나자고 하였다. 혁은 함께 반란을 이르키자고 할까 두려워 병을 칭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이에 화가난 영포는 혁을 체포코저 하였다. 이것을 전해들은 혁은 주야로 달려나가 유방에게 변을 고하였다. 고조는 상국 소하에게 이 일을 어찌 처리할고 물었다.
소하 가로되 "혁의 말을 그대로 믿지 못할 것인 즉 사람을 보내 그 진위를 다시 한번 영포를 만나 시험해 보아야 할것이라."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조사한 결과 과연 영포가 叛할 뜻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군신을 모아 놓고 대책을 의논하니 모두 군사들을 일으켜 치자고 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집에 돌아온 모사 등공은 그의 빈객 설공에게 무슨 좋은 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설공이 말하기를 "영포가 반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한 것 아니다"라고 하메, 등공 이 답하되 "上께서 땅을 떼주어 봉토하고 작위를 주어 귀하게하고 남면하여 만승의 왕이 되었거늘 무엇이 모자라 반할고?" 하였다. 이에 설공이 가로되, "전년에 팽월을 죽이고 왕년에 한신을 죽였으니 영포는 그 두사람과 같이 공을 세운 一體之人이라 다음 차례는 자기라고 생각함이라 하였다." 유방이 이 말을 듣고 설공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설공이 말하기를 "영포가 반한 것은 당연할 것임이라. 이제 영포가 군사를 이끌고 산동으로 나아가면 그것을 상책이니 영포는 원래 산동사람이며 山東은 본래 한나라땅이 아님니다. 영포가 中計를 취하면, 그 승부를 점칠 수 없고 하계로 나오면 폐하는 베게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이에 유방이 물었다. 山東으로 나가면 어찌 상책인지 설공이 다시 설명하기를, "영포가 산동으로 나아가면 동으로 오나라를 취하고 서로 초와 제를 어우르고 노로해서 연과 조 두나라를 어루만져 그 곳을 고수하면 山東은 원래 동이족의 조선제국이오니 그곳 주민은 조선족이라 번조선 과 합치면 지금 한 나라는 천하병마를 호령할 명장과 모사가 없고 영포의 鮮故地를 포기하고 한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폐하의 상책이요.
욕심을 부려 토벌코져 하다가 자칫 遼河에 있는 조선제국의 대군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면 한 나라의 보존이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영포가 東으로 오와西를 초와 韓을 취하고 위나라(이전 조선제국의 열후였음)에 의거하여 양곡을 쌓아놓고 요새를 지키고 성고의 험지에 의존하면 싸워서 승패를 모르옵고, 영포가 東으로 吳를 취하고 西로 채나라에 내려가 越을 중히하여 長沙로 돌아가면 이곳은 동이족과 인연이 그치는 곳이니 폐하는 베게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것이옵니다. 하였다. (薛公對曰布反不足怪也使布出於上計山東非漢之有也出於中計勝敗之數未可知也出於下計陛下安枕而臥矣上曰何謂上計對曰東取吳西取楚弁齊取魯傳檄燕趙固守其所山東非漢之有也何謂中計東取吳西取楚弁韓取魏據敖倉之粟塞成皐之口勝敗之數未可知也何謂下計東取吳西取下取下蔡歸重於越身歸長沙陛下安枕而臥漢無事矣, 鑑紀)
설공이 또 말하기를 "필연코 영포는 하계를 택할 것이라 하였다. 上이 그 이유를 물은즉, 가로되 영포가 동이족으로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고 用兵을 잘하여 제장이 경복하였사오나 그는 驢山之徒(여산지도)라 만승의 王이 되어 일신을 편하게 할 뿐이며 백성을 보살펴서 먼 장래를 설계하는 지혜가 없으니 우선 편한 하책을 택할 것임니다" 하였다. 그러하면 한나라는 무사할 것입니다. 여산지도란 불한당패거리출신이라 무예와 병법을 익혀 전쟁은 능하나 지도는 없다는 말이다. 또 산동은 원래 한나라땅이 아니다.(山東非漢地有也 鑑易)라고 말한 것은 영토만 조선 땅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 주민도 동이족이니 여기서 백성을 화합하면 지난날의 조선국의 제후국으로 돌아가면 중원은 다시 주인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이때 영포가 세가지 계책 모두 일차로 오나라를 든 것은 오에는 다수의 동이족이 살고 있어 영포의 고향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날의 중원에서의 조선족의 오랜 내란 특히 上谷(북경)일대에서 오랜 전쟁으로 또 진나라와 연나라의 전쟁으로 주민이 번조선 동지와 조선반도와 요동만주로 옥토를 버리고 이주하였다.
사서등 여러 책에 피난하는 조선족과 한족이 요동과 번조선기준 영토로 이주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싸움이 조선 영토에서 조선족의 내란이고 진나라가 조선국에 침입한 전쟁에 한족이 피난을 올 것인가 이것은 연을 주나라왕의 열후로 기술 한 것을 글씨 그대로 해석함이라 그러한 기록은 한족의 관행인바 주가 연을 정복한 일도 없고 연이 주나라에 칭신한 일도 없다. 다만 중국의 관행적인 기록일 뿐이다. 중국의 자존적 기록은 대단군 조선제국도 그들의 제후국이고 일본(倭)도 유구도 일본왕 왜왕 유구왕 등을 봉하고 신하가 되어 조공하고 진동장군에 봉하고 하였으나 정복을 했거나 직접 관리 혹은 통치한 일이 없다. 다만 그렇게 기록한 것 뿐이다. 여기서 알아둘 것은 일본은 왕을 진동장군으로 봉함을 받아 그것을 큰 명예로 하여 일본왕 토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진동 장군으로 자처하고 그의 정부를 쇼군깨(將軍家)로 불렀다. 그것은 당시 일본의 문화는 대륙국가에 비하여 많이 떨어져있던 문화인 탓이지, 전혀 중국의 절제를 받은바 없다. 그런데 동이족은 그러한 봉작을 명예로 생각하여 받은바 없고 당나라시절 망국적 조선제국의 말기에 당이 마구 봉작을 내려 분열을 조장했다. 서북부 중원을 차지하고 동북만주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동이족은 비옥한 농토와 광활한 목지를 가진 부유한 大제국을 형성하여 문화의 중심권이기도 하였다.
조선반도는 유목지가 없고 농토가 협소하여 극소수의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전쟁피난민으로 인구가 늘어나 馬韓은 나라를 형성하여 만주의 부여국 一群등이 남하하여 合流한 마한은 다만 그들의 협소한 지방일 뿐 그들의 본국은 역시 중원이며 중원을 한족이 독차지하는 것은 당시는 상상조차 할수없는 일이었다. 부유의 실언으로 피난해 온 조선족을 한족이 귀화하여 조선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영포는 과연 설공의 추측대로 下計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한고왕이 설공을 군사로 삼고 東으로 친정하여 영포를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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